소설리스트

화산귀환-667화 (665/1,567)

667화. 내가 주인인데 왜 사과를 해? (1)

양경은 언짢은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그가 화산에 오기까지 끔찍할 정도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화산이 상상 이상의 엄청난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는 점.

덕분에 그는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피곤에 지친 몸으로 사람이 바글바글한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야 했다.

그래, 사실 거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딱히 화산이 그들을 초대한 적이 없고, 제 발로 찾아온 길이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를 정말 열받게 만든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뭐? 숙소가 없어?”

“죄송합니다.”

방명록을 작성하던 빙궁도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너무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배첩을 받지 못하신 분들은 산 아래의 화음에서 묵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산 아래?”

양경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망할 산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란 말인가?”

빙궁도는 겸연쩍은 얼굴로 다시 한번 사과를 건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 산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가 보통 일은 아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숙소가 충분치 않아 벌어진 일이니 너그러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양경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럼, 화음에 내려가면 어디서 묵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전각이라도 있는가?”

“일찍 오신 분들께는 새로 지은 전각에 숙소를 내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그 자리도 다 차서 객잔이나 천막에서 묵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객잔에 자리가 있을지는…….”

“천막?”

양경은 황당함으로 물든 낯으로 빙궁도를 보았다.

“천우맹은 먼 곳에서 온 객을 천막에 재우는가?”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오셔서.”

“많이 왔다?”

양경이 사나운 얼굴로 이를 갈아붙였다.

“강호의 동도들이 그만큼 천우맹의 발족을 축하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축하를 위해 찾아온 객을 이따위로 대접하는가!”

그가 끝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놀라 돌아보았다. 소란이 이니 자연히 화산의 제자들도 반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재빨리 달려온 조걸이 양경을 보며 물었다.

“이보게.”

“예, 말씀하시지요.”

“나는 호남(湖南) 청백파(淸白派)의 문주인 양경이라고 하네. 강호에서는 나를 철담호(鐵膽豪)라 부르지.”

“양 문주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예의를 잘 갖추어 포권 했다. 그리고 물었다.

“한데……?”

왜 화를 냈냐는 질문이었다.

철담호 양경이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천우맹의 개파를 축하하기 위해서 먼 길을 감수하고 이곳까지 왔거늘, 쉴 곳 하나 내어 주지 못해 사람을 천막에서 자라고 하는 게 어디 도리에 맞는 일인가?”

무슨 일이었는지 충분히 다 짐작한 조걸은 살짝 난처한 얼굴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몰릴 줄 누가 알았나?’

아니, 알았다고 해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건물이라는 건 마음먹는다고 그 자리에서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나마 당가에서 힘을 써 주었기에 이 정도나마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본문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해라…….”

나지막이 말을 되뇐 양경이 묘한 눈빛으로 조걸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조걸은 양경이 애초에 화산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해라는 건 서로가 노력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안 그렇소, 도장?”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서 이 화산의 으리으리한 전각에는 어떤 분들이 묵게 되오?”

의도가 빤한 질문에 조걸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대답해 보시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분들이 묵게 됩니다.”

양경이 그럴 줄 알았단 듯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그 대단하신 분들은 으리으리한 전각에서 묵게 되는 거고, 우리처럼 이름 없는 놈들은 비렁뱅이처럼 천막이나 치고 자라?”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의미요?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는지 한번 듣고 싶소만?”

조걸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천하의 어떤 문파라도 이런 행사를 치른다면 똑같이 숙소를 배정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소림이 천하비무대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명문들에게는 소림의 전각을 내어 주고, 객들은 소림 밖에 묵도록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부분을 꼬투리 잡고 늘어진다?

이건 애초에 작정하고 시비를 걸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 조걸이 이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시원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행사를 문제없이 치러야 하는 입장이다. 사소한 다툼도 가급적 벌어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결국 조걸은 슬그머니 치미는 화를 참으며 다시 한번 공손히 말했다.

“본문의 사정이 여의치 않은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의치 않다…….”

양경이 히죽 웃었다.

화산이 무력은 강해졌을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아직 풋내기들이다. 그런 이들을 몰아가는 건 딱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양경은 주변에 몰린 이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다들 꽤 흥미롭다는 듯 그와 조걸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저 흥미 정도였다. 그들이 딱히 양경에게 동조하는 건 아니다. 다만 화산이 어찌 대처할지가 궁금하고 이 소란이 재미있는 것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그렇다 칩시다! 내 뭐 화산의 사정도 이해를 하오.”

“…….”

“그런데…… 저들은 뭐요?”

“예?”

양경이 무례한 턱짓으로 야수궁도들과 빙궁도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뭔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말이오. 본디 객의 자리가 없으면 주인은 안방이라도 내어 주어 객을 대접하는 법인데, 저 많은 이들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객이 쉴 곳이 부족한 것 아니오!”

조걸은 순간 황당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문주님. 이들은 천우맹의…….”

“정 자리가 부족하다면 저들이 전각을 내어 주면 될 일 아니오?”

“…….”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힌 조걸을 보며 양경이 의기양양하게 히죽 웃었다.

“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소? 애초에 북해빙궁은 추운 곳에 위치한 곳이니 거기서 온 이들이야 한데서 자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고. 남만야수궁이야 대놓고 야인들이니 길바닥에서 자는 것이 딱히 문제도 아니지 않겠소?”

조걸의 얼굴이 조금씩 분노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를 더 황당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 것은, 양경의 말에 곳곳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웃는다고?’

이런 후안무치한 말을 듣고 화를 내지는 못할망정, 웃는다고?

