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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61화 (659/1,567)

661화. 이게 누굴 건드려? (1)

“장문인을 뵙습니다.”

예의를 갖춘 팽악이 앞에 있는 현종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돌려 당군악을 마주 보았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당가주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당군악이 진중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북팽가와 사천당가는 같은 오대세가다 보니 나름의 왕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군악은 팽악과도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천당가에서 뵐 때와는 느낌이 무척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소이까?”

오대세가의 소속인 사천당가가 다른 협의도 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넌지시 찌르는 말이었지만, 당군악은 딱히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팽악의 말을 무던히 넘겨 버렸다.

팽악의 눈빛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예전에도 느꼈지만, 확실히 당군악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였다.

“우선…….”

그때 현종이 먼저 입을 연다.

“가장 먼저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순서를 양보하고 기다려 주신 것에 감사하외다.”

“아닙니다, 장문인.”

팽악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가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아서이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나누고 싶은 말이 많다라…….”

현종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대표하여 온 이들 몇몇을 만났지만, 대부분은 그저 가벼운 축하만 전하고 갔을 뿐,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기꺼운 일이군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이게 기꺼워하실 일인지.”

슬쩍 쓰게 웃은 팽악이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천우맹을 만드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고착화되어 가던 강호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수 있겠지요.”

당군악은 말없이 팽악을 바라보았다.

“하나 당가주께서는 이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모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

팽악의 시선은 실로 날카로웠다.

“하북팽가의 가주께서도 당가의 움직임에 큰 우려를 표하고 계십니다. 가주의 의도가 어떠하시든, 외부에서 볼 때는 당가가 오대세가를 벗어나 천우맹에 적을 두는 것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내내 말이 없던 당군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리 보여 안 될 것도 없소.”

“……예?”

“딱히 틀리지 않은 이야기니.”

예상치 못한 답변에 팽악은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본 가주가 그리 대단한 인물은 아니나, 입에 쉬이 거짓을 올릴 만한 위치는 아니오.”

담담하고도 진지한 대답에 팽악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하면, 지금 사천당가가 오대세가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까?”

“선언해야 한다면 선언해야겠지.”

당군악은 차분한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그 눈빛이 흡사 몸을 꿰뚫는 듯했다.

팽악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만일 저 말을 한 이가 당군악이 아니었다면 금방이라도 고함을 내질렀을 표정이었다.

사천당가의 가주라는 직위와 당군악이라는 사람이 가지는 위엄이 팽악을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게 내리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팽악의 표정을 살피던 현종은 가만히 찻잔을 그의 앞쪽으로 밀었다.

“운남의 차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기에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팽악은 입술을 짓씹으며 찻잔을 바라보았다.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리는 차를 보다 그는 이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했습니다.”

현종은 빙그레 웃었다.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에 흥분하신 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당군악은 차갑게 압박하고 현종은 온화하게 풀어 준다.

팽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팽가의 장로인 그조차도 이 조합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데, 평범한 중소 문파의 장들이 이곳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천우맹의 존재는 팽가 역시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딱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은, 당가와 화산이 연합해 봐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천우맹이 처절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면 오대세가에서 당가의 위상도 많이 하락할 터. 그럼 오히려 팽가가 반사이익을 얻게 될 테니 굳이 나서서 호들갑을 떨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불과 몇 달 사이에 상황이 이리 달라질 것이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상전벽해라는 말도 무색했다.

사천당가야 그렇다 쳐도, 화산의 명성이 말 그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것도 불과 몇 달 만에.

녹림의 난을 평정하고 무당과의 비무에서 승리를 거뒀으니 천하가 화산의 이름으로 들끓을 만도 했다.

‘게다가…….’

최근 화산이 북해와의 교역을 시작했다는 말이 들리다 못해, 북해빙궁이 천우맹에 합류한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는가?

저 소림조차도 어쩌지 못했던 것이 북해다.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화산의 위상은 지금보다도 한층 더 상승할 것이 분명했다.

“당가주님.”

팽악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는 말을 돌려 할 줄 모르는 이들입니다.”

“익히 알고 있소.”

당군악이 고소를 머금었다.

오대세가 중 성격 급하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팽가다. 다른 문파들은 적당히 인사치레를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일단 지켜보려 하는데, 팽가만 이리 만나자마자 말을 늘어놓는 것만 보아도 그 성미의 급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껏 강호는 천우맹을 그저 중원 서부 문파들의 연합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거요.”

당군악은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팽악은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연합이라 하더라도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지요. 그리고 같은 이들이 참여한다 해도 그들의 위상에 따라 연합의 위상도 달라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현재 천우맹의 위상은 과도하게 높습니다.”

팽악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낸 후 말을 이었다.

“팽가의 가주께서는 천우맹의 존재가 고요하던 강호를 뒤흔들까 우려하고 계십니다.”

당군악의 시선은 여전히 고요하게 팽악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엔 팽가가 말을 돌릴 줄 모른다 하시더니, 팽 장로께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오.”

“…….”

“지금 팽 가주께서 걱정하시는 것은 강호의 혼란이 아니라 강호가 둘로 분열돼서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게 되는 것 아니오?”

