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2화. 이게 누굴 건드려? (2)
“여기 물은 어디에 있소!”
“저쪽! 저기 전각 앞에 마실 물을 가득 떠 놓았습니다.”
“측간은 어디로 가야 하오?”
“저기 기둥에 매화가 새겨진 전각 뒤편으로 쭉 가시면…….”
“엥? 전각마다 매화가 다 새겨져 있는데?”
“저기 이 층짜리 전각 뒤쪽입니다.”
“오, 고맙소.”
“아니, 아니. 이거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요?”
“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바삐 대답하는 윤종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이만한 사람들을 눈으로 보는 일도 흔치 않은데, 심지어 그 인원들을 관리하고 안내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더구나 화산은 그 문파의 명성에 비해서 문도의 수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곳이 아니던가?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는 물론이고 일대제자들까지 있는 대로 나서서 뛰어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옆으로 나오지 마시고 제대로 줄을 서시기 바랍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거기! 누가 이곳에서 싸우라고 했소? 쫓겨나고 싶으시오?”
윤종은 당가인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역시! 역시 전문가다!’
이런 일을 처음 치러 보는 터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화산의 제자들과는 달리 당가인들은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럴 때면 확실히 명문의 저력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저 무위만 높아진다고 명문이라 불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화산도 사천당가처럼 수많은 일들을 겪고 그 모든 일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명문의 자격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윤종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속으로 다시 한번 의지를 되새겼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소!”
“아!”
순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아까부터 질문을 했던 객이 짜증이 잔뜩 치민 얼굴로 윤종을 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윤종은 잠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새 윤종의 등 뒤로 바짝 다가온 백천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신 말했다. 부아가 치밀었던 객은 백천의 얼굴을 보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요. 하……. 하하. 객이 이리 많으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이해라니요. 당연한 것을. 정말 고생들이 많으시오.”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 버린 사내의 모습에 윤종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사람 차별하나?’
더러운 세상 같으니!
심지어 더 서글픈 것은, 스스로도 이 차별이 이해가 되어 버렸단 점이었다.
윤종이라 해도 백천이 저 얼굴을 들이밀며 사과한다면 받아 주지 않고는 못 버텼을 테니까.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잘생겨야지.
항의하던 이들이 자리로 돌아가자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백천이 살짝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다독였다.
“고생이 많구나.”
“……사숙이 오시기 전까지는 마음만큼은 고생스럽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냐?”
“그놈한테 시달리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다행이구나.”
사실이기는 했다. 보통 이런 일은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큰 법이다. 화산 제자들의 육체가 바위와도 같다면, 청명에게 단련된 정신은 금강석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의도적으로 단련을 시킨 건 아니었단 점이 문제지만 말이다.
백천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잘해 주고 있군.’
당가의 도움이 크긴 하지만, 확실히 화산의 제자들도 제 몫을 해 주고 있다. 다들 신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보고 있자니 백천도 절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살짝 미소 지은 백천은 이내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 한들 사람이 이만큼 모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한시도 눈을 떼지 말거라.”
“……그런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응?”
“청명이는요?”
순간 윤종은 보았다.
말 그대로 찬란하고 눈부시게 빛나던 백천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끼는 것을 말이다.
“……안 그래도 찾는 중이었다.”
“구석에 기어 들어가서 박힌 것 같은데,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집 어딘가에 묻혀 있는데 그냥 편하게 생활하고 누워 잘 수 있느냐?”
“불가능하죠.”
서글픈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 백천이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를 찾거나 운암 사숙께 말씀드리거라. 정 없으면 백상이라도 찾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조걸이 관리 철저히 해라.”
“……그것도 명심하겠습니다.”
당부를 마친 백천은 여기저기를 가만 둘러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새끼가 진짜 어디로 가서 숨었지?”
청명이라는 놈은 정말 희한했다.
눈앞에 있으면 속이 뒤집어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극도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화산의 제자들에게 청명이 놈이 눈앞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다들 눈물을 머금고 청명이 보이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눈앞에 벌어지는 산사태가,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밀려드는 해일보단 나을 테니까.
“끄응. 야수궁이나 빙궁이 빨리 도착해 줘야 할 텐데. 그럼 인력도 늘어날 테고 나도 좀 더 수월하게 청명이 놈을 쫓아다닐 수 있을 텐데.”
컹컹!
“……나도 개소리라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네?”
“방금 개 소리를 내지 않았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응?”
백천이 윤종과 마주 보며 갸웃하던 그때였다.
컹! 컹컹!
왈왈왈왈!
백천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게 뭔 개 소리야?’
청명이가 뭔가를 지껄일 때 같은 ‘개소리’말고 정말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너도 들었느냐?”
“방금 분명 개 짖는 소리가…….”
소리를 들은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모두 당혹감이 어렸다.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사실 민가가 있는 곳이면 개 짖는 소리 따위야 어디서든 들을 수 있으니,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문제는 여기는 바로 화산이라는 것.
새도 날다 지쳐 쉬어 간다는 화산의 정상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리 있겠는가? 심지어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오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모두가 소리가 들려오는 산문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중인들을 응대하고 있던 당가의 식솔들 역시 당황한 얼굴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아니, 이게 뭔…….”
“비, 비켜 봐!”
산문을 채우고 있던 이들이 기겁하며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자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인파가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야수궁이네.”
“예. 야수궁이네요.”
“누가 봐도 야수궁이구나.”
