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42화 (640/1,567)

642화.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2)

파아아아앗!

검과 검이 맞닿는 힘을 이용해 뒤로 몸을 띄워 낸 청명이 바닥에 내려섰다.

가볍게 자세를 낮췄던 그는 허리를 쭉 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검 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허공이 매화검기를 전신으로 받아 내며 치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전신이 크고 작은 상처로 완전히 뒤덮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끄으…….”

한차례 크게 휘청거린 그는 간신히 발로 바닥을 디디며 몸을 지탱했다.

“그래, 그래야지.”

청명이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장로?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가 다시 태어난 게 벌써 몇 해던가? 그가 이 세상에서 겪은 일이 얼마나 많던가?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더 이상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따라잡아야 할 것은 이제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천마.’

그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조차 가볍게 뛰어넘어야 한다.

그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무리하고 불합리한 수련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불합리한 일을 강요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육체와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수련이 끝없이 반복된다. 천마의 존재를 인식하고부터는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가혹한 수련을 소화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

그리하여 결국엔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세상에서 유일하게 천마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청명이니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다시 한번 마수를 뻗쳐 올 천마를 상대할 이가 자신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공포를 이들이 터럭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이해는 바라지 않는다.

그건 온전히 청명에게 주어진 짐이니까.

이들에게 그것까지 바랄 만큼 청명은 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온실에서 기어 나와라.”

“…….”

“그러지 못한다면 네가 마주해야 할 현실은 이것보다 배는 끔찍할 테니까.”

허공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저놈이 왜 자꾸 이해하지 못할 말을 늘어놓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지금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강하다.’

허공의 검은 청명에게 닿지 않는다.

너무 명백하여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절망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패한다고?’

무당의 장로가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그럴 리가 없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더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돌보고 지혈할 생각 따윈 하지도 않고 청명을 향해 다시 한 발짝을 내디뎠다.

“나는…… 나는 무당의 허공이다!”

“알고 있으니 다시 지껄일 것 없어.”

“지지 않는다!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콰아아아아!

허공의 검이 커다란 원을 그려 냈다.

청명은 저 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혜검!’

무당 최고의 검학.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담는다는 무적의 검기. 무당이 천하에 자랑하는 무학이기도 했다.

같은 검법이라 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진다.

조금 전 무각이 펼쳤던 태극혜검과 허공이 그려 내는 태극혜검은 동일한 검법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그 격이 달랐다. 가벼운 원을 그려 내는 것만으로 비무대 위의 공기가 바뀌고 어마어마한 압력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부서진 바닥의 돌 파편들이 그 내력과 기운의 요동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연의 이치를 담은 검이 만들어 내는 광경이 자연의 섭리를 거부한다. 실로 역설적인 광경이었다.

그건 순리(順理)이자 동시에 역리(逆理). 음과 양을 동시에 담아 낸 태극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검은 검기와 물처럼 흐르는 백색의 검기가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한 검 안에 두 가지 성질을 담아 낸다.

양의(兩意)에 이르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무당 최고의 검이자 천하제일검법의 자리를 다투는 강호 최상의 검학인 것이다.

검고 흰 검기가 서로 얽혀 들며 회전했다. 마치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했다. 휘도는 검기는 자연히 태극의 형상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그로 인해 발생한 압력이 주변의 기운들을 모조리 빨아들였고, 또 동시에 방출해 낸다.

“무, 물러서라!”

“뒤로 물러나! 어서!”

백천이 기겁하며 고함쳤다. 이 전투에서 한시도 눈을 떼기를 원치 않던 그조차도 경고를 하고 몸을 물려야 할 만큼 이 검기는 위험했다.

검을 뽑은 그는 기운을 전개해 밀려오는 압력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명문의 저력이란 말은 이제 듣기만 해도 위가 뒤틀릴 정도였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음이 있고, 넘어섰다 생각하면 다시 시작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만한 저력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백천은 알고 있다. 진정으로 경이로운 것은 끝에 와서 다시금 힘을 뽑아내는 허공이 아니라, 무당의 장로인 허공이 그 바닥까지 드러내게끔 만든 청명이라는 사실을.

청명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그의 주변도 세상이 뒤집힌 듯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선 청명만은 마치 바위라도 된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그를 압박해 오는 검기를 응시할 뿐.

검을 움켜잡은 백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기서도 이만한 압력이 느껴지는데, 바로 정면에 선 청명이 얼마나 큰 압력을 느끼고 있을지는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나.

‘질 리가 없지!’

저 괴물 같은 놈은 겨우 이 정도로 지지 않는다.

그런 백천의 기대에 호응하듯, 청명이 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흑과 백이 뒤섞여 용솟음하고, 그 안에 실린 가공할 위력이 청명을 찢어발길 듯 압박했다. 청명은 슬쩍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멍청한 놈이…….’

