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3)
아래에 있을 때는 부담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더 떨어질 곳도 없고, 지켜야 할 것도 없으니까.
부담은 달성해야 할 것이 있을 때가 아니라, 잃을 게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어깨를 짓눌러 온다.
“사숙. 저는…….”
곽회가 입을 떼자 백상이 살짝 손을 들어 올려 말허리를 끊었다.
“아. 잠깐, 잠깐.”
“예?”
그 뜬금없는 행동에 곽회의 눈엔 의문이 어렸다.
“미리 말하는데, 내가 네 질문에 뭔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거라거나, 나랑 대화를 한다고 네 고민이 시원하게 풀릴 거라는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마라.”
“…….”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돼. 나는 내 일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진짜 의지가 안 되네요.”
“원래 인생 혼자 사는 거야.”
백상의 말에 곽회는 결국 작게 웃어 버렸다. 백상이 물었다.
“그러니까 따라가는 게 버겁다는 거지?”
“그게 좀 미묘하게 다른데…….”
“달라 봐야 그게 그 말이지.”
백상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그런 고민은 모두가 다 하고 있어. 너만 유별난 게 아니라는 거지.”
“…….”
“생각해 봐라. 사형이라는 양반이 앞에서 미친 듯이 사람을 끌고 달리는데, 거기다 대고 좀 적당히 쉬엄쉬엄하란 말은 또 못 하겠고, 나보다 짐을 열댓 배는 더 지고 있는 사람한테 좀 천천히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그렇죠.”
백상은 말하다 보니 화난다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나마 너는 따라가야 할 사람이 윤종이나 조걸 같은 반편이 놈들이지.”
“바, 반편이요?”
사형들이?
곽회에게 윤종과 조걸은 너무 대단해 보여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백상의 다음 말에 그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따라가야 할 사람이 백천 사형이란 말이다, 빌어먹을.”
“아…….”
그 순간 곽회는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백상을 동정했다.
‘내가 낫지.’
비교 대상이 백천인 것에 비하면 조걸이나 윤종은 그나마 인간미가 있다. 물론 청명을 끌고 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만, 어차피 그놈은 애초에 누구에게도 비교 대상이 될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어디 사형만 문제냐? 사매는 칼 귀신이지, 이제는 사질 놈들까지 짐승처럼 칼을 휘둘러 대지…….”
“……힘드시겠네요.”
“말이라고 하냐?”
백상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아서 진즉에 재경각으로 도망쳤는데……. 빌어먹을, 도망치면 뭐 하냐? 나는 재경각에 가면 수련을 안 해도 될 줄 알았지. 이건 뭐, 수련은 수련대로 해야 하고, 재경각 일은 일대로 해야 하고…….”
“…….”
물론 재경각으로 도망쳤다는 말이야 농담이겠지만, 백상이 수련과 재경각의 일을 병행하느라 적잖이 고생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사형은 대제자로서 해야 할 일은 다 내팽개치고 수련하느라 바쁘지. 뭔 일 있으면 사형한테 가야 할 놈들이 사형 수련 중이시라며 나한테 와서 불만을 늘어놓지.”
“……잘못했습니다.”
그놈들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곽회는 어쩐지 심각하게 죄송스러워졌다.
“쯧.”
언짢은 듯 혀를 찬 백상이 술을 꼴깍꼴깍 들이켜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말이다.”
“예.”
“그렇다고 내가 제일 힘든 건 또 아니라는 거지.”
“…….”
그의 시선이 슬쩍 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기서 술을 마셔 대고 있는 놈들이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쾌활한 건 아냐. 다들 나름의 부담은 분명 느끼고 있을 거다.”
곽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강해지고 있지. 나도 때때로는 너처럼 덜컥 겁이 난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모두가 나를 지나쳐 가고, 나만 여기 덩그러니 남아 버릴까 봐. 사문이 나에게 거는 최소한의 기대도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예, 사숙.”
곽회가 느꼈던 불안감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사문이 커지고, 강해진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 말인즉 개개인이 짊어져야 할 짐과 부담도 더 늘어 간다는 의미였다.
“아마 네가 느끼는 부담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거다. 아니, 어쩌면 더 커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더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백상은 오래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던 것처럼 담담했다.
“예전의 화산은 그저 눈앞에 있는 이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지. 위에 종남이 있고, 무당이 있었으니까 져도 잃을 게 없었어.”
“…….”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잃을 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다른 문파들도 점점 우리를 견제하고 노리기 시작할 거다.”
잠깐 말을 멈춘 백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몰랐지.’
화려하게 검을 휘두르는 명문의 검수. 그 빛나는 모습만을 목표로 삼고 바라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화려함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눈부실 정도로 명성을 쌓아 나가고 있는 오검이라 해도 마냥 기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도 말이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는 부담은 백상이나 곽회가 느끼는 부담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응?”
“이 부담을 떨치려면…….”
“뭐 들었냐.”
백상은 곽회를 타박하며 환히 웃었다.
“나한테 기대하지 말라니까? 나는 그런 데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
곽회의 얼굴이 삽시간에 뚱해졌다. 저런 말을 하면서 왜 해맑게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답이 있을 리가 있나.”
백상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꾹 참고 버티는 거지.”
“……그게 뭡니까.”
