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죽으면 얼마든지 쉴 수 있어! (2)
“도, 도착했다!”
“화산이다!”
“어흑! 결국은 도착하는구나!”
수레를 움켜잡은 화산의 제자들은 드높이 솟은 화산을 보며 울먹거리다 끝내 기쁨의 눈물을 줄줄 흘려 대었다.
평소에야 오를 때마다 절로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지금은 구름에 가려진 정상마저도 극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내가 다시는 화산을 떠나나 봐라!’
무한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두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가슴을 어쩌지 못해 흥에 겨워 있었다. 하지만 그 부푼 가슴은 이곳까지 오는 험한 여정에 치여 사정없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여, 여기만 올라가면 쉴 수 있다!”
“으아아아아! 정상까지는 내가 먼저 간다!”
“비켜, 이 새끼야! 나부터다!”
화산의 제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로 나 있는 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
그러자 가장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운검이 그의 표정을 살피더니 물었다. 청명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수레는 놓고 가도 된다고 하려 했는데.”
“…….”
“뭐…… 괜찮겠죠? 자기들이 지고 가겠다는데. 어쩔 수 없네요.”
“…….”
운검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산 위로 맹렬히 돌진하는 화산의 제자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람이 선선하고 산뜻하였다.
물론 화산의 바람이야 언제나 맑다. 워낙 높은 산 위에 자리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바람에 늘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다만 이제 날씨가 많이 따뜻해지며 온기와 함께 바람이 밀려드니 제법 선선하고 기분이 좋았다.
“흐음.”
하나 현종은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선뜻 기뻐하질 못했다.
“제자들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운각의 말에 현종이 낮게 헛기침했다. 그리고 대답 대신 슬쩍 웃었다.
“허허.”
“뭐가 그리 걱정되십니까. 이미 제자들이 무당을 상대로 승리하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으셨잖습니까. 설마 그 녀석들이 돌아오는 길에 엎어져 코가 깨지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현종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조용히 말했다.
“평생 도가에 몸을 담았으니 부모의 심정을 느껴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요즘 들어서는 장성한 자식이 집을 떠났을 때 부모들이 느끼는 심정이 어떤지 알 것만 같구나. 걱정을 이리도 사서 하게끔 되는 걸 보니 말이다. 품 안에 들어와야 안심이 될 것만 같은 게지.”
“장문인께서 아이들을 너무 아끼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현종은 조용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아이들이 없으니 산이 너무 조용하지 않으냐?”
“그건 그렇습니다. 좀 쓸쓸한 것도 같고.”
화산의 문도들이 이만큼이나 문파를 비우고 밖으로 나간 것은 현종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전성기에 비해서는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백 명이 넘는 문도들이 북적대다 몇몇만 남은 채 텅 비어 버리니 그 쓸쓸함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꽥꽥대며 수련하는 소리가 이리 그리울 줄은 몰랐구나.”
“장문인……. 제자들은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더냐?”
비어 버린 전각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종이 산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착까지는 아직 멀었겠지.’
무한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감안한다면 아무리 빨리 온다고 해도 앞으로 사흘은 더 걸릴 것이다. 청명이 한시도 쉬지 않고 제자들을 재촉할 것까지 감안하여도 그랬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현종은 산문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서 도통 떠날 줄을 몰랐다. 그나마 산문 밖으로 나가 고개를 쭉 빼고 서성거리지 않는 게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인내였다.
현종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거겠지.’
한때는 외유를 떠난 현종을 화산의 어린 제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현종이 자리를 지키고, 길을 떠난 제자들의 귀환을 기다리게 되었다.
세대가 바뀐다는 것, 나이를 먹어 가고 자신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이뤄지는 것이리라.
조금쯤 아쉬울 수 있는 일이지만, 현종은 한 점 아쉬움도 껄끄러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힘든 여정에 오른 아이들을 더 도울 수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예?”
“아까부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으냐?”
“저는 딱히…….”
운검이 고개를 저었지만 현종의 눈은 조금 가느스름해졌다.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린데…….’