조걸의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대체 뭐가 심하단 말이오? 애초에 저들이야 척박한 새외에서 지내던 이들인데, 굳이 저리 대단한 전각을 내어 줄 필요가 있겠소? 이거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거는 격이지!”

“이…….”

조걸이 막 노호성을 터트리려는 순간, 사방에서 노골적인 웃음이 터졌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구려.”

“새외 사람들에게 이만한 전각이면 황궁이나 다름없지.”

“천막은 저들에게 주면 되겠구먼. 어차피 움막이나 짓고 사는 이들이니.”

조걸뿐 아니라 주변에 선 다른 화산 제자들의 얼굴도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치미는 분노에 입술까지 파르르 떨렸다.

‘깊구나.’

조걸은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빙궁과 야수궁은 중원을 배척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이유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이성과는 거리가 먼 법.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배척하는 이들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는 없는 법이다. 특히나 그게 과거부터 괄시하던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예로부터 중원은 새외의 문파들과 그곳의 사람들을 무시해 왔다. 남만야수궁이 매화검존을 그리 찬양하는 이유도, 야수궁과 운남의 위기를 깔끔하게 무시해 버린 다른 중원인들과 달리 유일하게 운남을 위해 싸워 주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화검존이 야수궁을 위해 싸웠다가 아니라 마교가 쳐들어왔음에도 중원은 새외를 돕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화산과 당가의 위세에 눌려 표출되지 않았던 새외사궁에 대한 악감정이 양경 덕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산과 당가면 충분할 텐데 야수궁과 빙궁은 왜 불렀는지 모르겠군.”

“중원의 문파가 새외의 문파와 연합이 되겠는가? 그래 봐야 이민족들인데.”

“괜히 물 흐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말이란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법.

굳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상황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슬쩍슬쩍 한 마디씩 보태니 점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소곤거림으로 시작한 목소리가 이내 웅성거림으로 바뀔 때쯤 더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다 생각한 조걸이 목청을 돋웠다.

“지나친 말은 삼가 주십시오. 빙궁과 야수궁은 화산의 친우입니다. 이들에 대한 모욕은 화산에 대한 모욕과 마찬가지입니다!”

“허허. 내 화산을 좋게 보았건만.”

조걸이 화를 내었음에도 양경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되레 능글맞은 얼굴로 이죽거릴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오? 더 모욕을 하면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

“어디 한번 해 보시오. 화산은 새외의 이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중원의 문파들을 핍박해 내쫓는 곳이었구먼! 퉷!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이 먼 길을 와서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조걸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를 향해 꽂혀 드는 시선들이 영 곱질 않았다. 이족들을 위해서 중원의 문파를 쫓아낸다는 양경의 말이 아무래도 결정타가 된 모양이었다.

평소의 조걸이었다면 이런 말에 결코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려 당당히 그렇다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생처음 겪어 보는 큰 행사이고, 심지어 화산이 주체가 되는 행사이니 문제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게…….”

그때 그의 등 뒤에 있던 빙궁도가 보다 못해 앞으로 나섰다.

“애먼 사람 붙들고 시비 걸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내게 직접 말하시오.”

“뭐라고?”

“그쪽은 당사자에게는 말을 못 붙이고, 해볼 만하다 싶은 어린 도사에게만 목청을 높이는 겁쟁이요?”

“이…… 이 오랑캐 놈이 어디서……!”

“뭐라고?”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 망할 놈이!”

오랑캐라는 말에 상황을 지켜보던 야수궁도들과 빙궁도들이 발끈하여 앞으로 성큼 나섰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걸이 다급히 야수궁도들과 빙궁도들을 만류했다.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됩니다. 천우맹의 개파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까.”

“…….”

야수궁도들과 빙궁도들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닫았다. 물러나고 싶지는 않지만, 조걸이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조걸의 말이 그들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양경에게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하! 입만 산 놈들이 꽁지를 마는구나!”

그 말에 굴욕감을 느꼈는지 물러나던 빙궁도가 이를 갈며 말했다.

“……여기가 화산이 아니었으면 네 목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뭐라고?”

그 살벌한 기세에 양경은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야만인 놈이!”

그리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 더러운 이민족 놈들이 어디 목을 뻣뻣하게 세워! 주제도 모르고!”

“더러운 이민족?”

빙궁도들과 야수궁도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드잡이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화산과 당가의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그 더러운 발로 중원을 더럽히지 말고 당장 너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이 야만인 놈들아!”

“양 문주!”

조걸이 더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지르며 앞으로 나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라고, 이 새끼야?”

움찔.

삽시간에 사색이 된 조걸이 고개를 획 돌렸다.

‘아, 안 돼!’

사람들 사이에서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좌우를 쭉 둘러본 청명의 시선이 양경에게로 고정되었다.

“이게 누굴 건드려! 간덩이가 처붓다 못해 터졌나? 야! 이리 와 봐! 오라고!”

‘아, 안…….’

조걸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여 청명의 소매를 콱 움켜잡는다.

아니, 움켜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벼락이라면 청명의 몸은 섬전이었다. 청명의 몸은 마치 환상인 양 빠져나가 빛살처럼 앞으로 날아들었다. 조걸이 움켜쥔 건 허공뿐이었다.

이윽고.

콰드드득!

청명의 발이 양경의 얼굴에 힘차게 틀어박혔다.

세상이 정지한 듯 고요해졌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턱이 빠져라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말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정적을 깬 건 얼굴을 걷어차이고 나가 떨어진 양경의 비명 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주변의 화산 제자들이 동시에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망했다…….’

화산의 제일 우선 목적이었던 ‘청명이 사고 치지 않게 막는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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