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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47화 (645/1,567)

647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2)

본디 술이란 사람의 긴장을 풀어 준다.

다들 태연한 척했지만, 무당과의 비무가 부담이 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송태악이 큰 연회를 준비한 건 나름 선견지명이라 불릴 만했다.

처음에는 다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조그마한 잔만 쥔 채 홀짝였지만 술이 한 순배 두 순배 돌기 시작하자 슬슬 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래서 내가 거기서 검을 딱! 어? 따아아악!”

“……사형, 진정 좀 하십시오.”

“진정이라니! 우리가 무당을 상대로 이겼는데!”

“사형은 졌잖습니까?”

“어허! 사숙의 말씀을 못 들었느냐? 세상에는 때로 패배보다 값진 승리도 있는 법이다!”

“승리보다 값진 패뱁니다. 그리고 그 값진 패배에 사형이 처발린 건 안 들어가니까 그냥 입 닫고 술이나 드십시오.”

“나와, 이 새끼야!”

……이곳저곳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술! 여기 술이 부족합니다!”

“여기도요!”

“아니, 술 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송태악은 파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차라리 소를 먹이지.’

애초에 비싼 술로 시작을 연 게 잘못이었다. 일전에 화산파를 대접할 때, 이놈들이 하나같이 말술이라는 것을 인지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 그래도 그때는 사람처럼 먹었지.’

지금은 거의 짐승처럼 먹고 마시고 있다.

화식(火食)을 최대한 피하고, 과식을 경계하며, 주독(酒毒)에 빠지는 것을 금기시하는 도가?

여기에 그런 건 없다.

검은 도포를 입은 도사 놈들이……. 아니, 정확히는 그 검은 도포를 반쯤 벗어젖힌 도사 놈들이 한눈에 봐도 무시무시한 근육질의 몸을 뽐내며 술병과 고기를 쥐고 난장을 피우는 광경만 있을 뿐.

술이 들어간 얼굴들이 하나같이 다 불콰했다.

“……빨리 술을 더 가져다드려라.”

“예, 상단주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술과 음식을 나르는 이들이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물론 처음부터 화산파는 귀한 손님이긴 했다. 산적을 토벌하고 온 영웅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화산파와는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들은 그 무당을 상대해서 승리를 거둔 명문거파다.

일반적인 양민들에게는 전자가 더 귀할지 모르나, 상인들에게 있어서는 후자가 당연히 더 귀한 손님이지 않겠는가.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들이 무당까지 때려잡은 화산이라니. 거참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좋게 말하면 소탈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너무 격이 없다. 같은 도가 문파인 무당을 꾸준히 봐 온 송태악으로서는 도인들이 이렇게 웃통을 까고 술을 퍼마셔 대는 광경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게 화산이 이름을 떨치는 원동력일지도 모르지.’

그런 송태악의 눈에 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오오! 청명이 어서 오고!”

“자, 내 술 한 잔 받아라!”

“마셔! 마셔! 너는 마실 자격이 있지!”

“으헤헷! 뭐 그리 대단한 사람 왔다고.”

청명. 그가 자리를 옮기니 그 주변의 모두가 모여들어 열광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엄청 대단한 사람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당의 장로를 말 그대로 때려잡았는데!”

“하여튼 이 괴물 같은 놈 진짜!”

“화산제일검이지! 화산제일검!”

술기운으로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청명이 입가를 점점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나름 태연한 척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워낙 칭찬에 약한 인간이다 보니 쏟아지는 칭찬에 버티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뭐…… 이정도야…….”

부들거리며 짐짓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지만, 쏟아지는 칭찬을 끝을 몰랐다.

“이 정도라니! 장로인데! 그것도 무당의 장로인데!”

“내가 살다 살다 삼대제자가 명문의 장로를 이겼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이건 만담꾼도 함부로 이야기 못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술병으로 대가리부터 처맞을걸?”

“크으! 우리 청명이한테서 빛이 난다, 빛이나!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네!”

“그럼그럼! 그저 빛이지! 우리들의 빛!”

폭우처럼 쏟아지는 칭찬에, 마침내 청명의 얼굴이 슬금슬금 무너져 내렸다.

“꺄…… 꺄륵…….”

“옳지! 옳지! 잘 웃는다! 어이구, 웃기도 잘 웃네, 우리 청명이!”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청명이 신이 나 술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웃어젖히기 시작하자 사형제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오늘은 다들 마시고 죽는 거야!”

“죽어도 돼! 이제 죽어도 돼!”

“아니, 죽으면 안 되지, 이 새끼들아!”

이미 저세상에라도 온 듯 노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송태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모를 문파다.’

이곳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라는 것만이 확실했다. 이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응?’

그때 송태악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야말로 뜨겁게 달아오른 연회장의 구석에서 조용히 일어나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연회 자리라면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소피라도 보러 가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강호인들이 먹고 마시는 자리에선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웬만한 생리현상은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다른 일이라도 있겠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에 송태악은 금세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탁.

