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뭐가 이렇게 많이 와? (5)
“…….”
청명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니…….”
그의 시선은 산문으로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오는 인파의 행렬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보면 그냥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 정도지만, 산문 앞으로 나가 화산을 내려다보면 등산로로 올라오는 인파의 행렬이 마치 산을 타고 오르는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뭐가 이렇게 많이 와?”
청명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대곤 고개를 획 돌렸다.
이미 화산으로 들어온 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게 보였다. 연무장을 두어 바퀴 휘감고도 남은 줄은 현종이 있는 장문인 처소로 이어져 있었다.
“……아직 행사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엥?”
곁에 있던 당패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막상 행사가 시작되면 장문인을 만날 수가 없으니까요. 행사를 치러야 할 분들이 각 문파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아 일일이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러니 대부분의 문파들은 행사 시작보다 먼저 찾아와 장문인과의 독대를 원하지요.”
“……그래도 이렇게나요?”
“보통 이 정도는 아닙니다만…….”
당패가 기꺼운 듯 웃었다.
“그만큼이나 천우맹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뜻이겠지요.”
“…….”
청명은 황당함이 가득 묻어나는 눈길로 인파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는 인원 수였다.
‘아니. 사람 많이 모이라고 약을 좀 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효과가 이만큼이나 좋다고?
“아무래도 당황스러우신 모양입니다. 하긴 화산에서 이 많은 인파를 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도장. 앞으로는 자주 볼 광경이니까요.”
화산에서 많은 인파를 볼 일이 없긴! 옛날 화산에선 이 정도는 일상이었어, 이 새끼야!
다만 어째 이 광경이 좀 낯설기도 한 게……. 어…….
왜지?
그래도 그 당시의 화산에선 이만한 행사가 몇 번이고 벌어졌을 텐데, 왜 기억에 없…….
“아…….”
순간 청명의 머릿속에 지난 사형제들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 사형! 사형! 제발 방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아니, 사형! 그러지 마시고 저기 가서 수련이라도 좀 하십시오. 제가 이렇게 술까지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장소만 말씀해 주시면 제가 주안상도 날라다 드리겠습니다.
- 사형! 장문인께서 절대 화산에 들어오지 마시랍니다!
- 혹여 지나가는 이를 마주치더라도 시비를 거시거나 패시면 안 됩니다! 아니, 혹여 패시더라도 절대 불구로는 만드시면 안 됩니다!
-너 차라리 종남에라도 한번 다녀오거라. 뭐? 용무? 그냥 가라면 가, 이 새끼야!
청명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내가 그때는 이게 이런 중요한 행사인 줄 몰랐지.
사람이라는 게 입장을 바꿔 봐야 상대의 입장을 알 수 있다고…….
만일 지금 화산의 제자 중에 누가 객으로 온 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끝내 두들겨 팬다?
청명은 아마 눈이 뒤집힌 채로 그놈을 먼지 나게 두드려 팬 다음 절벽에서 냅다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사형제들은 청명을 두들겨 팰 힘이 없지 않았는가? 그러니 속만 터져 나갔을 것이다.
‘아, 거…… 미안하다고.’
새삼스레 밀려드는 무안함에 청명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리고 다시 앞을 응시했다.
새로 깔끔하게 정비된 화산 전각들 앞으로 인파가 몰려 있고, 몇 되지 않는 화산의 제자들과 당가의 식솔들이 방명록을 작성하고 안으로 들어온 인원들을 관리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그는 다시 태어난 후 화산에 올랐을 때를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산문을 통해 들어와서 본 화산은 그가 알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활기도 없고, 도가 특유의 선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은 다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화산을 지키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서도 생기랄 게 보이질 않았다.
반쯤 무너져 흉가가 되어 버린 화산을 목도했을 때의 그 감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랬던 화산에 이제는 다시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쯧.”
거 기분 이상하게…….
슬쩍 찡해지는 코끝을 슥 문지른 청명은 이내 활기차게 어깨를 쫙 폈다.
“다들 바빠 보이는데, 그럼 나도 한번 도와 볼까!”
그리고 씩씩하게 성큼 걸어 객들에게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꾸욱.
“응?”
누군가가 붙들어 오는 손길에 청명이 뒤를 돌아보니 당패가 그의 소매를 부여잡은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그…… 아,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화산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야 하고, 천우맹의 수장으로서 독자적으로 행사를 치러야 할 일도 많을 거라 하셨습니다.”
“근데요?”
“그러니…… 화산신룡께서는 괜히 작은 일을 직접 하시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
“크, 큰일이 있을 때 나서시라는 거지요! 큰일이 있을 때!”
청명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당패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패는 어색하게 딴청을 피우고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가주가 시켰어요?”
“……꼭 그런 건 아니고…….”
“…….”
세월은 흘렀고 화산은 많이도 달라졌다.
하지만 청명이 받는 취급은 예전과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이제 하다못해 당가에서 감시가 붙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도 청명은 나름 성장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 새끼가 누굴 감시해?’ 하고 외치며 그 자리에서 대가리를 깨 버렸겠지만, 이제는 그냥 흘겨보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가?
‘나도 많이 착해졌다.’
이러다 곧 등선하겠네, 등선하겠어.
- 개소리를 정성껏도 하는구나.
“아니, 근데 이 양반이!”
“예?”
“……아니에요.”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이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희한하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눈만 마주치면 싸운다는 무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딱히 큰소리도 안 나고.”
