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이게 누굴 건드려? (4)
“빙궁이라고?!”
“진짜 오는구나.”
중인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산문 쪽에 집중했다.
남만야수궁과 더불어 새외사궁의 하나이며, 저 북해에서 왕처럼 군림한다는 북해빙궁.
그들이 마침내 긴 시간을 뛰어넘어 바로 이곳, 화산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북해빙궁이 천우맹에 적을 두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였다. 하지만 그저 함께하는 것과, 북해빙궁이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직접 찾아오는 것은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기대의 시선이 잠시간 쏟아졌고, 이내 좌우로 열린 길을 따라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
“저, 저 사람들이 빙궁의…….”
모두가 숨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말을 삼갔다.
남만야수궁의 등장은 충격적이기는 해도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색다르고 신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무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은 아예 달랐다.
‘완전히 날이 서 있군.’
‘저들이 그 유명한 북해의 검수들…….’
북해빙궁의 검수들은 북해의 삭풍처럼 차갑고 날카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인 빙궁도들은 그 말이 허언이 아님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백의를 갖춰 입은, 차갑기 짝이 없는 표정의 무인들이 완벽하게 줄지어 걸어오는 모습은 북해에 대한 감정을 접어 두고 우선 감탄부터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워낙 중원과 오래도록 단절되어 있어서 과연 새외사궁이 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와 함께 회자되는 것이 정당한가 의심을 품던 이들도, 지금 북해빙궁의 모습을 본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척! 척! 척! 척!
절도 있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우호적인 행사를 위해 오는 이들이라기보다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행군처럼 보였다. 자연히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렸다.
하지만.
“청명 도장니이이이이이이임!”
“엥?”
대뜸 들려온 목소리에 중인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
“왜 저기 애가 있지?”
도열한 무인들 사이에서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이 튀어나와 전력으로 산문 안으로 들어왔다.
“구, 궁주니이이임!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고 제가……!”
그리고 그 소년의 뒤로 웬 중년인이 기겁을 하며 따라붙었다.
‘뭐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소년은 그런 중인들의 시선 따윈 느껴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일직선으로 뛰어간 소년이 한 사람 앞에서 급격하게 멈춰 섰다.
“하아…… 헉, 후우……! 청명 도장님!”
“…….”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앞에 선 설소백을 보며 청명이 피식 웃었다.
“너 좀 큰 것 같다?”
“네, 도장님!”
“뭐 하러 이 먼 데까지 직접 왔어. 그냥 사람만 보내면 되지.”
“저도 말렸습니다.”
뒤로 따라붙은 한이명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저만 와도 된다고 했는데, 궁주께서 직접 화산을 보고 싶으시다고…….”
설소백이 한이명을 획 돌아보더니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함께하는 문파가 어떤 곳인지 눈으로 보지도 않고 어찌 백 년을 넘어 천 년의 대사를 논하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청명이 순수한 감상을 내어 놓았다.
“……입은 살았네.”
아주 번지르르해.
“다시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도장님!”
“그래, 그래. 오느라 고생했어.”
청명이 씩 웃으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지금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아! 저분께서……!”
설소백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의 검수들이 산문 안으로 모두 들어오기를 잠깐 기다린 그는 앞장 서서 현종을 향해 나아갔다.
그 모습에 당군악과 맹소가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빙궁과 화산이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필요하리란 걸 알아챈 것이다.
현종이 살짝 난처한 듯 웃었지만, 설소백은 이내 그의 앞에 서서 큰 동작으로 포권 했다.
“북해빙궁의 궁주, 설소백이 대 화산파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궁주.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현종이 따뜻한 눈으로 설소백을 바라보았다.
“이역만리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소. 이렇게 궁주께서 직접 찾아와 자리를 빛내 주시니 빈도가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장문인!”
설소백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씩씩하게 소리쳤다.
“화산이 북해에 주신 은혜에 비한다면 이곳까지 직접 오는 것 정도는 고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잠깐 말을 멈춘 설소백이 한이명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이명이 지금이 맞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먼저…….”
숨을 한번 가다듬은 설소백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북해가 화산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장문인께서 화산오검을 북해로 보내 주신 덕에 북해의 환란을 정리하고 백성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가진 식량까지 내어 북해인들을 도우려 한 화산의 의기가 지금도 북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살짝 움찔한 청명이 한이명을 보자 그는 살짝 미묘한 미소를 보일 듯 말 듯 머금었다.
‘시켰구만.’
저 양반이, 저……. 아이고, 이거.
“그리고!”
아직 준비한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설소백이 아주 살짝 어색한 목소리로 외쳤다. 설소백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그 어색함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설소백을 처음 보다 보니 뭐가 이상한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화산의 도움으로 저 저주스러운 마교의 음모를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을, 북해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듣던 이들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 마교가 왜 나와?”
마교.
다른 말은 몰라도 그 말만은 똑똑히 들렸다. 강호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이라면 놓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북해에 마교가 나타났었다고?”
“화산이 빙궁을 도와 마교를 막아 냈다는 건가?”
“그 마교를?”
“자, 잔당이겠지.”
“아니, 아니지! 잔당이라고 해도 마교를 막아 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 아닌가! 그런데 왜 그 사실이 중원에는 알려지지 않았지?”
“……그야 북해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중원에 들어오지 않고, 중원인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하려 해도 기회가 없었겠지.”
