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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46화 (644/1,567)

646화. 이길수록 적은 늘어나는 법이지. (1)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사람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허산자는 누군가를 상대할 때마다 될 수 있으면 그의 눈을 바라보는 편이었다.

하나, 지금은 차마 제 앞에 앉은 이의 눈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톡.

상대의 손가락이 가볍게 다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

일정하게 울려 퍼지던 소리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산자의 심장 소리도 덩달아 빨라졌다.

“그래.”

“…….”

“졌다는 거로군.”

마침내 들려온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카롭게 허산자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정말 칼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숨을 삼켰다. 냉랭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허산.”

“예……. 장문인.”

짧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든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다시 숨을 멈추었다.

허도진인.

무당의 장문인이자 그의 사형인 허도진인의 얼굴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무당에 입문하여 그와 함께 지내 온 지가 어언 수십 년이건만, 허산자는 단 한 번도 허도진인의 얼굴에 저리 차가운 표정이 떠오른 것을 목도한 기억이 없었다.

얼굴에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한 낯으로 허도진인은 천천히 다시 말했다.

“졌단 말이지.”

“…….”

날카로운 눈빛이 허산자를 꿰뚫었다. 이에 허산자는 다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제가 미욱하여…….”

“이건 사죄하고 말 일이 아니다, 허산.”

“…….”

차디찬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퍼져 나갔다.

“말해 보아라.”

“…….”

“왜 졌느냐?”

허산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잖아도 돌아오는 내내 장문인에게 이 사태를 어찌 보고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화산이…….”

차마 입으로 내고 싶지 않은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은 후에야 간신히 뱉을 수 있었다.

“……화산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습니다.”

허도진인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대답은 충분하지 않다는 듯 가만히 허산자를 보기만 했다.

“오검이라 불리는 화산의 후기지수들의 실력은 이미 평범한 본파의 일대제자들을 뛰어넘었습니다. 다른 이대제자나 삼대제자들은 그에 못 미치기는 하나…… 같은 이대제자끼리의 승부라면 본파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화산신룡의 실력은…… 그 오검조차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허공이 실력으로 패했단 말이더냐?”

“예.”

허산자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다시 승부를 겨룬다 해도 허공이 이길 확률은 높지 않을 것입니다. 승부가 끝났을 무렵에도 청명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

허도진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허산자는 그런 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애를 썼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상념에 빠져 있던 허도진인이 다시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눈빛에 보이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묵직한 무언가가 자리한 게 느껴졌다.

“그저 그들이 더 강했다?”

“……그렇습니다.”

허산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

이유만 따지자면 열 가지도 더 댈 수 있다. 변명거리도 만들어 내자면 열 개는 더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이유도, 변명도 될 수 없다는 걸 그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실책이라 털어놓으며 자책한다면 조금 더 책임감은 있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무당의 입장을 더 궁지로 몰아넣게 될 대답인 데다, 허도진인이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솔직히 말할 수밖에.

“허산.”

“예, 장문인.”

“생각해 보지.”

허도진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의 준비가 부족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장문인.”

따지자면 준비는 오히려 과했다.

그들이 상대해야 했던 이들은 화산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 거기에 무당의 일대제자와 장로 하나를 데려갔으니 준비가 철저하다 못해 과한 수준이었다.

체면마저 내려놓았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면, 시기가 안 좋았던가?”

“그 역시 아닙니다.”

“그럼 준비와 시기에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로군. 그럼 남은 것은 운뿐인데…….”

허도진인의 시선이 허산자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화산에 천운이 닿아 있었던가?”

“……그 역시 아닙니다.”

허도진인은 말없이 허산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압박에 이기지 못한 허산자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

“같은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열 번 싸워 다섯 번은 패할 것입니다. 승리라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승리’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도진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틀린 것은 나로군.”

“……장문인.”

“전장에 장수를 내보내면서 이길 수 없는 군대를 쥐여 보냈으니 패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는 말이로군.”

허도진인의 자조적인 웃음을 보며 이번엔 허산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준비도, 시기도, 운마저도 틀림이 없다면 결과는 하나뿐이다.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과소평가한 것.

그래. 그것뿐이다.

하나…….

“허산.”

“……예.”

허도진인은 허허로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허산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이 질문에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네 말대로라면 화산은 그 짧은 시간 만에 자신들의 이대제자를 우리의 일대제자에 필적하도록 키워 냈다는 말이로군.”

“……장문인.”