이건 혜검이 아니다.

분노로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펼쳐 내는 검 따위는 아무리 강한 기운을 품고 있어도, 제대로 펼쳐 낸 삼재검법만 못하다.

검수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냉철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승리란 요원해진다.

청명의 검이 단호한 의지를 품고 움직였다. 날카롭고 붉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검과 그리 다를 것도 없다. 혜검까지 펼친 허공의 의지에 비해, 하던 행동을 반복하는 청명의 모습은 되레 안일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청명은 이걸로 충분했다.

‘산을 넘으면 더 큰 산이 있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정말 상대를 막아 내고 싶다면 성벽 뒤에 또 다른 성벽을 지을 게 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는 성벽을 쌓아 올려야 한다.

이 검은 꽃이자 산이며, 숲이자 성벽.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영조하(梅影造河).

수백, 수천 송이의 매화가 강을 이루었다.

마치 절벽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가 점점이 떨어져 강 위를 가득 메운 것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 꽃은 이내 그리 빠르지 않게 흐르기 시작했다.

조급하고 과격하게 움직이다 마침내는 그 도도함마저 잃어버린 허공의 검과는 달랐다. 청명의 검은 오히려 무당의 제자들이 처음 보여 주었던 도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앙!

흑과 백의 두 용이 꽃잎으로 가득 찬 강에서 미쳐 날뛰었다. 꽃의 강을 터트려 버릴 듯 격렬한 기의 폭풍이었다.

하나.

아무리 강한 힘도 밀려오는 강을 밀어 낼 수는 없다. 밀쳐 내고 후려쳐도 물은 다시 흘러 결국엔 빈곳을 다시 채운다.

콰아아아아아아!

세차게 날뛰는 기운 아래로 매화잎들이 스며들었다. 한없이 부드럽게, 밀어 내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그저 돌아 흘렀다.

‘이, 이건…….’

허공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흐르는 강을 타고 도는 꽃잎들이 날뛰는 두 용을 가볍게 스치며 그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허공의 뇌리에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네가 무엇을 보려 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의지가 담기지 않은 강함만을 추구하다가는 언젠가 스스로의 검조차 잃고 말 것이다.

‘사, 사부…….’

허도진인이 아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의 스승이 남겼던 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말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른단 말인가.

막대한 내력이 실린 그의 검기가 매화가 이끄는 길을 따라 흘러 들어갔다.

‘사부……. 저는…….’

그리고, 허공의 검기를 스치고 밀려온 매화의 강은 마침내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회이이이이익!

시작은 강이나 그 끝은 바람이리라.

그의 몸을 타고 한 바퀴 부드러이 회전한 꽃잎은 하늘로, 또 하늘로 떠올랐다.

허공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솟구친 매화 잎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이내 점점이 흐려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허공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이미 모든 것이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그가 만들어 낸 태극의 검기도, 청명이 뿜었던 붉은 매화검기도 없다.

보이는 것은 그저 검을 늘어뜨린 채 이쪽을 응시하는 청명의 모습뿐이었다.

“…….”

허공은 입을 꾹 다문 채 청명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청명을 보던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가 왜 진 거요?”

청명이 가만히 그를 마주 보다 답했다.

“잊었기 때문이지.”

“…….”

“검이든 사람이든…….”

잠깐 뜸을 들이던 청명은 천천히 다시 말을 이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지. 처음 검을 잡던 마음을 잊은 순간 넌 이미 졌던 거야.”

“…….”

그의 시선이 화산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운검에게로.

“당신의 검은 자파의 제자들에게조차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지. 하지만 내 스승의 검은 문파를 뛰어넘어 저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

“이긴 건 내가 아니야.”

청명은 짧게 선언했다.

“저 검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너는, 검수로서는 이미 죽어 있었던 거야.”

허공의 시선이 운검에게로 향했다.

“검의…… 날카로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로군.”

“잘 알아듣네.”

허공이 이해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그러더니 검집에 검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중앙으로 맞잡고 앞으로 내민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잘…… 배웠습니다.”

탁!

마찬가지로 암향매화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청명이 가볍게 그 포권을 받았다.

“잘 배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포권 한 채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청명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허공의 몸은 썩은 고목처럼 고꾸라졌다.

털썩.

완전히 탈력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세상이 고요함으로 물들었다.

화산의 삼대제자가 무당의 장로를 꺾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결과 앞에, 무당과 관객은 물론이고, 심지어 화산의 제자들마저 말을 잃었다.

그 위화감마저 드는 고요 속에서 청명이 허산자를 향해 말했다.

“이 비무는…….”

“…….”

“화산의 승리예요.”

그리고 희게 웃었다.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꽉 깨물려 있던 허산자의 이가 끝내 부러져 나갔다.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