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6)
“거기 짐 다 챙겼어?”
“인원도 다 점검했냐?”
“아니, 짐이 왜 이렇게 불어났어?”
“여기 있던 술 어떤 새끼가 처먹었어? 자수해! 자수하면 반만 때린다!”
화산의 제자들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누비며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현영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아서들 잘 하는군.’
예전에는 짐 한번 싸는 데에도 그가 나서서 이것저것 모두 지시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제자들이 자체적으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
‘자율성이 생긴 셈이니 좋은 일이구나.’
다른 이들은 제자들의 무위가 강해졌다거나 수련에 더 매진할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성과로 삼겠으나, 현영이 보기에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성과는 제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문파는 분명 효율적이다. 하지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자리에 없거나, 무능할 시에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가장 좋은 방향은 모두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장로님! 짐은 다 챙겼습니다!”
“그래.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으냐? 산채에서 가져온 짐은 웬만큼 다 처분하지 않았느냐?”
“그…… 금선상단주께서 선물이라며 또 잔뜩 챙겨 주시는 바람에…….”
현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도 할 짓이 아니야.’
예전에야 워낙 없이 살다 보니 돈 비슷한 게 들어오기라도 하면 일단 버선도 신지 않고 달려 나가 쌍수를 들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꾸만 이렇게 들어오는 뇌물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돈이 없어도 적당히……. 아니, 좀 과하게 먹고살 만한 데다, 받는 게 있으면 내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걸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것들이 다?”
“예……. 다시 내릴까요?”
“그걸 왜 이제 묻는 것이냐? 싣기 전에 묻지 않고?”
“……어쩐지 실으라고 하실 것 같아서.”
“…….”
“내릴까요?”
“……아니다. 가져가자꾸나.”
“예!”
현영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잘 알아서 하네.’
너무. 좀 심각하게.
살짝 붉어진 얼굴을 한차례 슥 문지른 현영이 크게 소리쳤다.
“어서 마무리하거라! 빨리 출발해서 부지런히 가야 한다!”
“예!”
꼴꼴꼴꼴.
술 넘어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크으!”
청명은 나발을 불던 병을 주둥이에서 뽑아내고는 입가를 쓱 훔쳤다.
“해장침은 얼어 죽을! 해장술이 최고지!”
의원이 들으면 입에 게거품 물 만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주절거린 그는 처마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사형제들이 참 기특하게도 짐을 잘 싸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진 됐고…….”
뿌려 둔 것이 꽤 되지만 모두 회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뭐 어차피 모두 악착같이 회수할 마음으로 뿌린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낚시를 해도 떡밥을 많이 뿌려서 월척 하나 낚으면 남는 장사니까.
‘문제는 이제부턴데…….’
청명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화산의 성장세는 그의 기대 이상으로 빨랐고, 화산을 둘러싼 상황은 예상 이상으로 급박하다.
“반쯤은 왔는데…… 그래도 아직은 부족해.”
마교 놈들이 중원을 노릴 것이 확실해진 이상, 쉬어 갈 틈 따윈 없다.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빠르게 다음 목적지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뛰어야 한다.
지금 화산의 목적이야 오직 하나, 제자들의 성장이다.
“그럼 슬슬 때가 됐다는 이야긴데……. 끄응. 골치 아프네.”
청명이 머리를 감싼다.
성장을 위해서는 노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반드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명문이 명문인 이유는 제자들의 노력이 한계에 달했을 즈음 더 강한 무학을 턱턱 내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화산도 명문 중의 명문이라 불렸던 문파. 아무리 화산의 성명절기가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고는 하지만, 화산의 도인들이 평생 동안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슬슬 매화검결과 자하강기를 넘겨줘야 하는데…….”
이번 무당과의 비무에서 제자들도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화산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무당의 태청검법에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태청검법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다.
하나.
‘태극혜검은 아니지.’
기분 나쁘지만 양의심공에 입문하고서야 펼쳐 낼 수 있는 태극혜검은 분명 이십사수매화검법보다 상위의 무학이다.
물론 청명이라면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아니라 칠매검으로도 태극혜검을 상대할 수 있지만, 그건 그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동등한 수준의 실력으로 붙으면 패배가 당연한 상황을 근성으로 이겨 내라고 우기지는 않는다.
“사숙들이나 사형들은 슬슬 자격을 갖췄고.”
제깟 것들이 매화검결의 심오함을 바로 이해하고 활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이제 입문은 가능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전수만 해 주면 그만인데…….
“빌어처먹을,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고 주냐고!”
땅 파서 비급 발견했지, 또 땅 파서 비동 발견했지……. 그 와중에 이번에도 땅을 파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의심하지! 당연히!
아무리 등신이어도 같은 수에 세 번 당할 리가 있겠는가!
“끄으으응. 절벽에 있는 동굴에서 찾았다고 할까?”
그것도 좀 이상하고.
지금이야 청명이 하는 일이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아도 현종이 은근슬쩍 넘어가 주고 있지만, 청명이 또 비급을 발견해 오면 더 이상 묵인해 주기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어휴! 속 터져!”
왜 비급이 있는데 주지를 못하냐고! 비급이 있는데!