“무당의 어떤 선인도 하지 못했던 일이고, 심지어 화산의 어떤 선인도 하지 못했던 일을, 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문파가 해내고 있다는 뜻이지.”

허도진인의 목소리가 점점 낮게 내리깔렸다.

“상식적이지 않아.”

톡. 톡. 톡.

그의 손가락이 다시 다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어쩐지 불안정한 소리였다. 이젠 그 소리로도 허도진인의 내심을 짐작할 수 있게 된 허산자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화산……. 화산.”

아주 희미하게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도 다탁을 두드리는 소리는 줄어들지 않으니, 이는 마치 괴악한 음공처럼 허산자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절로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댔다.

콰드드득!

이윽고 내내 까딱이던 손가락이 다탁을 파고들었다. 두꺼운 원목이 단숨에 꿰뚫리며 다탁이 반으로 갈라졌고 이내 형편없이 쓰러졌다.

“자, 장문인.”

다탁 위에 있던 찻주전자가 바닥을 구르며 찻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그러나 이 상황에 치우자고 나서기도 어려우니 허산자는 그저 그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허도진인의 얼굴에 감정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숨도 쉬지 못할 압박감에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치욕적이구나.”

하지만 그에 비해 흘러나온 허도진인의 목소리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일대제자만 간 것도 아니고 장로까지 데려갔는데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를 감당하지 못했지. 심지어 장로라는 놈은 삼대제자에게 패했다. 강호의 호사가들이 얼마나 즐겁게 입방아를 찧을지 안 봐도 훤하지.”

허산자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잘못이 아님에도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일로 무당의 명예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화산이 무당을 제치고 천하제일도문, 천하제일검문으로 불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온 천지에 퍼지겠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장문인.”

“내가 정말 고통스러운 이유가 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허도진인은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그런 광경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게 어쩌면 말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 장문인.”

“이건 상식을 넘었다.”

감정의 파도는 온데간데없고 허도진인의 얼굴은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만일 이게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허산자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허도와 허산은 무당을 위한 최선의 대처를 했다. 그럼에도 화산이 이를 가볍게 짓밟은 것이다.

“주위에서 모두 과하다 할 때도 나는 화산을 늘 견제해 왔다. 천하에 나만큼 화산을 경계하는 이도 많지 않았겠지.”

“…….”

“하나 그런 나조차도 화산을 제대로 알지 못했구나.”

“장문인……. 이건 장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담담한 목소리.

“적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지. 화산의 잠재력은 내 예측도, 상식도 모두 뛰어넘었다. 그들이 겨눈 비수가 아직 저 멀리 있는 줄 알았건만, 이미 목이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구나.”

허산자는 그 나직한 말을 들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뒷목을 잡아채는 것 같았다.

“내가 화산을 너무 쉽게 본 게지.”

잠시간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린 허도진인은 천천히 입을 연다.

“제자들이 받은 충격이 작지 않을 터이니, 우선은 단속에 힘을 쏟거라.”

“예.”

허도진인은 ‘때로 패배가 좋은 약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위안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도 컸다.

“……허공은.”

“예?”

“허공은 의식을 되찾았느냐?”

“……예. 도착 직전에…….”

“뭐라 하더냐?”

허산자는 이를 한번 꽉 물었다가 답했다.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알 수 없는 말만 하고는 처소에 틀어박혔습니다.”

“…….”

허도진인은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마음을 정리한 듯 조금 더 담담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도 가서 쉬거라.”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장문인.”

“네게?”

허도진인은 빙그레 웃었다.

“허산.”

“예, 장문인.”

“네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얼마나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더냐?”

“…….”

“그만 나가 보거라.”

“……예.”

“이 일을 어찌 수습할지는 내 곧 따로 언질을 주마. 상처 입은 제자들이 무탈하게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신경을 기울이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허산자가 조심스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남은 허도진인은 쏟아진 차며 부서진 다탁으로 엉망이 된 방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처참한 꼴이 그의 마음속 같고, 지금 무당이 처한 처지 같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어젖혔다.

“허…….”

평화롭고 고풍스러운 정경이 평소처럼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허도진인은 알고 있다. 이 정경에는 선대들의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하제일도문이라는 허황된 위상을 얻기 위해서 무당이 얼마나 노력해 왔던가.

하나 지금 그의 대에 이르러 그 위상이 뒤흔들리려 하고 있다.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무엇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던가?

“화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허도진인의 얼굴에 짙은 고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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