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50화 (648/1,567)

650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5)

“끄으으으으…….”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렸다.

수분 하나 없이 쩍쩍 갈라진 목에서 새어 나오는, 듣기만 해도 절로 닭살이 돋을 만큼 진득한 고통을 머금은 소리.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라면 이 소리를 듣고 외면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정작 바로 앞에서 이 소리를 듣는 이들의 눈에는 서릿발 같은 냉정함만이 어려 있었다.

“으……. 으으…….”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이들 중 하나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눈으로 죽어 가는 이를 보았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힐난을 퍼부었다.

“그냥 좀, 이 새끼야! 주독은 내공으로 날리라고!”

“끄으……. 그, 그건 주도가 아니…….”

“저 미친놈이 예의란 예의는 다 밥 말아 처먹어 놓고 주도를 찾고 있네.”

조걸의 신랄한 말에도 청명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다, 다른 예의가 없으니 이거라도 챙겨야 할 거 아냐…….”

“…….”

거 씨. 듣다 보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흔들렸던 조걸은 얼른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놈이 무당의 장로를 때려잡은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라니.’

중원의 미래가 어둡다 못해 나락에 처박히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니, 청명이야 그렇다 치고.”

우측 침상에 널브러진 청명을 바라보던 조걸의 고개가 좌측으로 획 돌아갔다. 널브러진 시체(?)가 하나 더 있었다.

“……백천 사숙은 또 왜 그러십니까.”

“끄으……. 주, 죽을 것 같…….”

조걸은 결국 한숨을 토하며 얼굴을 감쌌다.

‘화산은 망했어.’

청명이 놈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청명에게 올곧게 주구장창 상식을 요구하던 사람이 청명이 놈보다 더 이상해지는 사태는 정말로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청명이 놈은 그럴 수 있는데, 저 양반은 왜 저러냐고! 대체 왜!

반쯤 죽어 널브러진 백천을 보며 조걸의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그때였다.

벌컥!

방문이 열리고 윤종이 들어섰다.

“사숙. 청명아. 장로님께서 찾으시……. 아니,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윤종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럴 때마다 저 무던함이 미치도록 부러운 조걸이었다.

쓰러져 있던 백천이 꿈틀거렸다.

“아, 아니……. 아니다. 내가 가겠다.”

“……그냥 좀 더 주무시지.”

“끄으, 아니지……. 내가 가야지.”

자리에서 비척이며 일어난 백천이 의관을 정제하기 시작했다. 책임감도 좋지만 이럴 거면 애초에 술을 적게 먹…….

“가자!”

“히익!”

다른 곳을 보며 구시렁거리던 조걸은 백천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쯤 죽어 가던 사람이 어느새 완벽한 평소의 모습으로 멀끔하게 서 있었다.

‘아니, 뭔 사람이…….’

인간미가 있어야지, 인간미가!

“……괜찮으십니까?”

“조걸.”

“예, 사숙.”

“사람이란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

“하지만 모범이 되어야 할 이는 속이야 어떻든 겉모습은 언제나 평소처럼 유지해야 한다. 이제는 너도 많은 사제들이 보고 따를 위치가 되었으니 항상 이 사실을 명심하거라.”

실로 좋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쯤에서 조걸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건요?”

“…….”

백천의 시선이 조걸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전신을 이불로 둘둘 말고 굼벵이처럼 자빠진, 기이한 형체가 놓여 있었다. 백천은 무심하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여하튼 꼭 명심하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느새 반듯하게 정리된 머리와 티 한 점 보이지 않는 백색 무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저렇게는 못 살아.’

백천도 청명만큼 이상하다. 그저 분야가 좀 다를 뿐.

“그럼 다녀올 테니…… 그동안 저걸 어떻게 좀 해 보도록 해라.”

“차라리 무당 장로랑 싸우겠습니다.”

“……다녀오마.”

백천이 나서고, 잠깐 서로 눈치를 보던 조걸과 윤종이 슬금슬금 청명에게로 다가갔다.

“청명아……. 이제 일어나야지.”

“……끄으으.”

“오늘 화산으로 출발하기로 했잖느냐.”

“으어…….”

“좀 일어나라, 이 망할 자식아!”

