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36화 (634/1,567)

636화. 계속하자고. 이제 시작이니까. (1)

“화산신룡?”

허공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 녀석이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그놈이로군.’

다시없을 재능을 지닌 녀석이라 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무당의 앞길을 가로막을 이. 그래서 반드시 미리 짓밟아 기를 죽여 둬야 할 이.

하지만…….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겉으로 보이는 기세만 따지자면, 그 옆에 있는 백천이라는 훤칠한 놈이 더 대단해 보였다.

허도진인의 말과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 화산의 후기지수들 중 최고는 분명히 저자일 텐데…….

‘설마 저놈이 내 이목을 흘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겨우 저 나이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무진조차 아직 그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 무진의 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아이가 그보다 배는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왜 장문인께서 나를 여기로 보내셨는지 알겠군.’

저건 이제 잠룡이라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허공의 눈에 순간적으로 스산한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대답은요?”

“……무슨 대답 말인가?”

“무당이 졌다는 거죠?”

“허허허.”

허공이 웃으며 청명의 말을 받았다.

“말하지 않았는가. 그리 생각해도 좋다고.”

“거 어디 수련을 흙탕물에서 하셨나. 미꾸라지처럼 자꾸 쏙쏙 빠져나가시네요.”

“……언사가 좀 과하지 않은가?”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말보다 과하지는 않죠.”

청명은 노골적으로 피식 웃었다.

“패배를 자인할 용기가 없으면 뒤로 물러나셔서 승부가 갈리기를 기다리세요. 처음 정한 원칙을 깬 쪽이 패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이치니까요.”

“…….”

“아니면 설마…….”

말꼬리를 얄밉게 주욱 늘인 청명이 이죽거렸다.

“무당의 장로쯤 되시는 분이 생떼를 쓰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나 같으면 면이 팔려서라도 그렇게는 못 할 텐데? 하긴 뭐, 무당은 나랑 다를 수도 있으니까.”

백천이 눈을 딱 감았다.

‘저 새끼는 진짜다.’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다들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무당 장로를 들이받네.’

‘진짜로 미친놈은 사람을 안 가리는구나.’

‘그래. 그래야 청명이지!’

사람을 가리면서 대가리를 깨면 그건 청명이라고 할 수 없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들이받아야 비로소 그들이 아는 화산광견 청명인 것이다.

평소 같으면 기겁하여 말렸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청명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보통 청명이 입을 열었다 하면 슬금슬금 주변으로 다가가 제압할 준비를 하던 오검마저도 이번엔 청명이 아닌 백천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백천이 말리려 들면 자신들이 막아서겠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백천도 전혀 말릴 생각이 없는 양으로 몸을 뒤로 슬쩍 뺐다.

그만큼이나 화산의 윗대들을 모욕한 허공에 대한 분노가 큰 것이었다.

“…….”

한편 면전에서 모욕을 당한 허공은 뺨을 씰룩대며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떼를 쓴다?”

“네.”

“지금 내가 떼를 쓰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죠.”

“소도장.”

확연히 가라앉은 허공의 목소리가 칼처럼 청명을 찌르고 들어왔다.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오는 법일세. 소도장은 우선 말을 조심하는 법을 배워야겠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뭐라?”

청명이 피식 웃었다.

“거 그렇게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으시면 남의 문파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시고 본인 문파나 어떻게 하시죠. 남의 문파 사람 말하는 것 하나도 신경 쓰시는 분이, 본인 문파 제자들이 아랫배분에 두들겨 맞고 다니는 건 어떻게 참으시나 모르겠네요.”

“…….”

“아, 그런 성향이신가? 제 눈에 들보는 못 보고 남의 흠만 보이는? 하긴 뭐 흔한 일이긴 하죠.”

허공이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꽉 쥐인 그의 주먹은 분명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백천은 통쾌함과 진한 동정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게 왜 말싸움을 걸어서는.’

청명한테 얻어맞은 이들을 모으면 대충 동정호를 한 바퀴 정도 두를 수 있겠지만, 청명한테 말로 처맞은 이들을 모으면 동정호를 아예 메울 수도 있다.

저놈이 펼치는 검의 위력이 칠 성쯤 된다면, 주둥아리 신공은 십이 성을 이룬 지 오래였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 허공의 불행이었다.

허공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아무래도 화산의 제자들은 예의부터 다시 배워야…….”

“그건 그쪽이 신경 쓸 일이 아니고요.”

하지만 청명은 아예 허공의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자꾸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래서 어쩌실 건데요? 패배부터 인정하실 거예요? 아니면 모양 빠지게 자리로 돌아가셔서 승패가 갈릴 때까지 기다리실 거예요?”

“…….”

“아,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하죠.”

청명은 해맑게 박수까지 짝 소리 나게 치고는 씨익 웃었다.

“장로님이 싸우시는 것도 승부로 쳐 드릴게요. 그럼 다 해결되는 거죠.”

결국 허공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지며 일그러졌다.

“……지금 나더러 이대제자와 손을 섞으라는 것인가?”

“그게 뭔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도 있냐고?

그 태연한 반문에 허공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몰라서 묻는 것이더냐?”

“아뇨. 모르는 건 저희가 아니라 무당 쪽이죠.”

“…….”

