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이게 누굴 건드려? (5)
“화산이로군.”
법계가 영 마뜩찮은 눈으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과거 법정을 수행하며 왔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지만, 확실히 화산이라는 산은 도관이 자리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봉우리는 사람을 포용하기보다는 위협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하지만 법계는 이내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그는 장문인의 명을 받아 천우맹의 발족을 축하하러 가는 길.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축하만 해 주고 돌아가는 것이 임무였…….
응?
문득 눈에 스치는 이상한 풍경에 법계가 고개를 갸웃했다.
산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초조하게 올라오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화산으로 오는 내내 지겹도록 인파에 시달렸으니, 저기 저렇게 사람이 모여 있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기에 모인 이들이 법계의 눈에 꽤 낯이 익은 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왜 저기에?’
복색을 보아하니 구파와 오대세가의 인물들 같은데, 좋은 대접을 받으며 숙소에서 쉬고 있어도 모자랄 이들이 왜 저기에 저리 모여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단 말인가?
더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오. 오신다!”
“저기 오신다!”
응?
갑작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법계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이 삽시간에 그를 향해 우르르 달려와 둘러쌌다.
“아, 아미타불. 왜, 왜들 이러시는 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법계 장로님!”
인사마저도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대충 인사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 그들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소림에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예?”
“그…… 그, 그러니까 화산의 제자들이 북해로 가서 마교와 싸운 것이 사실입니까?”
법계가 눈을 부릅떴다.
“그, 그걸……. 어디서?”
“북해빙궁의 궁주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아미타불.”
순간 말문이 막힌 법계는 불호만 간신히 외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은…….’
딱히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니다. 화산이 제 입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소림이 떠벌이는 것도 이상하여 입을 닫았을 뿐이다. 먼저 묻는 이가 없는데 굳이 공표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소식이 하필이면 지금 터진 모양이었다.
“사실입니까?”
“……그렇소이다.”
법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두가 알게 되었다면 굳이 확인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일전에 이미 북해에서 마교의 종적이 발견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협조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
“소림조차 갈 수 없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화산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화산에서 북해로 가 준 덕분에 마교의 잔당들이 발호하는 것을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허어.”
“하필이면…….”
돌아오는 그들의 시선에 원망이 섞인 것을 보며 법계는 나직하게 불호를 외었다.
‘어리석은지고.’
그때 이곳에 있는 문파들이 소림에 힘을 실어 주고 북해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함께 애써 주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외면으로 벌어진 일이거늘, 어찌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말인가?
‘방장.’
왜 법정이 화산을 비호하는지 새삼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물론 마교를 막아 낸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소식이 지금 알려질 줄은…….”
“반응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본문 차원에서 대응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못 하는 이들을 보며 법계는 다소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그저 축하만 전하러 온 자리건만, 시작부터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청명이 맹소와 설소백의 얼굴을 뚱하게 번갈아 보았다.
“……굳이?”
“네.”
“그렇게 대놓고?”
“하하하하핫.”
맹소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대놓고라니. 누가 보면 은밀하게 숨겨야 할 일로 알겠구나! 알려져서 부끄럽기는커녕 되레 자랑스러울 일이거늘, 그걸 말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냐!”
“하여튼…….”
청명이 혀를 끌끌 찼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맹소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우둔한 이가 아니다. 외려 무척이나 똑똑하고 계산이 빠른 이다.
곰의 탈을 쓴 여우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이가 바로 맹소다.
그런 그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저 많은 이들 앞에서 매화검존 이야기를 꺼냈을 리는 없다. 모든 게 계산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미리 말이나 좀 해 주지 그랬어요.”
“굳이?”
맹소는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 껄껄 웃었다.
“내가 운남의 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허락을 구할 일은 아니지. 아무리 네가 화산의 제자라고 해도 말이다.”
“끄응. 그렇기는 한데…….”
그게 나라고, 이 새끼야! 내가 매화검존이라고!
와, 나 이 말 엄청 오랜만에 해 보는 것 같네! 세상 사람들! 내가 그 매화검존입니다! 내가 매화검존이고, 매화검존이 나라고!
“그리고!”
쾅!
그때 맹소가 돌연 과격하게 다탁을 내리쳤다. 그 솥뚜껑 같은 손에 얻어맞고도 멀쩡한 다탁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매화검존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사람의 목소리가 지붕을 들썩이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이들이 슬그머니 귀를 틀어막았다.
“후안무치한 것들! 검존께서 마교를 무찌르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살아 있지도 못할 것들이! 어찌 화산을 이리 대접한다는 말이더냐!”
“거, 일단 진정 좀…….”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건 운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분기탱천하여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맹소가 연신 다탁을 두들겨 댔다. 아끼는 다기 옆을 맹소가 내리칠 때마다 현종의 얼굴이 점차 시꺼멓게 죽어 갔다.
“이 벼락을 맞아 뒈질 놈들 같으니!”
어……. 맞는데. 그 말 맞는데…….
댁이 그렇게 과하게 화를 내니까, 내가 같이 화를 내기가 좀 어색한데…….
그때였다.
“맞습니다!”
“엥?”
청명이 고개가 획 돌아갔다. 설소백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과거의 일을 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마교를 무너뜨리고!”
“잔당! 잔당! 마교가 아니라, 마교의 잔당!”
잔당이야, 이 새끼야! 마교라고 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 엄청 대단한 걸 한 것 같잖아. 그건 옛날의 화산도 못 했어!
