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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49화 (647/1,567)

649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4)

커다란 황금 불상을 마주한 노승이 눈을 감은 채 불경을 암송한다.

불가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 노승이 수행하는 모습을 본 이라면 절대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모습은 특별할 게 없음에도 특별했다. 본디 특별함이란 평범함 속에서 나올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불경을 외며 노승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히 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토록 깊은 그의 수양은 생각지도 못하게 깨지고 말았다.

“바, 방장!”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노승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불법을 수양하는 것은 불가에 적을 둔 이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 그러니 어지간한 일로는 수행자의 수양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 저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이 이러한 이치를 모를 리는 없을 터. 이는 지금 수양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들어오너라.”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소림의 황포를 입은 승려, 법계가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크, 큰일이 났습니다! 방장!”

“우선 진정하거라.”

침착하고 차분한 노승의 말에 법계는 심호흡하고는 그 자리에 좌정했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전해야 한다 생각되어.”

“이제 말해 보거라. 무슨 일이냐?”

“방장! 무, 무당이 꺾였습니다!”

소림의 방장, 법정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법계를 바라보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예! 무한에서 무당과 화산이 비무를 펼친 모양입니다.”

“비무라…….”

되뇌던 법정이 나직하게 탄식했다.

“화산의 일대제자들이 비무에 나섰을 리는 없고, 무당에서 이대제자들이 나선 것이냐?”

“그, 그렇지 않습니다. 화산은 이대제자들이 나선 것 같으나, 무당에서는 이대제자가 아니라 일대제자들이 나섰다고 합니다.”

법정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표정으로 드러내는 일이 잘 없는 법정이건만, 이 상황은 그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인 모양이다.

“빠짐없이 이야기해 보거라.”

“예. 그것이…….”

말을 끊는 일 없이 이어지는 보고를 모조리 들은 법정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무당 장문께서 악수를 두셨구나.”

“……아, 악수라고는 하지만, 누가 이런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당의 일대제자라고 하면 강호의 어디에서도 절대고수로 인정받는 이들입니다. 아무리 형식상의 패배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화산의 어린 제자들이 무당의 일대제자들에게 몇 번이고 승리를 거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

“소림의 이대제자 중에서도 무당의 일대제자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명성 있는 이들이 상대라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한데 그 어려운 일을 다른 곳도 아닌 화산이 해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화산이 말이다.

“……괜찮겠습니까, 방장?”

법계가 마른침을 삼키며 살짝 긴장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단순히 무당의 패배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무당은 본사와 더불어 중원 무학의 상징입니다. 더불어 구파일방의 상징과도 같은 이들이 아닙니까?”

법정은 그 말에 틀린 것이 없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화산에 패했다는 것은 중원 무림이 화산에 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인들의 입에 구파일방이 화산에 패했다는 말이 오르내리지 않겠습니까.”

“음.”

법정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했다.

“화산 역시 중원 무림의 한 문파일 뿐이다. 너는 어찌하여 그들을 외인처럼 말하느냐.”

“방장…….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

“천우맹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화산의 약진을 축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놓고 우리와 다른 길을 가겠다 선언한 이들을 어찌 좋은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보지 못할 것은 또 무어더냐.”

“어찌 그리 속이 편하십니까!”

갑갑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법계를 보던 법정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토록 말을 했음에도 들어 먹지 않는다면 손해는 알아서 감수를 하셔야지. 이번에는 장문께서 마음이 급하셨구나.”

“제발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무당이 저지른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 소림이 아닙니까.”

“어차피 고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사다. 산더미처럼 이고 진 짐 위에 작은 짐 하나 더 올려간다고 무어가 크게 달라지더냐.”

결국 법계는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법정의 불법이야 그가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 그러니 그 고견을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고아한 말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방장……. 정녕 화산을 이대로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법계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법정을 보았다.

“저는 방장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방장께서는 화산에만 그리 온화하십니까.”

“…….”

“굳이 화산에게 일을 맡기신 것도, 화산이 천우맹을 만드는 걸 용인하시는 것도, 소림의 미래나 다름없는 혜연을 화산에 계속 그리 두시는 것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어디 내가 한 일이던가. 일이 그리 흐른 것이지.”

“방장께는 그 흐름을 바꿀 힘이 있으시잖습니까.”

“법계.”

법정의 나직한 호통에 법계가 움찔하여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승이 잠시…….”

“괜찮다.”

법정이 낮게 불호를 외고는 법계를 응시했다.

“왜 화산을 그대로 두느냐 물었느냐?”

“예.”

“연못에 물고기가 산다고 치자.”

“……예?”

