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이게 누굴 건드려? (6)
“사실일까?”
“뭐가?”
“그 아까 들은 이야기 말일세. 화산이 북해에서 마교를 무찔렀다고…….”
“그럼 설마 북해빙궁주쯤 되는 이가 없는 말을 지어내기야 했겠는가?”
“그 아직 아이 같던데 그럴 수도…….”
말을 하던 이가 순간 재빨리 입을 닫았다. 앞쪽에 지나가던 북해빙궁의 궁도가 순간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자 빙궁도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덩달아 숨죽이던 이가 소곤소곤 면박을 주었다.
“입조심 좀 하게! 그놈의 입!”
“미, 미안하네.”
“듣자 하니 북해빙궁의 궁주는 명문세가의 가주처럼 혈연으로 이어진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린 궁주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 그렇지.”
슬쩍 눈치를 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하튼 사실이라면 어마어마한 일이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 마교인데.”
“……그냥 마교도 몇몇을 찾아 처리한 게 아닐까?”
“예끼, 이 사람아! 북해도 분별이 있을 텐데, 겨우 그 정도의 일로 은혜를 입었다며 고개를 숙이겠는가?”
“듣고 보니 그도 그런데…….”
“답답한 일이지.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확인할 도리가 왜 없는가!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응?”
한 명이 슬쩍 빙궁의 궁도들을 향해 턱짓했다.
“북해에서 벌어진 일이니 북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뭔가 좀 껄끄러운데.”
중원과 좀처럼 왕래가 없었던 북해빙궁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이민족이다 보니 쉽사리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껄끄러울 게 뭐가 있나! 저들도 천우맹의 개파식에 참가하러 온 건데 설마 화를 내기야 하겠나? 내 한번 물어보겠네.”
호기롭게 말을 한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피다 마침 앞을 지나는 빙궁도 하나를 슬쩍 불러 세웠다.
“저기…….”
“무슨 일이오?”
그러자 빙궁도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뭐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그러시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사내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그…… 귀문의 궁주님께서 하신 말씀 말이외다.”
“어떤 말씀 말이오?”
“그, 있잖습니까. 북해에서 화산이 마교를 무찔렀다는…….”
그러자 빙궁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 말이군.”
“예, 예! 그 말이 사실입니까?”
사내가 화색을 띠며 묻자 빙궁도의 눈이 슬쩍 가느스름해졌다.
“지금 본궁의 궁주께서 허언을 입에 담았다고 의심하는 거요?”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지요.”
빙궁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파에 사내는 기겁하여 빠르게 말을 보탰다.
“그런 게 아니옵고, 그 마교의 잔당이라는 이들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궁금하여…….”
잠깐 정적이 흘렀다. 빙궁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요?”
“그게, 저희는 들은 바가…….”
빙궁도, 송원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못 말릴 사람들이로군.’
그런 어마어마한 공을 세우고도 한 마디 자랑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무리 공은 내세우는 게 아니라지만 그건 그저 이상일 뿐이다. 대부분은 자그마한 공만 세워도 입이 근질거려 못 참지 않는가.
“그 잔당이 어느 정도나 되었습니까?”
사내가 슬그머니 재촉하자 송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라.’
자신의 공은 감추고 남의 공을 치하하는 게 선(善)이라 하던가? 화산이 선을 따른다면 그도 선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게 어찌된 일이고 하니…….”
송원이 살짝 과정을 섞어 북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요.”
“…….”
“…….”
어느새 송원 주위로 잔뜩 모여든 이들은 채신없이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 주교라고요?”
“그렇소.”
“주, 주교와 이백이 넘는 마교도라니. 세상에…….”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화산이 북해에서 마교를 막았단 말을 듣고 기껏해야 잔당 몇을 잡은 수준일 거라 생각했던 이들은 모두 송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비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북해인은 허언을 하지 않소.”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워낙 대단한 일이라…….”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오. 그 마지막 전투에 나 역시 참가했으니.”
“…….”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의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챈 송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본 것을 그대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지만, 내가 겪은 것을 보여 줄 방법은 있지.”
“예?”
송원이 자신의 윗옷을 풀기 시작했다.
‘응?’
영문 모를 행동에 둘러싼 이들이 살짝 술렁거렸지만, 송원은 대답하는 대신 상의를 확 열어젖혔다.
“허억!”
“저…… 저!”