“북해, 더 나아가서는 중원을 구한 곳이 바로 화산이 아닙니까! 그런 화산이 새로 맹을 만든다고 하면 당장 와서 머리를 조아리지는 못할망정!”
“미, 미쳤어?”
“당연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지요!”
“…….”
“어떻게 저리 슬슬 간을 본단 말입니까!”
“내 말이!”
산만한 덩치의 맹소와 아직 덜 자란 설소백이 의기투합하여 손을 맞잡았다.
청명은 믿기 힘든 그 광경을 보다 빙그레 웃었다.
‘괜찮을까?’
이런 대책 없는 인간들끼리 모여서 맹을 만들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여태 가만히 듣고 있던 당군악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른다면 알려 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렇지!”
“맞습니다.”
“화산이 이룬 것에 비해 그 명성이 높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건 이제까지의 일입니다. 우리가 화산의 과거를, 그리고 지금의 화산이 해 온 일들을 알려 나가고 존중한다면, 강호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맹소가 코웃음을 쳤다.
“저 배은망덕한 것들이 그걸 알겠소이까?”
“그러니까요!”
소백아……. 그 아저씨한테 물들면 안 돼. 그럼 북해 사람들이 힘들어진다. 너 여기 왜 왔니…….
대뜸 화살은 청명에게도 돌아왔다.
“도장님은 화도 안 나세요? 저들이 누리는 평화는 도장님이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잖아요!”
“아니, 모르는데 뭘 어쩌겠어?”
“아는 사람이 없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전말을 아는 이들이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저는 너무 화가 납니다.”
정말로 분한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씩씩대는 설소백을 보며 청명은 피식 웃고 말았다.
“화라…….”
설소백이야 북해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겠지만, 청명에게는 마치 과거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화는 나는데…….”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알아달라고 소리칠 생각은 없어.”
“어째서요?”
“안다 해도 필요할 때 와서 도와주지는 않거든.”
“…….”
어딘지 냉소가 어린 말이었다.
설소백은 멍한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명성도 좋고, 찬사도 좋지. 하지만 그런 건 정작 필요할 때 도움이 안 돼. 그게 의미가 있었다면 화산이 몰락할 일은 없었겠지.”
“으음…….”
“필요한 건 찬사를 보내 줄 사람이 아니라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나지막히 말하던 청명이 이내 씨익 웃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처럼.”
“크하하하하핫!”
맹소가 흡족한 듯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파안대소했다.
“맞는 말이다. 화산신룡은 한 번씩 이렇게 핵심을 꿰뚫지. 평소에는 애먼 데만 찔러 대서 문제지만.”
저기요? 굳이 뒷말을 붙이실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웃음을 그친 맹소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소. 중요한 건 본질이지. 우리는 그러기 위해 이곳에 모였으니까.”
“예, 그렇죠.”
설소백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이 거기에 차분히 말을 보탰다.
“그렇기에 천우맹입니다. 서로 좋은 말만 늘어놓고, 뒤로는 이득을 계산하는 관계는 이미 신물이 나도록 겪어 보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득과 실리를 제쳐 두고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가 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맞소.”
“그렇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현종에게로 모였다.
“장문인. 쉽지 않은 자리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곳의 세 문파는 오직 화산과의 관계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장문인께서 화산을 대표하여 천우맹의 맹주의 자리에 올라 모두를 이끌어 주십시오.”
이미 정해진 이야기다.
하지만 네 문파의 수장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만히 찻잔을 쓰다듬던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조금 다릅니다. 당가주님.”
“예?”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돕기 위해 모였다면, 이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감투를 하나 쓴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아…….”
“모두들 화산을 도와주십시오. 우리 화산도 최선을 다해 모두를 돕겠습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실감하고 있었다.
“청명아.”
“네?”
현종의 부름에 청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걸로 된 것이냐?”
“음…….”
청명이 볼을 긁었다.
“제가 말을 할 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언제 그런 걸 따졌다고.”
“하하핫. 경우를 아는 척도 하는구나, 화산신룡.”
“역시 도장님! 예의도 바르시지!”
“…….”
저 사람들 중에 설소백이 제일 밉다고 생각한 청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구파도, 오대세가도 처음에는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으응?”
“처음에는 서로 좋은 뜻으로 모였겠죠, 그리고 처음에는 서로 돕는 곳이었을지도 몰라요.”
“…….”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관계라는 건 변질되고, 다른 게 끼어들기 마련이죠.”
“맞는 말이네.”
“지금은 몰라도 후대에는 그럴지도 모르지.”
다들 일리가 있다는 듯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파앙!
청명이 바닥을 탁 내려치고는 씨익 웃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고요!”
“허.”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모두 말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겉으로는 웃는다 해도, 결국 문파와 문파의 관계라는 건 안으로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들으면 이 순간만큼은 그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싶어졌다. 그게 이 모든 이들을 이곳으로 모이게 만든 청명의 힘이었다.
현종은 더없이 자랑스러운 눈길로 청명을 바라보다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명아.”
“네!”
청명이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목을 살짝 뺐다.
“아까 보니 네가 설 궁주님께 반말을 하더구나.”
“…….”
“존대하거라.”
“…….”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설소백에게로 돌아갔다.
어색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앳된 얼굴을 보며, 청명은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꾹 참았다.
‘내 나이가…… 내 나이가 몇인데.’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말해 무엇 해.
‘장문사형.’
제가 이렇게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