“아우! 나 좀 냅둬!”

“그렇게 누워만 있다가 콱 등에 종기나 나 버려라! 망할 자식!”

그런데 그때 닫혔던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쾅!

“헐?”

“뭐, 뭐야?”

벌컥 열린 문으로 두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윤종과 조걸은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길을 좌우로 터 주었다.

유이설과 당소소였다.

“소소.”

“예, 사고!”

“깨워.”

“네!”

챙!

소매로 빠르게 들어갔다 나온 당소소의 양손에 커다란 대침이 들렸다. 이를 본 조걸과 윤종은 거의 벽에 달라붙다시피 황급히 물러났다.

이윽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차마 눈 뜨고는 들을 수 없는 청명의 처절한 비명이 전각을 쩌렁쩌렁 울렸다.

“……끄으응.”

“많이 아프냐?”

“대가리에 침이 꽂혔는데 안 아프겠어? 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눈을 부라리는 청명의 시선을 피해 윤종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내가 꽂은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난리야.’

소소한테는 찍소리도 못 하는 게.

투덜거리면서도 윤종은 청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대침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아침부터 사람을 못살게 굴어!”

“왜요? 술이 덜 깼어요?”

그때 어느새 다가온 소소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말씀하세요. 당가 비전 해장침의 효과는 확실하니까요.”

윤종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소소야.”

“네?”

“당가에 정말 그런 침술이 있어?”

“못 믿겠으면 당가에 가서 물어보시든가.”

“…….”

당연하지만, 이곳에서 몇천 리는 떨어진 당가에 가 물어볼 도리는 없다. 당가주의 딸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믿을 수밖에.

“그러게 출발해야 하는 아침에 왜 뭉그적대요!”

“그거 좀 일찍 일어난다고 화산까지 빨리 가냐? 어? 빨리 가?”

“뭐라고? 술이 덜 깼다고?”

당소소의 소매에서 다시 대침이 쑥 뽑혀 나오자 청명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세상에. 저 망둥이를 잠재웠어.’

‘나도 무기를 침으로 바꿀까?’

칼은 안 무서워하는 놈이 침을 무서워하다니, 그것도 참 괴이한 일이었다.

“에이.”

청명은 앞에 놓인 죽사발을 두어 번 휘적이다 의자에 축 늘어져선 투덜거렸다.

“진즉에 출발했으면 벌써 화산에 도착해서 편히 쉬고 있었을 텐데! 뭔 일이 이렇게 많이 벌어져서는…….”

그 대부분의 일을 네가 손수 벌이셨습니다, 이 새끼야!

일을 벌일 때는 신나고, 뒷수습할 때는 귀찮아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래서 오늘 출발한다고?”

“그러기로 했잖아.”

“생각 같아서는 한 일주일은 더 있다 가고 싶은데.”

“왜? 화산에 빨리 돌아가고 싶다며? 방금도 그랬잖아.”

“그렇긴 한데…….”

“응?”

청명이 입꼬리를 싸악 말아 올렸다.

“우리가 여기서 굴러다니면 무당 놈들 위장에 구멍이 두어 개는 더 뚫리지 않겠어?”

악마다. 이 새끼는 악마야.

“그건 안 된다.”

“엥?”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고개를 돌렸다. 장로님과의 대화를 마친 백천이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장로님들은?”

“아침만 먹고 시간 끌 것 없이 출발하자고 하시더구나.”

“뭐가 그렇게 급하시대?”

“……남의 안방에서 망신을 줬으면 자리라도 빨리 떠 주는 게 예의지.”

“예의는 무슨.”

청명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미 난장이란 난장은 다 쳐 놨는데, 빨리 사라져 준다고 상처가 나을 리가 있나. 아마 무당은 이번에 입은 상처 때문에 한동안 개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뭐 자업자득이지.’

물론 적당히 달려들라고 팔 한쪽을 미끼로 내밀어 주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작정하고 달려들 줄은 몰랐다. 덕분에 더 큰 이득을 얻기는 했지만…….

‘허도진인이라.’

확실히 만만한 이는 아니다.

“뭐 어쨌든 이번에는 내가 이겼으니까.”

“응?”

“아무것도 아니야.”