완전히 드러난 그의 상체에는 굵은 뱀 같은 검은 흉터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미 아물었음에도 여전히 움푹 패여 있는 상처는 그가 사선을 넘어 이 자리에 섰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 그 상처는…….”
“맞소. 마교도와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요.”
한눈에 보아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처였다.
꿀꺽.
여기저기서 긴장하여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에……. 전부 사실이었구나.”
“화산이…….”
빠르게 변해 가는 분위기를 보며 송원은 옷을 여민 후 쐐기를 박았다.
“화산오검이 와 주지 않았더라면 북해는 죽음의 땅이 되었을 것이오. 북해인들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쯤은 중원 역시 무사하지 못했겠지.”
“…….”
얼핏 듣기엔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겨우 다섯이 지원을 간 정도로 뭐가 그리 달라진다는 말인가?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세상 어떤 문파가 타문을 치하하기 위해서 자신의 문파를 낮추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빙궁도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다는 건, 화산의 공이 그만큼이나 크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빙궁뿐 아니라 중원도 화산에 감사해야 할 것이오. 은혜를 모른다면 짐승이나 다름없지 않겠소?”
날카롭게 한마디 남긴 송원은 다시 몸을 획 돌려 멀어졌다.
“……다 사실이구나.”
누군가 신음하듯 흘린 말이 사람들의 뇌리를 똑똑히 파고들었다.
“척마오걸을 모른다고 했소?”
“…….”
공만리는 제 쪽으로 향한 야수궁도의 눈을 보며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저리도 노골적으로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지?’ 하고 말하는 눈빛은 살다 살다 처음 받아 보았다.
“하…….”
야수궁도가 헛웃음을 짓자, 구릿빛 팔에 오밀조밀 붙은 탄탄한 잔근육이 함께 꿈틀거렸다.
“아니, 그래. 척마오걸을 모를 수는 있다 칩시다. 그런데 매화검존을 모른다고? 중원 사람들은 다 눈 감고 귀까지 틀어막은 채로 사는 거요? 어떻게 매화검존을 모를 수가 있소? 그분 덕분에 멀쩡히 태어나 살아 있는 이들이!”
“…….”
“중원 사람들은 예의와 도리를 중요시 여긴다고 들었건만, 말짱 헛소리였군! 어떻게 마교를 무찌르고 천마를 물리친 매화검존을 모른단 말을 그리도 당당히 하는 거요? 한심하기 짝이 없군!”
“…….”
‘아까 댁네 궁주가 말한 매화검존이 대체 누구요?’라는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난생처음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받은 공만리는 세상 억울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처음 듣는 이야긴데…….”
“뭐요?”
그러자 야수궁도의 눈이 슬쩍 번들거렸다. 삽시간에 굶주린 늑대처럼 돌변해 버린 그의 기세에 공만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어떻게 중원인이 매화검존을 모를 수가 있소! 그분의 검이 무찌른 마교도가 몇이고, 그분이 쓰러뜨린 주교가 몇이며, 그분이 구한 문파가 몇인데! 이런 빌어처먹을!”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하니 화산의 제자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무, 무슨 일입니까?”
“아니! 이 머저리 같은 양반들이 매화검존을 모른다지 않소!”
“뭐?”
“중원인이 매화검존을 몰라?”
“미쳤어?”
매화검존을 모른단 말을 듣고 야수궁도들도 우르르 달려왔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하고 살벌한지 누구 하나 잡아다 찢어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 작자야?”
“누굴 모른다고?”
“알게 해 줘?”
순식간에 몰려온 야수궁도들에게 둘러싸인 공만리는 사색이 되어 화산의 문도들을 바라보았다.
“사, 살려 주십쇼!”
“그래, 살려 주셨지! 매화검존께서! 그런데 누굴 모른다고?”
“지, 진정들 하십시오!”
윤종이 식은땀을 흘리며 야수궁도들을 만류했다. 일전에 야수궁을 방문했을 때도 느꼈지만, 이들의 매화검존에 대한 존중은 화산조차도 따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화산조차 매화검존의 사당을 따로 모시지 않거늘, 야수궁에는 매화검존의 사당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자기들 역대 궁주를 모시는 사당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워낙 긴장하여 그러려니 넘겼는데, 돌이켜 보면 사문의 선대도 아닌 다른 문파의 사람을 사당까지 만들어 기린다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가?
“똑똑히 알아 둬라! 매화검존께서 과거 마교를 무찌르고 중원과 새외를 구하셨다! 바로 이 화산의 매화검존께서!”