“그럼 화산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도 지금까지 생색 한 번 내지 않았다는 건가?”
“마, 말이 그렇게 되나?”
모두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현종과 설소백을 번갈아 보았다.
쉽사리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이라고는 하나, 북해빙궁의 궁주라는 이가 이렇게나 많은 이들 앞에서 거짓을 늘어놓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부족한 설소백의 위엄은 그 뒤에 선 한이명과 칼날 같은 기세의 북해빙궁 검수들이 채워 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내세우지 않는 것이 도인의 본분이라고는 하나, 세상에……. 그런 일을 해내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니.”
“빙궁주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몰랐을 일 아닌가.”
“대단해. 정말 대단하구만.”
속닥속닥 들려오는 중인들의 목소리를 들은 설소백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북해불망은(北海不忘恩). 북해는 결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북해의 모두는 이 일을 가슴에 품고 화산의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설소백이 다시 고개를 숙이려 하자 현종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듣기로…….”
“예, 장문인.”
“제자들과 빙궁의 사람들은 친우가 되었다고 들었소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 장문인. 감히 저희가 화산의 친우를 자처하고자 합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 헛된 말이오. 진심으로 믿고 친교를 나누는 이들 사이에 은혜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장문인…….”
“잘 오셨습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던 설소백이 이내 빙긋 웃었다. 현종은 그런 그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설소백이 슬쩍 돌아보자 한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궁주님. 바깥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럼 부탁합니다, 총관님.”
“이리로.”
현종과 당군악, 그리고 맹소와 설소백이 환담을 나누며 장문인의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내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도 중인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 그건 딱히 대단한 목적 없이 이곳을 찾은 이들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을 가지고 화산에 올랐던 이들은 저마다 굳은 얼굴로 속삭이고 있었다.
“장로님. 화산과 새외문파의 결속이 생각 이상으로 단단해 보입니다.”
“……그렇구나.”
얼굴을 굳힌 팽악이 장문인 처소 쪽을 바라보았다.
천우맹은 무척 기형적인 곳이다.
구파일방이었던 화산, 그리고 오대세가의 일원인 사천당가, 거기에 새외사궁인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나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서로 미묘한 껄끄러움이 있는 관계이다. 그리고 저 새외사궁과는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이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세력에 속한 문파들이 서로 모여 하나의 맹을 이루었다.
‘운남과 중원, 그리고 북해를 잇는 교역로가 이 맹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거늘.’
돈은 귀신도 부리는 법이다. 막대한 이익이 있다면 원수끼리도 손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천우맹의 결성 역시 그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지켜본 이들은 그 생각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당가가 화산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게 아니었구나. 정말 천우맹의 중심이 당가가 아닌 화산이었어.”
이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이익을 위해 모인 이들은 더 이상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순간 미련 없이 돌아선다. 하지만 의리로 모인 이들은 서로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본문에 연통을 넣거라. 아무래도 이 상황을 알려야 할 것 같다.”
“예!”
지시를 내린 팽악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중인들이 저마다 이 일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야수궁주의 말대로라면 과거에 화산의 매화검존이 운남을 구했다는 것 아닌가?”
“에이. 그럴 리가 있는가. 우리도 모르는 일을 운남인들이 어떻게 알고.”
“이런 멍청한 소리를 봤나! 그럼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저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화산의 장문인에게 저렇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단 말인가?”
“……그냥 보여 주기식 아니겠는가?”
“그냥 볼거리를 만들겠다고 남만야수궁이 화산에 고개를 숙인다고? 야수궁이 화산에 비해 못할 게 뭐가 있는가!”
“그, 그건 그렇지만…….”
“야수궁은 굶어 죽어 가는 와중에도 원한을 잊지 않았던 문파네. 그러니까 백 년 가까이 중원과의 교역을 끊었던 게 아닌가! 그런 문파가 단순히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논하고 남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그럼 저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그 매화검존이라는 분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거지?”
누군가는 매화검존에 대해 말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마교라니……. 세상에, 마교의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단 말인가?”
“중원은 몰라도 북해라면 그럴 만도 하지. 북해의 땅이 넓은 것이야 유명하지 않나.”
“잔당이라고 해도 마교네! 마교의 잔당을 처리했다는 건 엄청난 공이야! 그런데 지금까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는 건가?”
“화산 아닌가! 녹림의 대별채를 토벌하고 그 재물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모조리 나눠준 곳이 바로 화산일세.”
“허허허……. 협의라는 건가. 이런 세상에?”
그 쑥덕거림을 모두 듣던 팽악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말이 들불처럼 퍼지겠구나.’
야수궁의 말도, 빙궁의 말도 어느 하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 없다.
이곳에 모인 건 각 문파의 중진들이거나 강호사에 관심이 너무 많아 굳이 오지 않아도 될 길을 온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모두 들었으니, 그 파장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 상황을 노리고 만든 것이라면…….’
팽악의 시선이 장문인 처소 쪽에 매섭게 꽂혔다.
‘화산은 정말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문파다……. 아니, 천우맹이 생각 이상으로 무서운 곳이라고 해야겠지.’
천우맹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낄낄낄낄.”
“…….”
그런데 대뜸 상황에 맞지 않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팽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화산신룡이 더없이 사악한 얼굴로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사람은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된단 말이지. 낄낄낄낄.”
“…….”
어쩐지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빠지는 팽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