청명은 히죽 웃으며, 모두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장로가 일대제자와 싸우는 게 이상하다면 이대제자와 일대제자가 싸우는 것도 이상하죠. 그게 문제없다고 한 건 다름 아닌 무당 아니었어요?”

허공이 입을 꾹 닫았다.

물론 그가 저지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비무가 벌어진 것을 보면 허산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던 건 확실해 보였다.

그와 허산자는 다른 사람이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어차피 같은 무당의 장로일 뿐이다.

설령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무당 장로들끼리 서로 말이 다르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막아야 했다.

“……분명 그리되기는 했지.”

허공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나오자 청명이 때를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화산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칼 뽑는 종남도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를 겨루게 만들지는 않았어요.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지 모를 이들이 아니니까요.”

“…….”

“그런데 뭐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장로님도 끼셔도 되겠죠. 일대제자와 삼대제자가 비무를 하는 판인데 장로가 낀다고 뭐 문제랄 게 있겠어요? 어때요? 정 패배를 인정하시기 싫으면 같이 드잡이 좀 해 드릴 수도 있는데.”

청명이 씩 웃으면서 자신의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실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허공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이 모든 것이 그를 흥분시키려는 격장지계일지 모르지만, 걸려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애초에 일대제자와 삼대제자가 비무를 하는 그림을 만들어 버린 순간 무당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이다.

“확실히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군.”

허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야 한다면 인정하면 그만이지. 무당 장로의 권한으로, 이 비무의 승자는 화산임을 인정한다.”

“허공!”

그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허산자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허공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기에서 발을 빼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못하다. 지금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이 승패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지켜보는 이들 역시 이 비무가 더없이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 버릴 터. 그렇게 되면 비무 초반에 당한 네 번의 패배를 변명할 수 없게 된다.

차라리 순순히 승리라는 과실을 넘겨줘서 무당의 입장에서는 그리 간절하지 않았다고 넘겨 버리는 쪽이 나았다.

허산자 역시 그런 허공의 의도를 이내 이해했는지, 한 번 목청을 높인 것 외에는 딱히 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그럼 됐는가?”

허공의 물음에 청명이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화끈하시네요.”

“하하.”

맹랑한 놈.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네.”

“네, 그렇죠.”

“그럼 이제…….”

허산자가 어깨를 펴고 조용히 말했다.

“누가 나서서 나의 가르침을 받을 텐가?”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무리 입을 놀리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고 해도 어차피 잡기에 불과한 법.’

허산자가 일을 꼬아 놓기는 했지만, 딱히 탓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화산을 압도적으로 굴복시킬 능력이 없는 허산자에게는 이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공은 다르다.

비무? 승부?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를 넘지 못하는 이상 화산은 영원히 무당을 넘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나이 들어 죽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화산에 패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그리고 무당이 증명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저들은 이제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결국 검수란 검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

무당이 천하제일검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양이 깊었기 때문도 아니고, 유명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그들의 검이 천하에서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무당의 검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기세를 꺾어 주겠다.’

허공이 차디찬 눈으로 화산 쪽을 응시했다.

딱히 기세를 끌어 올리지 않았음에도 대단한 압박을 느낀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무당의 장로.’

‘어마어마하군…….’

그나마 오검은 마교의 주교라나 다른 강자들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서 버텨 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화산의 제자들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중압감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저런 사람을 상대할 수 있나? 우리가?’

저게 저들이 몇 번이고 말하던 윗대의 존재. 그 부재가 화산 제자들의 마음을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거 뭘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때 청명이 휘적휘적 앞으로 나섰다.

묘한 일이었다.

그저 어린 삼대제자가 앞으로 나섰을 뿐인데 화산 제자들을 압박하던 중압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산속에만 박혀 사셔서 세상을 잘 모르는 모양이니 하나 알려 드릴게요.”

“…….”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에요, 이 양반아.”

철컹.

옆구리에 매달린 암향매화검을 툭툭 친 청명이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상과 현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굳어 있는 두 장로의 얼굴을 보며 청명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하세요?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청명아, 이놈아…….”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시면 됩니다.”

현상의 눈이 뒤흔들렸다.

청명의 대단함을 모를 리야 있겠냐마는, 상대가 너무 좋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 허공을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청명뿐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정말…….”

현상이 뭔가 우려 섞인 말을 하려 입을 뗐지만, 현영이 한발 앞서서 말했다.

“청명아.”

“네.”

“할 수 있겠느냐?”

청명은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히죽 웃었다.

“저 양반들이 요즘 좀 덜 맞아서 착각하는 모양이에요.”

“…….”

“도가제일검은 물론이고, 천하제일검이 화산의 검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고 올게요.”

하지만 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네?”

“그저 네가 화산제일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돌아오너라. 그걸로 족하다.”

“…….”

생각지 못한 말에 잠깐 멍하니 있던 청명이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거 이런 배려는 익숙지가 않은데. 헤헤.”

머쓱하게 웃은 그는 이내 양손을 모아 두 장로들을 향해 포권 했다.

“화산 삼대제자 청명!”

“그래.”

“다녀오겠습니다!”

이내 청명은 몸을 획 돌려 비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 등으로 화산 제자들의 뜨거운 시선이 올곧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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