보는 즉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커다란 몸집의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칠게 산발한 머리는 지저분하다기보다는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웅장해서, 안 그래도 큰 덩치를 더욱 커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에 몸에 두른 호랑이 가죽과 고급스러운 가죽신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하지만 지금 그 사내의 외양보다도 더 시선을 앗아 가는 것은, 그의 앞에서 한껏 이를 드러내고 있는 커다란 개였다.
“컹! 컹컹! 컹! 으르르르!”
검은 개 두 마리가 쇠사슬로 만든 목줄을 찬 채로 금방이라도 사람들에게 달려들 것처럼 좌우를 노려보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구의 사내가 목줄을 가볍게 잡아당기니 갑자기 순해져선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궁주님이네.”
“네. 궁주님이네요.”
백천은 살짝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다, 어느새 옆에 나타난 당패를 향해 물었다.
“……짐승은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했다면서요?”
“분명 그랬죠. 그런데…….”
“그런데요?”
“……개를 데리고 오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거든요. 상상도 못 했으니까…….”
“…….”
어쨌든 확실히 당가의 책임은 아니었다.
“가자!”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함께 맹소가 개들을 앞세워 화산으로 걸어 들어왔다. 문제는 야수궁에서 온 이가 맹소 한 명이 아니란 점이었다.
아르르르르!
왈! 왈왈! 왈왈왈!
그의 뒤를 따르는 이들도 적어도 개를 한 마리씩은 끌고 오고 있었다.
커다란 개, 중간 크기 정도의 개, 귀여……. 어. 쟤는 진짜 좀 깜찍한……. 아, 이게 아니고!
백천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한탄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푹 감쌌다.
“……저게 무슨 야수궁이야. 개장수들이지.”
짐승을 데려오지 말라고 했더니 개를 데리고 오네, 개를!
백천의 입장에서는 속에서 천불이 나고 그 자리에서 뒤집어질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야수궁의 등장을 이보다 화려하게 알릴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지, 저들은……?”
“중원의 복색이 아닌데?”
“야, 야수궁! 남만야수궁이야!”
“뭐? 저들이?”
중인들의 놀란 시선이 야수궁도들을 향해 쏠렸다.
남만야수궁.
이름이야 수없이 들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운남은 지금 중원 무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고, 야수궁도들은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야수궁……. 그런데 야수궁이 왜 야수가 아니라 개를 끌고 오는가?”
“개도 야수 아닐까?”
“미쳤어?”
“……미안하네.”
확실히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야수궁도들에게서는 어마어마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리고 사실 궁도들의 잘 발달된 근육까지 논할 것도 없었다. 그냥 선두에 선 맹소만 보아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하지만 뭐랄까…….
‘엄청 센 개장수들 같네.’
‘이렇게 이상한 광경은 살면서 처음 보는구먼.’
‘듣던 거랑은 뭔가 많이 다른데.’
중인들은 모두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백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개를…….”
그때.
“허허.”
별안간 들린 웃음소리에 백천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어디선가 나타난 청명이 그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개판이네.”
“…….”
백천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명아. 내가 참으로 오랜만에 네 의견에 온 마음으로 동의한다.
그러니까 저거 좀 어떻게 안 되겠니?
그런 그의 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청명이 휘적휘적 산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선두에서 걸어오던 맹소가 청명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으하하…….”
하나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앞서서 걷던 개들이 눈을 까뒤집고 짖기 시작했다.
컹! 컹컹! 컹!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개들이 몸부림을 하니 목에 감긴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쭈, 이 개새끼들…….”
청명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빼꼼.
그의 목 아래에서 고개를 내민 백아가 개들을 보며 까만 눈을 매섭게 뜨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카악!
깨갱. 깨애애앵.
그러자 사납게 으르렁대고 짖어 대던 개들이 황급히 꼬리를 말며 오줌을 질금질금 흘려 대었다. 덜덜 떠는 그 애처로운 모습에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쟤들 갑자기 왜 저래?”
다른 이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맹소에게는 나름 즐거운 여흥인 모양으로 한껏 즐거워 보였다.
“그 녀석은 여전하구만. 그래, 자네도 여전한가?”
“뭔 개를 이렇게 끌고 오셨어요? 야수궁이 개방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아닐 텐데.”
“응? 아니……. 뭐, 운남에서 데리고 온 것은 아니네. 자네도 알다시피 야수궁은 개들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곳이 아닌가?”
확실히 그랬다. 족제비가 호랑이 싸대기를 때리는 동넨데, 평범한 개가 무슨 수로 살아남겠는가.
“당가의 요청도 있고 해서, 우리만 따로 출발했네만…….”
“했는데?”
맹소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오다 보니 버려지고 떠도는 들개들이 너무 많더군. 굶어 죽어 가는 개들도 많고.”
“…….”
“그래서 한 마리 한 마리 거두다 보니…….”
백아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은 개들이 맹소의 다리를 친친 감으며 머리를 처박고 숨어들었다.
“정이 들어서 그만…….”
“…….”
맹소의 순박한 말을 들으며 청명은 뺨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서…… 개를 이만큼이나?”
“……버릴 수도 없잖은가. 산 밑에 두고 오려고 했더니, 이놈들이 도통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서.”
“…….”
조금 어색하게 서 있던 맹소가 이내 다시 호방한 웃음을 터트렸다. 꽤나 어색한 전환이었다.
“하하핫!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들어가세! 간만에 자네를 보니 내 기분이 하늘을 뚫을 것 같구만!”
“얼버무리지 말고!”
“하하하하핫! 들어가세, 들어가!”
“끄응…….”
청명의 어깨를 호탕하게 두드린 맹소가 개들을 모두 이끌고 화산 안으로 들어섰다.
화산을 채우고 있던 중인들에게 남만야수궁이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확실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