“끄응.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같이 줄걸 그랬나?”
하지만 이건 역시 안 될 말이었다.
애초에 무학이란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야 부작용이 없다.
기지도 못하는 놈이 뛰려고 들면 다리가 부러지고, 뛰지도 못하는 놈이 날려 들면 바닥에 처박혀 코가 깨지는 법이다.
심지어 화산은 통제가 엄격히 이뤄지는 문파도 아니다. 화산에 최상승 무학이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데다가, 매화검결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최선을 다해 익혔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니 그때는 안 주는 게 맞았는데.
“끄응…….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넘기기는 해야 할 텐데.”
머리를 벅벅 긁어 대던 청명은 돌연 하늘을 획 올려다보며 삿대질을 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상황을 이리 개판으로 만들어서! 미리미리 비급도 좀 따로 빼놓고 할 것이지!”
- 내가 알았냐!
“에라, 진짜!”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리고!”
한번 터진 불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다른 비급 챙겨 놓는 김에 자하신공도 좀 챙겨 놓을 것이지! 장문인 전용 무학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품에 그렇게 꽁꽁 싸매고 갔어요! 진즉에 전수 좀 해 주지!”
- 익히라는데 네가 시간 없다고 안 익혔잖아, 이놈아!
“아…… 그랬나?”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크흠. 그 전쟁통에 언제 새 무공을 익히고 있어. 바빠 죽겠는데.”
- 내가 승질이 뻗쳐서 이 새끼야! 내가!
“……거 입이 많이 험해지셨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니, 원래 그랬었나?
“끄으응.”
지붕에 털썩 누워 버린 청명은 한쪽 손을 뻗어 햇빛을 가린 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할 게 많네.”
제자들을 위해 무학도 새로 전수해야 하고, 세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자하신공의 흔적도 찾아봐야 한다. 그게 안 된다면 자하신공을 대체할 다른 무학이라도 만들어 봐야 한다.
‘지금으로썬 무리야.’
과거의 것을 되찾는 것만으로는 천마를 상대할 수 없다. 과거의 그보다 더욱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청명이 알고 있는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끄응. 앓느니 죽어야지. 뭘 이렇게 해결해도 끝이 없냐. 끝이…….”
허탈한 얼굴로 푸념하던 청명은 이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비급이고 나발이고 없어도 애들이 참 많이 크긴 했어요. 무당이랑 드잡이질도 하고. 그죠, 사형?”
예전의 청명이었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다들 못 견디게 대견하다.
“청자 배도, 백자 배도……. 그리고 운자 배까지 참…….”
기특하다.
무리한 청명의 요구를 군소리 없이……. 아니 사실 군소리는 죽어라고 했지만, 어쨌건 따라와 주지 않는가?
낯이 간지러워서 대놓고 이런저런 칭찬을 다 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나도 못된 놈이지.”
청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람이 항상 긴장하며 살 수는 없다. 성과를 냈으면 적당히 휴식도 취해야 하고, 보상도 받아야 또 다음 걸음을 옮기기 위한 의욕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명은 저 아이들에게 시간을 더 줄 수가 없었다. 저 마교가 들이닥치기까지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청명도 알 수 없으니까.
“음…….”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청명이 중얼거렸다.
“사형. 내가……. 에이, 아니다.”
다시 벌떡 일어난 청명은 앞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낯간지럽게.”
그리고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려 몸을 숙였다가 다시 뭔가가 걸린 듯 발을 멈추었다.
“끄응.”
그렇게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듯 이리저리 서성이던 그는 잠시 후에야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형.”
단단히 닫혔던 입매가 살짝 열렸다.
“나 잘하고 있는 거 맞죠?”
가벼운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청문의 목소리는 그저 그의 마음이 내는 목소리니까.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일에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청명이 다시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려는 그때였다.
- 잘하고 있다.
놀란 청명이 뒤를 획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
멍한 눈으로 빈 허공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는…….”
“청명아! 청명아! 이놈아! 또 어디에 박혀 있느냐! 당장 나오너라! 이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아래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청명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야, 인마! 당장 안 튀어나와?”
“아! 지금 가요, 지금!”
버럭 고함을 질러 대답한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내 팔자에 이게 무슨 궁상이냐.”
중요한 건 닥친 일을 해 나가는 것.
언젠가 정말 사형들을 만났을 때, 한 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히 소리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갑니다아아아!”
청명이 미련 없이 지붕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이게 또 사숙들 일하는데, 혼자 농땡이를!”
“악! 귀! 귀 아프다고요! 귀!”
“그새 술은 또 언제 챙겼느냐! 요놈! 요놈! 요 고얀 놈!”
“악! 귀! 귀, 귀!”
청명이 누웠던 지붕 위를 따뜻한 훈풍이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고민은 깊어지고, 누군가의 의지는 단단해진다. 누군가는 자신을 돌아보고, 누군가는 미래를 바라본다.
저마다의 생각 속에서 세상은 꾸준하게 흘러가는 법.
내리쬐는 볕이 어느새 제법 따가워졌다.
가득 피어났던 매화가 지고, 푸른 잎과 열매가 맺힐 시기가 훌쩍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