실로 익숙하게 들리는, 한동안 화산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
“혹시…….”
“예.”
“무한에서 출발한 이들이 오늘 도착할 수도 있느냐?”
“에이, 장문인.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사람 등에 날개가 돋아 날아오지 않는 이상 그게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
“예. 사람의 몸으로 그게 가능하려면 잠도 자지 않고 한시도 쉬지 않은 채, 경공을 펼쳐야 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일진대, 그 많은 인원이 그게 되겠습니까? 짐도 있을 텐데.”
“……그렇지?”
“예.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그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예?”
현종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이 정신 나간 녀석들이…….’
현종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운각이 돌연 놀란 얼굴로 고개를 획 돌렸다.
진짜로 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흡사 곡소리처럼 들리는 그 소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서, 설마 벌써……. 아,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그 거리를…….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운각도 들었다면 더는 의심할 것도 없었다. 현종이 소리쳤다.
“남은 이들을 불러 오거라!”
“예, 예! 장문인!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운각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현종은 그 뒤에 대고 황급히 덧붙였다.
“지금 당장 식사도 준비하라고 일러라!”
“예, 장문인!”
현종은 몇 차례 헛기침하며 앞으로 나섰다.
벌써 몇 번이고 겪은 일이건만, 이럴 때마다 괜히 가슴이 벌렁거리고 진정되질 않았다. 게다가 전에는 몇몇 아이들이 화산을 나섰다 돌아오는 것을 맞아 주었던 거지만, 이번엔 화산의 문도들이 대부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보니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현종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산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저 문을 통해서 거사를 치르고 돌아온 용맹한 화산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기특하기도 하지.
아암. 기특도 해!
녹림의 난을 평정하고, 무당과의 비무에서 승리한 제자들.
이제는 어린 제자라는 말조차 무색해진 화산의 검수들이 마침내 화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걱정으로 불안하게 넘실대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빠듯할 만큼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이윽고 문이 부서질 듯 좌우로 격하게 열렸다. 그리고 제자들이 우르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그립던 면면들을 보고 있자니 현종의 눈가가 괜스레 달아올랐다.
물론 이번에도 어쩐지 하나같이 거지꼴이기는 하지만…… 한두 번 본 꼬락서니도 아니라 이제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이 산꼭대기에 대체 왜 수레를 끌고 달려 들어오는 건지도 여전히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현종은 제자들의 기행을 모두 이해하려 드는 걸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내려놓으면 편하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어떤 몰골로 돌아오든, 무얼 들고 오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눈앞의 이들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화산의 제자들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서 돌아오너라!”
“장문이이이이이인!”
현종의 환영에 화산의 제자들은 끌고 온 수레를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수레를 벅벅 끌며 현종을 향해 냉큼 달려들었다.
‘녀석들, 이리도 좋을까.’
이제는 화산이 좁다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커 버린 녀석들이 늙은 장문인을 보고 이리 반갑다고 달려오는 것을 보니 마음이 벅차기 그지없었다.
“장문이이이인! 으아아아!”
“장문인! 장문인!”
곧장 달려오는 제자들을 향해 현종은 인자한 얼굴로 양팔을 벌렸다. 하나같이 어딜 내어 놓아도 자랑스럽…….
“장문이이이이이인! 청명이가! 청명이가!”
“청명이 그놈이 우릴 얼마나 괴롭혔냐면요……!”
“그 새끼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장문인! 어흐흐흐흑!”
“…….”
다들 알아들을 수도 없을 만큼 한꺼번에 청명에 대한 욕을 쏟아냈다. 현종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어디 내어 놓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내가 선조 뵙기가 부끄럽다, 이놈들아! 어!
“크흠.”
헛기침을 크게 한 그는 제자들을 쭉 살펴보았다. 살짝 이채를 머금었던 그의 눈에 금세 부드러운 온기가 들어찼다.
“다들 얼굴이 퍽 좋아졌구나.”
그 말에 화산의 제자들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데.”
“와, 진짜 못생겼다.”