“예! 예! 알았습니다!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안 거 맞아?”
“아직 영 모르는 것 같은데!”
“몸에 새겨 줘야 하나?”
야수궁도들이 공만리를 위협하듯 눈을 부라리며 몰아붙이자 윤종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개, 객으로 찾아오신 분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야수궁도들은 거짓말처럼 순순히 손을 털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물러서라!”
“화산 분의 말씀이시다. 풀어줘!”
“예!”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압박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공만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쯧. 여기가 운남이었으면 으슥한 데로 끌고 갔을 텐데.”
“아니면 뱀 굴에 던져 줬거나.”
“에이, 아쉽구먼.”
“…….”
야수궁도들의 중얼거림에 중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윤종은 빙그레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야수궁은 부르지 말걸.’
원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다.
빙궁도들이 북해에서 화산이 얼마나 뛰어난 활약을 했는지 세세하게 전달하고, 야수궁도들은 눈을 부라리며 매화검존을 찬양하기 시작하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의혹은 점점 커져 갔다.
모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만일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거나, 화산이 직접 이 이야기를 했다면 더 들을 것도 없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려준 게 다른 곳도 아닌 야수궁과 빙궁이다.
야수궁은 중원과 담을 쌓은 채 살아왔고, 빙궁은 저 척박한 땅에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살았다. 그런 이들이 화산을 올려 쳐 얻을 것이 뭐가 있다고 저리 열정적으로 비호하겠는가?
그렇다는 건 저 말이 얼추 사실에 가깝단 건데…….
“화산이 과거에 그렇게 대단한 문파였던가?”
“그런데 왜 이리 알려진 게 없었지?”
“아, 아니지. 사실 나도 들은 적은 있네. 과거의 화산은 무당보다 더 강했었다고.”
“그냥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겠는가?”
“그런 문파가 왜 구파일방에서 쫓겨날 정도로 몰락한 건가?”
“몰락이라니! 화산이 북해에서 한 일을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몰락한 문파가 무슨 수로 그런 일을 하겠어! 게다가 얼마 전에는 무당과의 비무에서도 승리했지!”
“그, 그렇지. 그렇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나는 무당이 화산에 맞춰서 적당히 상대해 준 줄 알았건만 아니었던 모양이로군. 무당의 장로가 삼대제자에게 꺾였다는 말이 너무 황당하니 믿지 않았는데, 화산이 북해에서 한 일이 사실이라면 그게 꼭 말도 안 되는 일만은 아니겠어!”
“그렇지! 그렇지!”
빠르게 변해 가는 분위기를 가만 지켜보던 백천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아준다고 하더니.’
화산이 직접 자신들의 공을 설파하고 다녔다면 결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그저 참아 내고 묵묵히 걸어온 덕에 이런 반응이 돌아온 것이다.
‘개파식은 성공적이겠어.’
이런 호의적인 반응을 유지하고 이끌어 갈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야만인 놈이!”
순간 귀를 찌르는 소리에 백천의 고개가 번개처럼 획 돌아갔다.
‘뭐지?’
저쪽에도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이야 보았지만, 빙궁도나 야수궁도가 또 이야기판을 벌렸나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더러운 이민족 놈들이 어디 목을 뻣뻣하게 세워! 주제도 모르고!”
지켜야 할 선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그 무도한 말에 백천은 경악했다.
‘저게 무슨……!’
그리고 내심 욱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하지만 백천의 화는 빠르게 다른 우려로 바뀌었다.
그는 일단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백천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행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절대 사고가 일어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화산에는 작은 사고도 순식간에 대형 사고로 부풀리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없지?’
여기 없지?
하얗게 질려 있던 백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감돌았다.
‘그래. 빠, 빨리. 그 새끼가 오기 전에 당장 처리해야 한다!’
백천은 빠르게 사건이 생긴 쪽을 향해 다가갔다. 말리든 걷어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습부터 해야 했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슬픈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는다.
“뭐라고, 이 새끼야?”
또렷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천이 황망히 멈춰 섰다.
“이게 누굴 건드려? 간덩이가 처붓다 못해 터졌나?! 야! 이리 와 봐! 콱 씨, 오라고!”
눈으로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감할 수 있었다.
이젠 걱정이고 뭐고 다 떠나 서글플 지경이었다.
‘원시천존이시여.’
왜 저 새끼는 사고가 나는 곳에는 항상 어김없이 있는 겁니까.
왜!
아니! 왜에에에에에에!
따져 물어도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