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덕분에 아주 잘 배웠습니다. (1)
퍼어어어어억!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허공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콰당!
바닥에 처박힌 허공은 일순 멍한 눈으로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하늘의 한쪽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돌연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말이다.
‘내가 쓰러진 건가? 대체 왜?’
잠시 기억이 끊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몸이 허공에 붕 떠있는 듯한 그 기묘한 감각을 없애 준 것은 잠시 후 왼쪽 눈에서 느껴진 끔찍한 통증이었다.
“끅…….”
그제야 청명의 팔꿈치가 눈두덩을 가격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욱신! 욱신!
‘눈이…….’
실핏줄이 모조리 터진 건지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상처를 확인하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눈두덩이 부풀어 올라 눈을 거의 뜰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의 부상이 심하고 고통이 극심하다 해도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심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득.
허공의 손톱이 비무대 바닥을 긁었다.
연골이 모두 닳아 버리기라도 한 듯 덜컥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려하는 육체를 어떻게든 채찍질하여 일으켜 세웠다.
‘처음부터…….’
온몸에 돋아난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검이 갑자기 늘어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검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능한 경우는 단 한 가지.
“……속였구나.”
애초에 숙련된 검수는 전투 중에 상대를 탐색한다. 그러니 그가 생각했던 청명의 공격 범위와 간격은 맞붙는 동안에 자연히 가늠하고 인식한 것이다.
청명이 허공을 속인 원리는 아주 간단한다.
애초에 뻗어 내는 팔을 아주 조금 굽히는 것, 그리고 검기의 간격을 조절하는 것. 그렇게 임의로 만들어 놓은 간격을 허공의 머리에 새겨 넣은 것이다. 허공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청명의 검은 여기까지 뻗어 올 것이라 확신할 만큼.
그리고 일순간 그 간격을 바꾼다. 아주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러니 허공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검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생각하면 단순하고 별것 아닌 일이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일을 목숨을 노리는 진검이 오가는 와중에 허공 정도 되는 검수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시행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가능한 일이라고 치자.
하지만 처음 맞이하는 이를 상대로 뒤에 이어질 공격을 위해 미리 어긋난 간격을 심어 놓는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단 한 치만 어긋나도 살이 찢기고, 뼈가 끊어질 텐데 전투 중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미쳤어…….’
저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광기의 영역이다.
이건 상대의 실력이 뛰어날수록, 상대가 청명의 검을 빨리 파악할수록 효과를 발휘하는 전술이다.
오히려 상대를 믿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전술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쿨럭!”
몸이 들썩였다.
배 속에서부터 구역질이 밀려 나왔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허공의 힘을 부드럽게 받아 흘려 내던 청명의 검이.
그건 무당의 검이 가진 장기였다.
“네놈…….”
검을 움켜잡은 채 몸을 일으키자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청명이 시야에 들어찼다.
무섭도록 냉정한,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눈이다. 입가에 묻은 피가 없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 놓은 거라 착각하고도 남았을 법한 무감한 눈…….
“웃…기지 마라! 애송이 놈!”
으르렁대는 허공의 목소리에 증오와 분노가 넘실거렸다.
“감히…… 무당의 무리로 나를 공격해?”
이건 치욕을 넘어서는 일이다.
권사가 검수에게 주먹으로 얻어맞는 일이나, 평생 창을 써 온 자가 오늘 처음 창을 잡은 이에게 창대로 두들겨 맞는 일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
화산의 검수에게 무당의 무리로 당한다는 건 무당의 검을 배워 온 그로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일부러……!”
한껏 꽉 깨물린 이에 결국 슬쩍 금이 가고 만다.
허공의 눈은 이제 독기를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바라보는 양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청명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저벅.
걸음을 멈춘 청명이 허공을 똑바로 보다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
“내가 네 면상을 후려친 데에 대단한 의미 같은 건 없어.”
“……닥쳐라!”
허공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청명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멍청하긴.”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의 귀를 파고들었다.
“네가 내게 살기를 뿜었을 때부터 이건 비무가 아니게 된 거야. 비무였다면 나도 그냥 적당히 어울려 줬겠지.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말이야.”
“…….”
“하지만 이건 비무가 아니야. 실전이지. 실전에서는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다. 그저 누군가 마지막에 서 있는지만 중요할 뿐이지.”
청명을 바라보는 허공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청명이 나지막이 물었다.
“실전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가?”
“…….”
“잘 들어라, 애송아. 상대를 상하게 하기 위해서, 혹은 죽이기 위해서 칼을 뽑는 순간부터는…… 전쟁이다.”
“…….”
“전쟁에서는 무기 같은 건 상관없어. 상대의 칼을 뺏어 목을 긋고, 시체를 덮고 죽은 척 위장하다가 지나가는 적의 사타구니에 칼을 찔러 넣지.”
청명의 얼굴에 명백한 비웃음이 서렸다.
“전쟁에서 왜 내 검을 뺏어 휘두르느냐고 불만을 토할 셈이냐?”
“…….”
“작작 좀 해라, 이 머저리들아.”
허공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기기 위해서는 뭐든 한다.
허공도 수도 없이 들어 왔던 말이다. 심지어 그는 명문 무당이기 때문에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그 ‘뭐든 한다’가 어떤 의미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검이 오가는 와중에서도 필사적으로 상대를 속이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결국엔 상대의 몸에 칼을 박는다.
그건…… 전쟁이라기보다 차라리 투쟁에 가깝지 않은가?