문을 조심스레 닫고 나온 곽회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어 다행히 그가 빠져나온 것을 알아챈 이는 딱히 없는 모양이었다. 혹여 알아챘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저 분위기를 깨고 싶진 않았다.

‘다들 즐거운 모양이네.’

그럴 만도 했다.

곽회 역시 몇 잔 연거푸 술을 마시니 몸 안에서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닌 척했지만, 저 무당을 상대로 승부를 겨뤄야 한단 사실 자체가 모두에게 말도 못 하게 부담스럽고 압박이 심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 기쁨이 넘쳐흐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곽회는 제 손에 들린 술병을 슬쩍 보고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훌쩍 몸을 날려 앞쪽 전각의 지붕 위로 올랐다.

“읏차!”

기와 위에 내려선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앉아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밝네.”

마침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이 주변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유난히도 밝은 달을 보고 있자니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했던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뭘?”

“으아아아아아앗!”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대답에, 곽회는 너무 놀라 휘청이다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간신히 처마 끝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끙끙대며 다시 위로 올랐다.

“노, 놀랐잖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

“오셨으면 기척이라도 좀 하실 것이지!”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온 게 아니라 네 녀석이 내가 쉬고 있던 곳에 들이닥친 거다. 내가 먼저 왔다 이 말씀이야.”

“…….”

곽회는 떨떠름한 얼굴로 백상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해도 사숙은 사숙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청자 배들에게 백자 배들은 아직 조금쯤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상은 그중에서도 청자 배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사숙 중 하나였다.

백자 배들 중에서 배분으로는 백천 다음인 데다가, 성격도 의뭉스러워 딱히 좋다고 하긴 힘들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화산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재경각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이가 아닌가.

화산을 대표하게 된 화산오검을 제외한다면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회를 피해 도망 나온 자리에서 백상을 독대하게 되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물었잖아. 뭘?”

“아, 그게…….”

곽회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백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예 곽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끄응. 허리야.”

“……괜찮으십니까?”

“별것 아냐. 그냥 얻어맞은 데가 아파서.”

비무를 치르며 다친 상처가 반나절 만에 다 나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백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술 가져왔냐?”

“예.”

“그럼 한잔하자.”

백상이 술병을 슬쩍 내밀자 곽회도 어쩔 수 없이 한 손에 든 술병을 백상의 병에 살짝 가져다 댔다.

챙.

병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흡사 검이 맞닿는 소리처럼 들렸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술을 쭉 들이켰다.

“크!”

“흐음.”

입가를 훔친 곽회가 술병을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호강하네요. 이런 비싼 술을 이렇게 병째 먹어 보고.”

“비싼 술이라.”

그 말에 백상은 술병을 물끄러미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비싸다는 건 좋은 거지.”

“예?”

“하지만 나는 이런 술보다 화산에서 먹던 싸구려 화주가 더 입맛에 맞는다.”

“…….”

말없이 빤히 바라봐 오는 곽회의 시선에 백상은 조용히 웃었다.

“이상하냐?”

“아니요.”

곽회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도 그렇거든요.”

“하핫.”

백상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달을 올려다보는 눈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너 같은 놈이 있지.”

“…….”

“남들은 다 내려놓고 쉴 때, 혼자 다 내려놓지 못하는 놈 말이야.”

정곡이 찔린 곽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가 문제냐?”

태연한 질문에 곽회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백상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선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빛이 살짝 가라앉아 있어서, 곽회는 어쩐지 그 앞에서 말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좀…….”

“좀?”

“좀 겁이 나서요.”

“…….”

백상은 재촉하지 않고 곽회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곽회는 잠시 후에야 다시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좋기만 했습니다. 실력이 는다는 게 느껴졌고, 예전에는 감히 꿈도 못 꾸었을 것을 바랄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랬겠지.”

“시키는 대로 최선만 다하면 저도…… 예, 저도 뭔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지금은 아니고?”

“……아니라기보다는…….”

곽회는 생각을 더듬는 듯 잠깐 뜸을 들였다.

“말씀드린 대로 조금 겁이 나서요.”

“왜?”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했겠으나 백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가장 무섭지.”

“……예.”

곽회는 조걸이나 윤종처럼 되고 싶었다.

청명이나 백천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 정진하면 언젠가는 그들처럼 강해질 수 있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영영 따라잡지 못할까 봐 겁이 나는 거냐?”

“아니요……. 그건 괜찮습니다. 다만…….”

곽회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점점 멀어지는 게 무섭습니다.”

“…….”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사형들은 더 멀어져만 갑니다. 무당의 일대제자들과 검을 맞대 보니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과 싸워 이긴 사형들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이 나더라고요.”

곽회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불빛이 흐르는 연회장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 말은…….”

“괜찮아.”

백상은 작게 웃으며 곽회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어.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하니까.”

“저는…….”

그리고 곽회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연회장 쪽을 향해 턱짓했다.

“봐.”

“예?”

“저기에서 웃고 떠드는 놈들이 정말 아무런 부담이 없어서 저렇게 놀고 있는 것 같으냐?”

“…….”

그 말에 곽회는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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