“나보고 말했냐, 이 새끼야?”
“아니겠냐?”
“이게 진짜!”
현종이 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모두 내려놨다고 생각했거늘, 아직 다 내려놓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하늘 어딘가에서 ‘나도 괴롭다.’ 하는 누군가의 대답이 들려온 것만 같았다.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생각하며 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어찌 이리 빨리들 돌아왔느냐. 무한에서 여기까지 오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말씀드려도 됩니까?”
“……아니, 되었다. 안 들어도 알 것 같구나.”
보나마나 마귀 놈이 입에서 불을 뿜었겠지.
이내 현종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고생들이 많았다.”
“아닙니다, 장문인!”
다들 씩씩 숨을 몰아쉬고는 있지만, 표정에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뚜렷하게 보였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라 했던가?
제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종조차도 그 성장에 감탄할 정도로 이전에는 없었던 늠름함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 여정에서 얻은 것이 무척 많았다는 뜻이리라.
“내 너희가 한 일에 대한 소식은 이미 들었다. 다들 정말 잘해 주었다. 정말 잘해 주었어.”
“…….”
화산 제자들이 살짝 울컥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칭찬은 몇 번이고 들었다. 장로나 운자 배들도 그들이 한 일을 두고 훌륭하다 해 주었고, 타 문파나 지나는 이들 역시 흠모 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종에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무게가 달랐다.
힘겨웠던 여정을 이제야 제대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눈가를 훔쳤다.
“아닙니다, 장문인! 화산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 잘하고 돌아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도 느낀 게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더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이 녀석들. 장하구나.”
장문인과 제자들 사이에 훈훈함이 피어올랐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만 없었다면 그렇게 마무리되었을 재회였다.
“허, 문파 꼴 자아아알 돌아간다!”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자들 역시 등 뒤에서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뱀을 본 개구리처럼 황급히 목을 움츠렸다. 얼굴에 어려 있던 뿌듯함도 놀란 달팽이인 양 숨어 버렸다.
‘그간 무슨 일을 겪었기에…….’
어떻게 날이 갈수록 애들이…….
산문을 박차고 들어온 청명이 고함을 쳤다.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한 거지, 마무리가! 어디 대충대충 말로 끝내려고 해! 짐 옆으로 싹 빼놓고 다 똑바로 정렬해! 제대로 보고해야 할 거 아냐!”
“끄으응. 진짜 더럽게 바른말만 하네.”
“그러니까. 미치겠다고!”
저 잔소리에 돌아 버리기 직전이라며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화산의 제자들은 착실히 잽싸게 수레를 구석에 끌고 가 세웠다. 그리고 부리나케 달려 연무장 한가운데에 줄을 맞춰 정렬했다.
뒤이어 올라온 운자 배마저 모두 줄을 맞춰 서자 현상과 현영이 앞으로 나와 장문인을 마주 보고 섰다.
현종은 느슨하게 풀려 있던 자세를 바로잡고 화산의 장문인답게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현상이 입을 열었다.
“화산 장로 현상 휘하 문하들이, 장문인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턱!
현상이 손을 내밀어 깍듯하게 예를 표하자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공수(拱手)하여 예를 표했다.
현종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잠시간 시선을 피했던 그가 고개를 내렸을 때, 입가에는 어느새 멋진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많은 것을 느끼고 왔느냐?”
“예, 장문인!”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걸로 되었다. 다들 고생했구나. 시장할 테니 우선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꾸나.”
“밥이다!”
“으아아! 생각해 보면 사흘 동안 내리 굶었어!”
“달려!”
부리나케 앞다투어 식당으로 달려가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좋구나.’
이리 북적대니 이제야 화산이 화산 같았다.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한 사람을 바라보며 현종이 말했다.
“청명아.”
“네, 장문인.”
“출행에 성과가 있었더냐?”
청명이 씨익 웃었다.
“보면 깜짝 놀라실걸요?”
“허허. 그래. 그렇구나.”
기분 좋은 훈풍이 불어왔다.
조금은 길었던 화산파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