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화.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5)
“뭐?!”
눈이 화등잔만 해진 송태악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겼다고?”
“예!”
“누가 누구를?”
“화산이 무당을요!”
“……뭐라고?”
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연거푸 잘못 들을 리도 없다.
하지만 너무 상상도 못 한 결과라 재차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화산이 무당을 이겼다고?”
“그렇습니다!”
“조,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송태악의 재촉에 총관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에 든 전서를 내밀었다. 재빨리 낚아채어 읽는 동안 송태악의 입은 충격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자, 자, 장로…… 무당의 장로를 이겼다고? 그…… 그 화산신룡이?”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새로 읽어 보아도 전서의 내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이 내용에 틀림이 없겠지?”
“금첩에 어디 틀린 내용이 담기는 걸 보셨습니까?”
“그렇지. 그, 그렇겠지.”
상인에게 정보는 생명이다. 게다가 이 짧은 거리에서 날아온 금첩이라면 내용이 바뀌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적었을 테니 말이다.
“아니…… 살다 보면 늑대가 범을 쫓아내는 일도 벌어지기야 한다지만…….”
화산이 무당을 이기는 건 늑대가 범을 이기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이건 아예 토끼가 범의 턱주가리를 후려갈기고 앞발로 이빨을 뽑아 버리는 격이지 않은가.
“세상에……”
이토록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 원인이야 빤하다. 범이 범이 아니었거나, 토끼가 토끼가 아니었던 것. 저 무당이 범이 아닐 리는 없으니 화산이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한 문파였다는 의미다.
“아, 아이고!”
송태악은 기겁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은 것이다. 화산이 이렇게 무당을 이길 줄 알았더라면, 상단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비무가 치러지는 곳으로 가 꽃이라도 쥐고 흔들었겠지.
“비, 빌어먹을, 내가 이런 실수를……!”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를 쾅쾅 두들긴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수하를 획 돌아보았다.
“그, 그럼 화산 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마 지금쯤이면 상단으로 돌아오고 계실 겁니다. 승부가 나자마자 소식을 전해 온 것이라…….”
“뭐? 지금 돌아오신다고?”
“예. 그, 그렇습니다!”
“버, 벌써?”
당황하긴 했지만 이는 찰나였다. 송태악은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는 상인.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를 만큼 멍청했다면 그 많은 돈을 굴려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뭣들 하느냐! 당장 승전 연회를 준비해라! 술! 술과 요리를 넘쳐나도록 준비하란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화려하게! 동원할 수 있는 건 뭐든 동원해서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해라! 이 송태악이와 금선상단이 화산의 승리에 더없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예!”
부리나케 이리저리 뛰어가는 수하들을 보며 송태악은 깊게 심호흡했다.
‘그럼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무당을 버리고 화산에 줄을 대려 했던 것은 지금 당장 화산이 무당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본디 투자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하는 것.
지금부터 화산이 커 나갈 속도가 저 무당보다 더 빠를 것이라는 계산하에 시행했던 일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건 정말 대성공이다!’
화산의 실력과 기세가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라면 투자한 돈을 몇 배로 회수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쩐지 꿈자리가 좋더라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아랫놈들에게 맡긴 채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그가 직접 나서서 연회를 준비해야 한다. 이제 화산은 무한에서 할 일을 모두 끝냈으니 곧 섬서로 떠날 터. 그 전에 송태악이란 이름 석 자와 금선상단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둬야 했다.
“뭐, 뭣부터 해야 하지? 일단…….”
바로 그때였다.
“상단주님!”
“뭐냐? 무슨 일이냐?”
“화, 화산파 분들이 돌아오십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송태악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가 이리 빠르단 말이냐! 아직 준비도 못 했는데! 이, 이런!”
송태악은 일단 부리나케 정문을 향해 달렸다.
“문을 열어라!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오신 영웅들을 환영해야 한다! 당장 문을 활짝 열어라!”
“예!”
이 일의 중요성을 이해했는지, 상단원들 역시 잽싸게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단숨에 대문 밖까지 뛰어나간 송태악은 거친 숨을 고르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저, 저쪽에서 오시는 게냐?”
“아마 그럴 것입니다.”
“후욱! 후욱!”
“일단 진정 좀 하시고…….”
“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되겠느냐!”
송태악이 짜증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도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건가?’
다른 곳도 아닌 이 무한에서 화산이 무당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이건 정말 말 그대로 강호의 판세를 바꿀 만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찌 긴장하지 않겠는가?
“상단주님!”
“안다니까!”
“그게 아니라! 저기, 저깁니다! 화산 분들이 오십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송태악의 고개가 획 그쪽으로 꺾였다.
과연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인파가 보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화산파의 문하들이 맞았다.
하지만…….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분명 그가 아는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오늘 아침 저들이 비무대로 떠나는 모습도 똑똑히 보았으니 착각할 리는 없다.
하지만 지금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화산파의 문하들에게서는 아침에 보았던 것과 다른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까?
분명 겉은 같은 사람인데 이전에는 없던 존재감과 기세가 생겨난 듯했다.
‘무당을 이기고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건 아니었다.
무릇 상인이란 돈의 흐름을 봐야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상대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이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기세가 달라졌다.’