허공의 검 끝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떨리는 검 끝을 보며 청명의 눈이 가라앉는다.
‘아무리 말해 봐야 말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
경험하지 못한 이에게 경험한 것처럼 굴라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허공도 머리로는 이해할 것이다.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까. 무당 역시 전쟁을 겪은 곳이 아닌가. 명문이라 불리는 무당이 과거 그 끔찍한 전쟁에서 겪은 것들을 후대에 전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이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 이해할 수 없지.’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가 눈을 떴는데 갑자기 전장 한가운데에 던져져 있다고 생각해 보라.
살인이라는 말을 그저 관념으로 이해하던 이가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의 목이 날아가고, 뜨거운 피가 자신의 전신으로 끼얹어지는 난장을 경험했다고 가정해 보라.
과연 그 상황에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을까?
절대 가능할 리 없다.
청명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허공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무당의 장로인 그조차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해해야 할 무인인 그조차도 청명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 허공이 청명을 보는 저 눈은, 과거 마교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화산의 사형제들이 보였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것을 볼 때의 그 공포감을, 청명도 잘 알았다.
‘정말 엿 같지.’
과거 그들이 마교를 바라보던 눈으로 허공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아수라라도 보는 듯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반드시 옳지 않다는 것 정도는 청명도 물론 알고 있다.
굳이 전쟁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필요는 없다. 굳이 청명처럼 짐승처럼 싸우는 법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강하다는 건 선(善)이 아니다.
진정한 강함이란 칼을 휘두르는 법에서 나오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의 청명이라면 저런 허공의 모습을 보고 혀를 찰지언정 잘못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교가 여전히 중원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천마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단 걸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내가 악마처럼 보이는 모양인데.”
“…….”
“진짜 악마는 아직 오지도 않았어.”
“……무슨 의미냐?”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해야 했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허공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러니 행운인 줄 알라고.”
화산 제자들 쪽을 흘끗 본 청명은 이내 허공을 넘어 무당의 제자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청명의 검 끝이 바닥을 긁었다.
가가각!
그 소리가 넋을 잃고 지켜보던 이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알려 줄 사람이 있으니까!”
쿠우웅!
바닥을 박찬 청명이 허공에게로 쇄도했다.
“큭!”
허공이 이를 꽉 깨물었다. 눈앞의 괴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결국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말려들면 필패다.’
이건 난전이 되었고, 서로가 이를 드러내며 살의를 긁어 대는 진흙탕 싸움에선 승산이 없음을 허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놈은 천 번, 만 번의 전투라도 겪어 본 듯 개싸움에 능숙하다.
그 영역에 발을 들인다면 패배는 정해져 있는 것.
승리하고 싶다면 익숙한 영역으로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다.
이미 청명의 나이와 배분 같은 건 그의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생전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불가해한 존재를 맞이한 이상 그도 지금까지와는 달라져야 한다.
쾅!
허공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앞이 아닌 뒤로.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는 것은 그의 인생에 결코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무당 특유의 물 흐르는 듯한 보법이 아닌, 단순히 상대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달아나는 보법을 밟은 것도 거의 처음이다.
지금은 옳고 그름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오로지 상대의 검을 피해 내고, 그의 검을 펼쳐 내는 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검 끝에서 도(道)가 사라진다.
발끝에서 격(格)이 무너진다.
“흐아아아아압!”
뒤로 물러서는 그의 검 끝에서 어마어마한 검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마치 태풍에 미쳐 버린 바다가 격한 파도를 해안가로 밀어 넣고 다시 또 밀어 넣는 것처럼.
콰아아아아아!
동시에 그의 우수가 새하얀 장력을 눈처럼 뿜어내었다. 푸른 검기와 새하얀 장력이 서로 뒤섞여 휘몰아치는 광경은 거대한 해일(海溢)을 연상케 만들 정도로 그 기세가 웅장하고 폭급하였다.
하지만 허공은 보아야 했다.
삼 장도 넘게 치솟아 밀려가는 해일 사이로 드러난 눈부신 검기를.
촤아아아아악!
해일이 반으로 갈리고 세상이 반으로 갈린다. 그 단천(斷天)의 검기에 갈려 버린 공간으로 역수로 검을 잡은 청명이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카아아아아앙!
본능적으로 들어 올린 검이 바로 코앞에서 청명의 검을 막아 냈다.
“흐읍!”
왼손이 청명의 옆구리를 향해 십단금을 날려 댔지만, 청명은 검을 내리누르며 몸을 띄워 올리는 동작으로 가볍게 그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이윽고.
화아아아아아아악!
허공의 머리 위에서 붉은 꽃이 수없이 피어올랐다.
꽃.
하늘을 모두 뒤덮을 기세로 만발하는 꽃들을 보며 허공은 발작처럼 검을 휘둘렀다.
하나.
‘이…….’
하늘로 끝없이 솟구칠 수 있는 물은 없다.
허공조차도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순리(順理)를 따르는 그의 검은 순리를 역행하는 순간 제 위력을 내지 못했다.
‘이, 이게…….’
기세가 죽은 허공의 검기 사이로 붉은 꽃잎들이 요사스레 춤을 췄다.
뛰어넘고, 파고들고, 농락하듯 뒤흔들렸다.
서걱!
어깨가 베이며 피가 쏟아졌다.
서걱! 서걱!
허벅지의 살이 갈라지고 옆구리에 검기가 박혔다.
“으아아아아아아!”
화아아아아아악!
수십, 수백의 꽃잎이 일제히 낙하하며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몸을 무자비하게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