청명은 손을 아무렇게나 휘휘 저었다.

이제 판을 깔아 놨으니 법정 그 땡중도 움직일 테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청명의 얼굴이 돌연 확 일그러졌다.

“아, 생각할수록 열받네, 소림 새끼들.”

청명의 입에서 소림이라는 말이 나오자 식탁 한쪽에서 죽을 떠먹던 혜연이 움찔하더니 그릇에 코라도 쑤셔박을 양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어린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뒤에서 응원이나 하고 있고.”

“…….”

“늙은 놈은 남이 차려 놓은 밥상이나 퍼먹고!”

“……늙은 놈은 누군데?”

“있어. 늙은 너구리 같은 거.”

사실 누구인지는 대충 알 수 있지만, 누구도 감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세상에 수많은 기인들이 있다지만, 소림의 방장을 저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청명 하나뿐일 것이다.

“하여튼 배가 아파 죽겠다니까. 남이 뭘 처먹든 일단 내가 먹는 게 있으면 이득이라는 건 아는데, 내가 고기를 통째로 뜯어도 남이 콩 한쪽 먹는 걸 보면 위장이 뒤틀리는 게 사람이잖아?”

“……청명아.”

“응?”

“보통은 안 그렇다.”

“어? 진짜? 사람은 다 그런 거 아니었어?”

“…….”

정적이 흘렀다.

원시천존이시여.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두가 절망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천하의 청명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농담이지, 농담!”

‘진심이다.’

‘이 새끼 진짜 온 마음을 다해 진심이었어.’

‘어떻게 날이 갈수록 새롭냐.’

사람이라는 건 보면 볼수록 익숙해져야 정상인데, 청명에게는 그런 당연한 진리가 통하질 않았다.

“크흠. 아무튼!”

청명이 식탁에 모여 앉은 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너무 자만하면 안 돼.”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에 화산의 제자들의 낯빛도 금세 싹 바뀌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무당은 이번에 우리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렀어.”

“음…….”

백천은 침음성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명이 놈이 어련히 알아서 신경을 썼으리란 건 알지만, 어쨌든 이 말을 운자 배가 들을까 봐 노파심이 들어서였다.

“평범한 이들이야 우리가 이겼다는 사실에 주목하겠지만, 생각이 있는 놈들은 무당이 생각한 화산의 약점을 이해했을 거야.”

“그렇겠지.”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당의 생각이 틀린 건 아냐. 화산은 중진이 너무 부족해.”

“맞는 말이다.”

백천 역시 무거운 얼굴로 말을 거들었다.

“우리가 비무에서는 형식적인 승리를 가져왔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화산의 힘으로는 거기에 있던 일대제자들도 감당하기 어렵다. 일대일 비무였으니 어울릴 수 있었던 거지. 일대제자 전체와 싸워야 했다면 승산은 희박했을 거다.”

그 말에 오검이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무당에 있는 장로들까지 생각한다면, 아직 무당과의 거리는 아득하다.”

“정확해.”

청명이 계속해 보라는 듯 백천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많은 것을 얻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명확하게 알았다는 것이다.”

“호오?”

“중진이 부족하다면 우리가 메우면 그만이야.”

백천의 눈빛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더없이 확고한 목소리가 힘 있게 울렸다.

“우리가 여기서 더 강해지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중진이 되고, 우리가 화산의 주 전력이 된다. 화산의 중진이 부족하다는 말을 누구도 감히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다들 알겠느냐?”

“예, 사형!”

“당연합니다. 사숙!”

새로이 각오를 다진 듯한 눈빛의 오검 사이에서, 누군가가 굉장히 기분 나쁜 얼굴로 히죽히죽 웃었다.

백천이 한숨을 쉬며 눈을 흘겼다.

“……뭐, 인마.”

“헤헤. 우리 동룡이 이제 알아서 잘도 하네.”

“…….”

짝!

청명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뭐 얻은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앞으로 해야 할 것도 많지만.”

“…….”

“그런 건 다 집어치우고!”

“엥?”

어리둥절한 모두를 보며 그는 씨익 웃었다.

“어쨌건 즐길 때는 즐겨야지! 금의환향이다! 화산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긴 여정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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