따지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무인은 수련으로 성장하기도 하지만 이룬 것을 바탕으로도 성장하곤 하니까.
무당과의 비무에서 이겼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충분히 실력을 갖춘 이들이 자신감마저 손에 넣었다면 하루아침에 그 기세가 달라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심지어 열을 맞춰 걸어오는 화산의 제자들에게선 이전까지 없었던 격이 느껴졌다.
송태악의 등골에 소름이 내달렸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무인은 아니지만, 평생 한길을 걸어온 이들이 성장하며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생각하니 짜릿했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몸이 절로 들썩이는 것을 애써 누른 그는 화산의 문하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커다랗게 외쳤다.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화산의 영웅 분들!”
그러자 선두에 선 현상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왔다.
“상단주께서 이리 몸소 맞아 주시니 기쁨이 두 배가 되는 듯합니다.”
“당연히 제가 직접 나와 축하를 드려야지요! 이런 경사로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저 무당에게 승리를 거두시다니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 마음이 다 뜨겁습니다. 정말 감축드립니다!”
현상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태악은 정말로 마음 깊이 무당이 아닌 화산을 택하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익숙하게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거 내내 간 보시던 분치고는 축하가 과하신 것 같은데.”
“…….”
옆을 슬쩍 보니 청명이 짝 다리를 짚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있었다. 눈빛이 뚱하기 짝이 없었다.
“간이라니요……. 제가 언제…….”
“당장 화산에 입문이라도 하실 것 같던 분이, 무당 놈들 나타나자마자 엉덩이를 뒤로 쭉 빼 버리는 걸 다들 봤는데 이제 와서, 네? 축하요?”
“하……. 하하하…….”
송태악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겁을 좀 먹었던 건 사실이다. 체면 때문에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화산을 내버려 둘 줄 았았던 무당이 그렇게 빨리 본격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으니까.
“왜요? 우리가 이기고 오니까 마음이 좀 바뀌신 모양이네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도장! 제 마음은 처음부터 오로지 화산에만 가 있었습니다.”
“입에 침은 바르셨나 모르겠네.”
“…….”
청명은 영 불만이 가시지 않은 눈치로 흘겨보았다. 송태악은 말 그대로 죽을 맛이었다.
“그…… 도장. 그…….”
그런 송태악을 구해 준 것은 현영이었다.
“청명아. 너무 몰아붙이지 말거라. 상단주께서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시지 않느냐?”
“쳇.”
청명은 투덜거리며 입을 삐쭉거렸지만 그래도 현영의 말은 듣겠다는 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현영이 빙그레 웃으며 송태악을 바라보았다.
“너무 괘념치 마시지요, 상단주. 다 이해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장로님.”
“다만…….”
“……예?”
현영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온화한 미소를 내걸었다.
“거래란 원래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신뢰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금선상단과 화산이 거래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서로 실수가 있을 법도 하지요. 서로 더 노력하여 앞으로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송태악은 빠르게 대답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청명의 노기는 직접적이었지만, 현영은 좋은 말 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이건 앞으로도 애매한 태도를 취할 시에는 결코 가만있지 않겠다는 경고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송태악도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승전에는 그에 걸맞은 연회가 필요한 법이지요. 축하의 의미로 제가 제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하하. 그러실 것까지는…….”
“무슨 서운한 말씀이십니까! 금선상단과 화산이 남이 아닌데 당연히 제가 축하를 드려야지요. 자,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송태악이 호들갑을 떨어 대자 현영은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화산의 다른 문하들도 그를 따라 금선상단 안으로 들어섰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들어가자 남은 송태악은 이마를 훔치며 참았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했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혹여 무당의 기세에 눌려 화산과의 계약을 파기하기라도 했다면, 금선상단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몰렸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아 낸 그의 뚝심이 결국 그를 구한 것이다.
하나.
“쯧.”
“…….”
“쯔으으읏.”
“…….”
세상엔 은혜는 쉽게 잊고 원한은 결코 잊지 않는 놈도 하나 있었다. 남들은 진즉에 안으로 들어갔건만, 딱 마귀 한 놈만 입구에 남아 송태악을 꼬나보았다. 송태악은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소도장. 그…… 제가…….”
“내가.”
“……예.”
청명이 입을 열자 송태악의 양손이 다소곳하게 앞으로 모였다.
무당의 장로까지 때려잡은 놈 앞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은 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장로님이 저리 말씀하시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는데.”
“……예.”
“전쟁이 나면 사이에서 줄 타던 놈이 제일 먼저 서리 맞는 법이에요. 아시겠어요?”
“알죠. 알다마다요.”
“쯧.”
청명이 혀를 찼다.
“어디 얼마나 잘 대접해 주는지 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대로…….”
“어디.”
“…….”
“얼마나, 잘.”
“…….”
“알아들으셨을 거라 믿어요.”
마지막까지 송태악을 한차례 노려본 청명은 휘적휘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총관이 슬그머니 송태악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할까요?”
송태악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비장한 손길로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총관에게 내밀었다.
“금고 열어.”
“그걸…… 전부요?”
“……일단 연회에 쓰고.”
“예.”
“남은 돈은 저 마구니 놈 방에 가져다놔라.”
“…….”
마지막 남은 쌈짓돈까지 모조리 털린 그의 눈가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