“뭐 다른 답이 있어?”
그래도 마음 한편에 자그마하게 가지고 있던 백상에 대한 존경심이 불어오는 바람에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사라져 갔다.
‘원래 이렇게 대책 없는 분이었나?’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화산의 청명화가 너무 과하게 진행된 느낌이었다.
“눈이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눈빛이 영 건방진데?”
“…….”
곽회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그때, 백상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애초에 나는.”
“예?”
“부담감이 없는 놈이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
곽회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백상의 저 말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어서였다.
“부담이 없다는 건 고민이 없다는 거고, 고민이 없다는 건 치열하지 않다는 거야. 딱히 걱정도 고민도 없이 느긋하게 검을 익혀 댄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오늘 똑똑히 봤을 거 아니냐.”
“……맞습니다.”
물론 무당은 그리 평가 절하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치열하게 고민해 온 화산과, 모든 배경이 보장된 채 검을 익혀 온 무당과의 차이는 오늘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연했다.
“항상 버겁지. 위쪽은 미친 듯이 끌고 가고, 뒤에서는 미친 듯이 따라오고.”
“…….”
“하지만 그 사이에 껴서 아등바등한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잖아.”
“……그렇죠.”
“그러니 더 고민해 봐.”
술로 목을 축인 백상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민하는 건 그 자체로도 가치 있으니까.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담을 느끼고 고민하는 건 잘못된 게 아냐.”
“…….”
“간다. 쯧. 남 술 잘 먹는데 괜히 찾아와서는.”
“가, 가십니까.”
“자러 갈 거다. 맞은 데가 쑤셔서 죽겠다.”
휙 돌아선 백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어 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곽회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사, 사숙!”
“왜!”
백상이 신경질적으로 획 돌아보았다. 곽회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얼어 죽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백상은 미련 없이 지붕 아래로 뛰어내려 터덜터덜 멀어졌다.
전각들 사이로 걸어간 그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곽회는 그 자리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잘못되지 않았다…….”
딱히 시원한 답을 찾은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어 보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쯤 편해지는 것 같았다.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다들 같구나.”
모두가 제 나름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에이.”
슬쩍 고개를 돌려 처마 위쪽을 바라본 백상이 가볍게 혀를 찼다.
‘좋은 일이지.’
그동안은 그저 시키는 걸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화산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오검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 나서야 할 일이 많아질수록, 이런 고민들은 더더욱 늘어나고 깊어져 갈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 고민들을 통해 더 단단해질 것이다.
“쯧. 내가 뭐라고 주절주절…….”
“아니. 썩 나쁘지 않았다.”
움찔.
귓가를 파고든 익숙한 목소리에 백상의 몸이 흠칫 굳었다. 한참을 말없이 그대로 서 있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셨습니까?”
“응.”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의 고개가 옆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백천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니. 왜 감시를 하고 그러십니까.”
“사랑스런 사질 녀석이 영 찝찝한 얼굴로 빠져나가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따라 나왔지.”
“사랑스런 사제 놈이 나갈 때는 신경도 안 쓰시다가?”
“우리 사제야 알아서 이렇게 잘하는데 내가 굳이?”
“…….”
백상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거 기척 좀 내시지, 진짜!”
“하하.”
백천이 대답 없이 웃기만 하자 괜히 멋쩍어진 백상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획 돌렸다.
“에이!”
괜히 속마음을 다 들킨 것 같아서 낯 뜨거웠다. 귀 언저리며 목덜미까지 홧홧했다.
“어디 가냐.”
“방에 갈 겁니다!”
“벌써?”
“사형이야 얻어맞지도 않고 쉽게 이겼지만, 저는 두들겨 맞았다고요! 쉴 겁니다.”
“그래도 한 잔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백상이 돌아보자 백천은 한 손에 든 술병을 보란 듯이 흔들고 있었다.
“둘이 한잔한 지도 좀 됐지. 간만에 어떠냐?”
“…….”
머리를 벅벅 긁은 백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신 아까 전에 했던 말은 언급하기 없깁니다.”
“술이 들어가면 또 모르지.”
백천이 나직이 웃으며 백상에게 다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가 청명의 뒤를 받쳐 주기 위해 필사적이듯이, 다른 화산의 제자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고 있다.
이를 새삼 다시 깨닫고 나니 고마움이 마음 안에 가득 고였다.
“가자.”
“부상자한테 이게 뭔…….”
“네가 좋아하는 화주도 따로 챙겼다.”
“……오늘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시네요.”
결국 웃어 버리고 마는 백상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려 준 백천은 천천히 앞서 걸었다. 백상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 갈 테냐?”
“……갑니다.”
백상은 소리 없이 웃으며 백천을 향해 달렸다.
‘달라졌지.’
그래,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 불과 몇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심지어 앞으로도 화산은 빠르게 변해 갈 것이다.
어쩌면 백상이 알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화산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도 분명히 있다.
‘그래. 그래도 화산은 화산이지.’
“자, 가자!”
“아, 당기지 마십시오!”
툭툭 장난을 치다 결국 엎치락뒤치락 뒤뚱뒤뚱 걷는 두 사람의 뒤를 밝은 달이 조용히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이 유난히도 밝아 세상 모든 것이 환한 듯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