“그건…….”

당군악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내 팽가가 우려하는 바는 잘 알고 있으나, 그렇다 해서 뜻을 꺾을 생각은 없소.”

“하면…… 정말 구파와 오대세가를 적대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팽악이 다시 한번 추궁하자 가만 듣고 있던 현종이 당군악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조금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오대세가를 나오겠다는 것이 어찌 오대세가와의 적대를 의미하는 것이외까?”

“…….”

“구파와 오대세가가 아닌 다른 연합을 만든다는 것이 구파와 오대세가와 적대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그 말씀대로라면 구파와 오대세가 역시 서로 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장로님.”

빙그레 웃은 현종이 부드럽게 팽악의 말허리를 잘랐다.

“본도는 천우맹의 존재가 강호에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한 천우맹입니다.”

“…….”

“우려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더는 반박하기도 힘들 만큼 부드럽고 매끄러운 말이었다.

하나 그 속에는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결국 팽악은 한숨을 쉬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장문인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가주님의 뜻도 이해했습니다.”

“알아주셔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강호는 의지만으로 되는 곳이 아닙니다. 두 분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강호는 천우맹을 그리 고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

“악의 없이 드리는 말씀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어쩌면 이 맹의 존재가 화산과 당가를 몰락으로 이끌지도 모릅니다.”

거침없는 언사에 당군악의 눈이 스산해졌다.

하지만 현종은 그 말을 듣고도 빙긋 웃을 뿐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하나 세상에는 어려워도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설사 비할 바 없는 힘겨움을 버텨야 한다고 해도, 꼭 걸어야 하는 길이라면 어찌 주저하겠습니까?”

팽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팽 가주께 전하시오. 천우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고, 굳이 그 구성을 중원 서부의 문파들에 한정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시라고 말이오.”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팽악은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포권 했다.

“다시 한번 새로운 맹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팽가는 개파식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인사를 드리고 떠날 예정입니다.”

“그래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자리를 빛내 주심에 있어 팽가의 가주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예. 그럼.”

팽악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도 미련이 남는 듯 슬쩍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현종이라…….’

당군악은 강하다.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을 인물이다.

물론 강함은 좋은 것이다. 강호는 강자가 지배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당군악은 무위뿐 아니라 그 성정도 강하다는 점이었다.

무작정 강한 이는 결국 분란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만일 천우맹의 수장이 당군악이었다면 팽악은 딱히 천우맹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피로 이어진 가문을 완벽하게 지배하여 부흥시키는 데는 다시없을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뜻으로 모인 이들을 하나로 엮을 수는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화산……. 화산이구나.’

현종은 다르다.

팽악이 초면에 꽤 날카로운 말을 연이어 내뱉었음에도 현종은 단 한 번도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커다란 맹이 생기고 그 맹주 자리에 오르게 된 이는 어깨에 자연히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설령 평소에 그렇지 않은 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찬사를 늘어놓고, 아부를 떨어 대는 데에 금세 익숙해지고 작은 지적은 고깝게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은 자세로 그를 상대했다.

만일 당군악이 다른 문파를 힘으로 억누르고, 현종이 그들을 잘 달래 이끄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아직 천우맹의 저력을 모두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겁게 한숨을 내쉰 팽악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가주께 드릴 말씀이 많겠구나.’

방에 남겨진 현종과 당군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현종이 조용히 말했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팽가만은 아닐 것입니다.”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문인.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이곳에 온 이들 중 천우맹의 결성을 반기는 이는 아마 삼 할도 채 되지 않겠지요.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로 한정한다면 일 할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일 할이라. 새삼 가시밭길이라는 것이 실감나는구려.”

쉽지 않은 일이다. 이건 천하를 지배해 온 질서에 반기를 드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저 많은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

“그건 마뜩치 않아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의미겠지요.”

당군악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이제는 천우맹이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저들에게 보여 주면 됩니다. 이번 개파식은 그걸 위한 것입니다.”

“내 당가주의 뜻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소이다. 내가 이런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지.”

“장문인께서 맡지 않으신다면 그 누구도 천우맹의 맹주가 될 수 없습니다.”

“…….”

“다른 건 다 접어 두고라도…….”

당군악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장문인께서 맹주에서 물러나신다 하면 칼을 물고 쫓아와 날뛸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칼만 물면 다행이지요.”

피식 웃어 버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장문인.”

“예, 가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건 해야 할 일입니다.”

“…….”

“저는 장문인과 화산을 믿습니다. 그러니 화산도 저희 당가를 믿어 주십시오.”

사뭇 진지한 당군악의 말에 현종이 부드럽게 웃었다.

“당가가 아니면 누굴 믿겠습니까. 앞으로도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이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때.

와장창창!

별안간 머리 위에서 들린 커다란 소음에 둘의 시선이 일제히 천장으로 향했다.

“야, 이 새끼야! 장문인 처소 지붕에 처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아, 진짜 잔소리는!”

“이리 와! 이리 안 와?! 으아, 빌어먹을!”

맞잡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

“…….”

두 사람은 생각했다. 어쩌면 천우맹의 가장 큰 적은 구파도, 오대세가도 아닐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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