“하하하. 농담이시지요?”
“네?”
당패가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이곳을 찾아온 이들은 대체로 화산과 천우맹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잔치를 벌이는 곳에서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 게 당연하겠지요.”
“아, 보통은 그래요?”
“……뭐가 이상하십니까?”
“아뇨……. 뭐가 이상하다기보다는…….”
청명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아니, 이 새끼들이 사람을 초대해 놓고 이따위로 대접을 해? 오냐, 오늘 현판 한번 내려 보자! 다 이리 와, 이 새끼들아! 안 그래도 머리에도 안 맞는 도관 쓰고 있기 엿 같았는데, 내가 오늘 도관 끈 푼다! 이리 안 와?!
“…….”
미안합니다, 사형.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청명은 하늘 위에서 또 욕이 들려오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내렸다.
“아니, 그런데…….”
그러다 그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손님들도 이만큼 찼는데, 남만야수궁은 왜 아직 도착을 안 해! 이 양반이 덩치가 크다고 걸음도 느린가?”
“하하……. 야수궁은 워낙에 멀지 않습니까. 미리미리 전달해 두었으니 본 식에는 늦지 않게 도착할 겁니다.”
“쯧. 금방 도착할 것 같다더니.”
청명이 혀를 차고는 막 불평을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산문 쪽에서 갑자기 크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응? 왔나?”
목을 쭉 빼서 살피려는데 마침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팽가다! 하북팽가가 왔어!”
“오?”
미처 생각지 못한 이름에 청명은 고소를 머금었다.
“초대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정말 올 줄은 몰랐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성이다! 청성도 왔다!”
“저기 개방 아닌가? 맞네, 맞아! 개방도 온다!”
“오! 공동! 공동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들에 청명도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거물들의 행차시구만.”
당패는 결연한 얼굴로 청명의 소매를 잡고 끌었다.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산문으로 가시죠!”
“네? 왜요?”
“이름이 있는 이들에겐 그에 걸맞은 대접이 필요합니다. 장문께서 직접 객을 맞으실 필요는 없지만, 적당히 이름이 있는 이가 나서 주는 게 좋습니다. 화산신룡의 명성이라면 비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서!”
“에잉. 귀찮게.”
청명은 성가시단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당패에게 질질 끌려 산문 쪽으로 향했다.
방명록을 작성하고 화산에 들기 위해서 대기하던 이들이 거물들의 등장에 너나 할 것 없이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길을 따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일원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섰다.
척.
산문 앞에 선 청명이 허리를 쭉 폈다.
‘히익!’
‘당패 저 양반이 미쳤나?’
‘뭔 생각이야?’
방문객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던 화산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기겁하여 돌처럼 굳었다.
아니, 청명이 놈을 구석에 밀어 넣지는 못할망정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곳에다 데려다 놓다니.
‘망했다!’
‘수, 수습해야 돼!’
‘장로님! 장로님들 어디 가셨지?’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청명이 가만히 양손을 모아 공수를 취하더니 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화산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 길을 오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
“…….”
새파랗게 질려 있던 백천이 천천히 입을 쩍 벌렸다.
옆에 있던 나머지 오검 역시 혼이 빠진 얼굴로 그 광경을 보았다.
“……봤냐? 청명이가 사람같이 말했어.”
“반말도 안 했는데?”
“……저게 ‘예의’라는 건가?”
청명을 모르는 이들에게야 너무도 당연한 광경이겠으나, 그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심지어 포권을 취하는 자세마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명문의 제자로 보일 것이다.
아, 아니. 그게 딱히 틀린 건 아니지만.
인사를 받은 이들이 눈에 이채를 띄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나는 팽가의 장로인 팽악(彭岳)이라 하네. 자네가 누군지 물어도 되겠는가?”
“장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화산의 삼대제자인 청명이라 합니다.”
“오? 그럼 자네가 그 화산신룡? 천하제일후기지수라는?”
청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허명일 뿐입니다. 팽가의 장로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 제가 쑥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허허. 듣던 대로 인재로군!”
백천의 주먹에 시퍼런 핏줄이 콱 돋아났다.
“……차라리 깽판을 치지, 저 새끼가…….”
“누, 눈 뜨고 못 봐 주겠습니다, 사숙!”
“저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뭘 어떻게 한 건지 갑자기 완벽한 명문의 자제로 탈바꿈한 청명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지고 느글거리다 못해 불이 날 지경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놈…….’
사고를 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긴 한데 왜 이리 배알이 꼴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조용한 아우성에도 청명은 여전히 그린 듯 유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장문인께서 여러분들의 방문을 학수고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 참 기꺼운 말이로군. 그럼 우리가 장문인을 배알하고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겠는가?”
“영광입니다.”
그는 다시 한번 포권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당당하게 걷는 청명의 등을 보며 객들이 작게 말을 나누었다.
“성격이 무척 괴팍하다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애초에 강호의 소문이란 항상 과장되기 마련 아닙니까?”
“화산이 왜 이름을 날리는 줄 알겠습니다. 헌앙한 기세가 참으로 눈부십니다.”
“꺄……. 꺄르…….”
“응?”
순간 앞쪽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따르던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청명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갔다. 귀와 목덜미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우선은 인사부터 드리세.”
“예.”
팽가를 필두로 화산을 찾은 이들이 산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주위를 살피던 팽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 제자들은 얼굴이 하나같이 왜 저렇지?’
어쩐지 표정들이 참혹하고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팽악은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