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계속하자고. 이제 시작이니까. (5)
“…….”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백천은 숨을 내쉬는 것도 잊은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게…….’
청명이 올라 있는 곳.
무당의 장로가 보는 경치.
“후우…….”
그제야 들이마셨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청명이 싸우는 건 지겨울 만큼 봤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상대와 진심으로 싸우는 모습을 이렇게 똑똑히 하나하나 곁에서 지켜보는 건 백천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게 진짜 검수.’
막연히 그렸던 낭만 넘치는 겨룸 따윈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살벌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실로 지독한 투쟁이었다.
“사숙…….”
“……그래.”
조걸도 충격을 먹은 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강함?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청명이 강하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여기 어디에 있는가? 그가 무당의 장로와 어우러져 싸우는 걸 이상하게 여길 이는, 적어도 오검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숨도 쉬지 못할 긴장으로 몰아넣은 것은 청명이 보이는 저 과격함이었다.
자신의 강점으로 상대를 공략한다.
무학을 익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알 만한 이 기본 중의 기본을 실전에서 어떻게 쓰면 되는지 백천은 지금 이 순간 똑똑히 목격했다.
작은 실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도박에 가까운 공격을 감행하고, 실낱같은 승기를 잡은 순간 그 승기를 살리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인다.
이는 그가 알고 있는 무학이되 낯설기만 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알고 있는 무학이 아니다.
‘나는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백천은 새삼 깨달았다.
무공의 고하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지금의 백천이 동등한 무위의 청명과 싸운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 이십여 초도 버치지 못하고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처럼 강한 청명이 아니라, 그와 수준을 맞춰 준 청명과 싸운다고 해도 말이다.
검을 버텨 낼 힘이 있어도 저 임기응변과 지독할 정도로 승부를 걸어오는 독기를 버텨 낼 재간이 없으니까. 이쯤 되면 저 독랄한 검을 보여 주는 청명이 아니라, 그걸 상대로 맞서 싸우고 있는 허공이 되레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피가 두 배는 빨리 돌고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청명을 제외한 오검은 모두 혼이 빠진 얼굴로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평소에는 시리도록 무표정을 유지하는 유이설은 얼굴이 충격으로 살짝 풀려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백천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청명의 활약을 질리도록 지켜본 오검의 충격도 이럴진대, 다른 제자들이 받은 충격은 오죽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입도 다물지 못하고 비무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가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옴죽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엔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다시 멍해졌다.
‘그렇겠지.’
물론 저들은 저 비무대 위에서 오가는 무리(武理)의 향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백천조차도 어느 순간엔 언뜻언뜻 느낌만 받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세상에…….”
“청명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백천은 잠깐 고민했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저 일 수, 일 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때로는 자세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게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싶지가 않군.’
조금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저 청명이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화산의 제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려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백천도 백자 배의 대사형이라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보다 사제들을 우선시해야 옳다.
하지만 백천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검을 든 한 사람의 검수로서 이 광경을 놓칠 순 없었다.
‘더 보여 줘라.’
네가 얼마나 높이 있는지.
내가 가야 할 곳이 얼마나 높은지 말이다.
백천은 핏기가 가시고 희게 질릴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무진은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주르륵.
희게 질릴 만큼 꽉 쥐인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살을 찢고 만 것이다. 피가 흐를 정도라면 이미 한참 전에 상처가 났을 텐데,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빤히 제 손을 보던 무진은 고개를 들어 다시 비무대를 응시했다.
‘설욕?’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설욕을 한다고?’
저자에게? 저 청명에게?
‘나는 대체 뭘 보고 있었단 말이냐?’
청명이 더 강해졌을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했다. 그 어린 나이와 빛나는 재능을 감안한다면 전과 비교를 불허할 만큼 강해지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 역시 그 뒤를 쫓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당 무학이 가진 특성과 해 온 노력을 감안한다면 청명을 당장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근접하는 데는 성공했을 거라 여겼다.
하나 눈앞의 비무를 보며, 무진은 자신이 얼마나 헛된 망상에 빠져 있었는지를 강제로 깨달았다.
‘장로님과 대등…….’
아니, 아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대등한 게 아니라 저 청명이 우위를 잡고 있다. 그것도 확연하게. 그가 무당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물론 세상에는 괴물도 나고, 상식을 뛰어넘는 천재도 난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 어린 화산의 제자가 다른 문파도 아닌 무당의 장로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무진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허산자의 표정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표정을 살핀다면 지금 허공이 적당히 청명을 상대해 주고 있는 건지, 정말로 밀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진은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말았다.
“…….”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런 얼굴의 허산자는…….
허산자는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서 당혹이나 짜증을 읽은 것은 수없이 많았고, 때로는 과도한 노기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건…….
‘공포인가?’
하지만 무당의 장로가 비무를 보고 공포를 느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저 청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무당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하지만…… 허산자가 보고 있는 게 지금의 청명이 아니라 먼 훗날의 청명이라면? 그렇다면 정말 공포에 질릴 수도 있지 않을까?
“……허공.”
허산자의 입에서 신음 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와 함께 무진의 시선도 다시금 비무대로 향했다. 무당의 무복을 입고 검을 늘어뜨린 허공을 넘어, 청명에게로.
욱신! 욱신! 욱신!