“그 물속에 딱히 물고기를 잡아먹을 다른 천적이 없다면 어찌 되는 줄 아느냐?”

뜻 모를 질문에 법계는 잠시간 고민하다 답했다.

“그야…… 잘 살아가겠지요. 잡아먹힐 일이 없으니.”

“틀렸다.”

하지만 법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연못은 결국 썩게 된다. 잡아먹힐 일이 없는 물고기들은 끝없이 불어날 것이고 결국에는 수초의 뿌리까지 뜯어먹게 되겠지. 그러다 나중에는 수초조차 남지 않은 물속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다가 떼죽음을 당할 것이다.”

“…….”

“하나 천적이 있는 곳에서는 그리되지 않는다.”

이는 화산이 구파일방의 천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화산이라는 문파가 타성에 젖은 구파를 각성시킬 촉매는 된다는 의미였다.

“하나 방장…….”

법계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구파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

“물고기는 천적이 나타나면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만, 구파는 언젠가 자신들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문파를 그냥 내버려 두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당이 큰 코를 다쳤다고 그대로 몸을 물릴 이들이 아니잖습니까.”

“……그렇겠지.”

“저들이 이 일을 교훈으로 삼고 은인자중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은 어떻게든 화산을 짓밟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

“심지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미 종남이 봉문에 들었고, 무당이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구파가 화산을 배려해 주는 싸움을 했지만,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화산의 후기지수들은 이제 더 이상 후기지수가 아니다. 후기지수라는 말은 밝은 미래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화산의 후기지수들은 이미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 실질적인 위협의 영역에 다다랐다.

이대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의 모든 문파가 화산의 발아래 놓이게 될 것이었다. 이번 무당과의 비무는 그 사실을 세상에 선포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법계.”

“예, 방장.”

“화산이라 해서 그 사실을 모르겠느냐?”

“…….”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뱃속에 구렁이를 수십 마리는 키우고 있는 아이다. 아니, 구렁이도 아니고 이무기를 수십 마리는 품고 있는 아이지. 나조차도 때때로 그 아이가 무엇을 그리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화산신룡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리 현명한 이라면 자신들에게 쏟아질 경계의 눈총을 피할 줄도 알아야지요.”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리했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이 충분할 때는 약을 써서 종기를 다스릴 수 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면 단숨에 칼을 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

법계가 의혹 어린 눈으로 의문을 표했지만, 법정은 그 이상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이건 법계가 이해할 수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법정이 바라보는 세상의 이치와 법계가 바라보는 세상의 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화산을 경계하고 위협하려 든다고?’

그건 결국 구파일방의 입장에서는 공공의 적이 생긴다는 의미다.

밖에 적이 생길 때 내부가 정리된다.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동안 중원을 두고 아웅다웅하던 구파일방의 결속력이 강해질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화산이 천우맹의 맹주가 되어 명성을 높여 간다면 이 흐름 또한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서로 맞붙어 피를 흘리게 된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거기까지만 가지만 않는다면 천우맹의 존재는 구파를 좀 더 발돋움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무당은 이번 일로 인해 구파일방 내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반면 무당이 나서다 크게 한 방 얻어맞은 덕에 소림이 비무대회에서 한 실책은 묻힐 수 있게 되었다.

구파일방이 좀 더 뭉치게 되고, 그 안에서 소림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은 소림의 입장에서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선물이 부족하겠군.”

“……예?”

법정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화산이 딱히 소림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아는 청명은 일시적인 감정 따위로 대계를 그르칠 이는 아니었다.

적대적 공생.

화산과 무당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이다.

법정의 귓가에 짜증 섞인 청명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밥상 차려 놨으면 숟가락 들고 떠먹을 능력 정도는 있겠죠? 그것도 못 할 거면 목탁도 내려놔야지!

“허허.”

작게 미소 지은 법정이 입을 열었다.

“침입하지 않는 외적은 강할수록 좋은 법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장?”

“천우맹의 발족식이 언제라고 했느냐?”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화산이 복귀하는 대로 바로 시작될 것입니다. 당가주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 직접 가 볼 수는 없으니 적당한 이를 보내야겠군. 기왕 이리된 거 네가 직접 참석하여 축하해 주고 오너라.”

“바, 방장?”

“그리고.”

“……예?”

법정의 눈이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만들어 준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지. 각 구파에 연통을 넣어라. 천우맹에 대해 논의할 일이 있으니 내가 보자 한다 전하면 될 것이다.”

법계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구나.’

법정이 무엇을 그리는지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회합이 성사된다면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을 거란 예상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중원으로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밀려오고 있음을 실감하며 법계는 사뭇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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