양발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달군 쇠꼬챙이로 발을 짓쑤셔 대는 듯한 통증에 순간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허공은 제 상처를 확인하고 돌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지금 그의 발을 물어뜯은 짐승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사냥감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걷는 듯,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걸음걸이. 허공은 자신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 내가?’
사냥감이라고?
무당의 장로인 이 허공이?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양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그가 들끓는 분노를 쏟아내지 못하게 강제로 묶어 두었다.
섬뜩하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 길지 않은 공방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공방은 허공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앗아 갔다.
양발의 상처 따위는 별게 아니다. 발이 으스러져도 보법은 밟을 수 있으니까. 충돌하며 뒤틀린 내력도 상관없다. 천하에서 가장 안정적인 내가심법 중 하나인 태극기공(太極氣功)이 지금 그의 내상을 빠르게 치유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떨리는 손끝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진정될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사람과 싸우는 것 같지가 않다.’
맹수가 그의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으려는 걸 어찌어찌 가까스로 막아 낸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닿았다 떨어진 것만 같았다.
까딱했으면 검이라는 이름의 송곳니가 그의 목을 꿰뚫고 경동맥을 찢어 버렸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허공의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주륵 흘러 턱 끝에 맺힐 즈음, 청명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 긴장해서야. 어디 검이라도 제대로 들겠어요?”
“…….”
허공은 대답 대신 입술을 짓씹었다.
서로 공방을 펼쳤다. 하지만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긴장감에 몸이 굳은 허공과 달리, 저 어린놈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이건 어찌 보면 검에서 밀린 것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허공은 평생 최고의 검수를 꿈꾸며 수련해 왔다. 그런데 저 어린 녀석에게 마음가짐에서부터 지고 있지 않은가?
꾸우욱.
허공이 이를 악물고는 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살짝 잡아당겼다. 이내 그의 검이 찌르듯 청명을 겨누었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독기 어린 기세에 청명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지금 허공의 생각쯤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음가짐 같은 걸로 달라질 게 있다면 아무도 고생 같은 건 안 하지.’
허공은 분명히 강하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무당 장로들 중에서 그리 높은 연배는 아닐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그의 재능은 분명 출중하고, 검에 임하는 자세 역시 나쁘지 않다.
물론 과거 무당의 장로들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이 정도면 나름 인정해 줄 만한 강자다.
탄탄한 기본과 웅혼한 내력, 무엇보다 오랜 시간 쉬지 않고 노력해 온 덕에 가지게 된 단단한 검로는 빙궁의 설천상을 가볍게 넘어선다.
하나.
그럼에도 허공은 나약하다.
청명이 이를 드러냈다.
저것은 오로지 홀로 완성한 검이다.
허공은 아마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싸워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비무를 겪고, 수많은 승부에서 승리를 거뒀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목숨을 건 생사결에 임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터.
재능, 노력, 시간. 그 모든 요소를 갖추고도 온실 속에서 검만 휘두른 이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 허공이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신물이 나는군.”
휘릭.
조용히 중얼거린 청명은 가볍게 검을 돌려 역수로 잡으며 자세를 살짝 낮추었다.
이윽고 피에 젖은 그의 이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아무래도 한 수 가르쳐 줘야 하는 건 내 쪽인 모양이네.”
청명의 발이 빠르게 바닥을 박찼다.
콰아아아!
사람의 몸이 바람을 가르며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파공음이 울렸다. 청명의 몸이 섬전처럼 허공을 향해 날았다.
움찔한 허공은 이를 악물었다.
‘침착하게…….’
청명이 악귀처럼 웃어 대며 허공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딱히 다를 것 없는 찌르기였다. 침착함만 유지한다면 막아 내기 어렵지 않은 공격이었다. 허공은 당연하게도 그 찌르기에 대항하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하나 그 순간.
카아아앙!
“끅!”
허공의 검이 원하는 곳에 멈춰 서기도 전에 청명의 검 끝이 허공의 검 날을 찔러 밀쳐 냈다.
허공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일렁였다.
‘이, 이 거리에서?’
아직 검이 닿지 않을 거리였다. 만일 손이 본능적으로 미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분명 목이 꿰뚫려 버렸을 것이다.
검이 갑자기 배로 길어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파아앗! 파아아아앗!
연이은 찌르기가 그의 전신을 노리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앗!”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지른 허공은 청명의 검을 벼락처럼 쳐 냈다.
하나!
채애애애애애앵!
우드드득!
순간적으로 솟아오른 청명이 무게를 있는 대로 실어 허공을 내리친다. 늦지 않게 막아 내기는 했지만, 손목에서 순간적으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을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가가가각!
“그거 알아?”
“…….”
청명의 입이 열리자 허공이 눈을 부릅떴다.
‘말을 할 여유가…….’
“막는다고 끝이 아니다, 애송아.”
그 순간 검을 잡은 청명의 손이 아래로 쑥 내려간다. 자연히 검 끝의 방향이 앞이 아니라 위를 겨누었다.
퉁!
그리고 단번에 허공의 검을 밀어 냈다.
‘엇?’
검을 밀어 올리는 그의 힘을 완벽하게 이용한 일격.
‘이건 무당의…….’
콰드드득!
청명의 팔꿈치가 허공의 안면에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