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5)
“누구지?”
“……일대제자가 아닌 것 같은데?”
화산의 제자들이 의아한 얼굴로 비무대에 오른 허공을 바라보았다.
얼굴로 유추할 수 있는 연배나 복색만 봐도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했던 일대제자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굳이 외양이 다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뭔가 달라.’
은연중에 느껴지는 느긋한 여유와 기묘한 허허로움이 지켜보는 이들을 자극했다.
“장로인가?”
“장로는 한 사람만 온 거 아니었어?”
“일대제자는 아닌 것 같은데?”
의문이 깊어질 무렵, 비무대에 선 허공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는…….”
실로 묵직한 울림이었다.
첫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화산 제자들의 이목을 모조리 끌고 가 버릴 만큼 존재감이 실려 있었다.
“무당의 장로인 허공이라 하외다.”
장로?
또 다른 장로의 등장에 화산 제자들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모든 이들의 주목을 이끈 허공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 갔다.
“화산과 무당의 비무는 잘 보았소이다. 화산의 문하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실감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소. 무당의 제자들 역시 많은 것을 배웠을거요. 무당의 장로로서 화산의 가르침에 더없이 감사드리외다.”
양손을 중앙에 모은 허공이 가만히 포권을 했다.
그 모습에, 백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을 향해 말했다.
“……생각보다 상식적인데?”
“저게?”
“그렇잖으냐.”
낡아 빠진 무복과 대충 질끈 묶은 머리까지. 손대면 베일 듯 단정한 허산자와 비교한다면 같은 문하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당연히 성격도 다소 괴팍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예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 더 봐.”
“응?”
하지만 청명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더 보면 알거야.”
그 말에 백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는 포권을 풀며 다시 입을 뗐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는 것이 도리일 터. 하지만 무당은 화산에 딱히 드릴 것이 없구려.”
허공은 고민하는 시늉을 하며 흐음, 소리를 흘리더니 말했다.
“하니 이러면 어떻겠소?”
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래도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화산의 제자 분들께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지 못한 것 같으니, 무당의 장로인 저라도 나서서 가르침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이건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소?”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차게 굳어졌다.
그들을 자극한 말은 다름 아닌 ‘가르침’이란 단어였다.
조금 전 허공이 자신의 입으로 화산에 가르침을 받았다는 둥의 말을 했지만, 그건 본인을 낮출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타 문파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은 예의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절대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이건 노골적인 무시보다 몇 배는 더 무례했다.
“가르침?”
“이…….”
여기저기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본인을 무시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 화산이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차마 경거망동할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은 저 망발을 늘어놓은 이가 다름 아닌 무당의 장로라는 점이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저 말에 먼저 대꾸해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금…….”
현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가르침이라 하시었소?”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허공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되물었다.
“뉘신지 여쭈어도 되겠소이까?”
“……화산의 장로인 현상이오.”
“아, 장로님이셨구려.”
그는 현상을 향해 가볍게 포권 해 보였다.
이 역시 딱히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시선들이 고울 리는 만무했다.
허공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도란 허례허식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당의 장로인 제가 화산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현상의 얼굴에 차디찬 한기가 서렸다.
그 옆에 선 현영 역시 노여운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현상은 예의를 끝까지 지키며 딱 잘라 말했다.
“화산은 타문에게 가르침을 청할 만큼 나약한 곳이 아니외다.”
그러자 허공은 대답 없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설사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건 화산이 청해야 할 일. 무당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오.”
“흐음.”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
“그게 평범한 문파라면 그렇겠지요.”
“……무슨 뜻이지요?”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허공이 화산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화산의 어린 제자들은 하나같이 뛰어납니다. 제가 다 욕심이 날 만큼 재능이 넘쳐나지요.”
현상은 다음에 나올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이다음에 나올 말이 본론임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하나…….”
아니나 다를까, 허공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라고 한들, 그걸 갈고닦아 줄 이가 없다면 빛을 보기 어려운 법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화산은 아직 이들의 재능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입니다만?”
“이……!”
의외로 현상은 그 말을 듣고도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외려 화가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백자 배와 청자 배들이었다.
“저 망할…….”
“조용히 하거라.”
“하지만 장로님!”
“조용히 하라 했다.”
현영의 차디찬 목소리가 그들의 경거망동을 가로막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조금 전에 운검의 분전을 눈으로 본 그들에게 화산의 윗대를 모욕하는 말, 특히나 화산의 윗대가 그들을 가르치기에 부족하다는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현영 역시 그들이 흥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무리 망발을 지껄이고 있다고는 하나, 상대는 무당의 장로다. 어린 제자들이 함부로 말을 할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대놓고 긁어 오는 상대의 의도가 빤히 느껴지는데, 손쉽게 당해 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허공은 이쯤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충분히 꽃피울 수 있는 재능들이 제대로 된 환경을 만나지 못해 피지도 못하고 지는 것을 누가 즐거이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
“다른 문파라면 모를까, 같은 도문의 길을 걷는 화산의 일인데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현상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망발이 아니었다. 화산을 얕잡아 보는 시선도, 심지어는 저 말에 반박하기 힘든 지금 상황도 아니었다.
그를 진정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이런 모욕을 감수하고서라도 무당의 장로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어쩌면 제자들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서였다.
저 말에는 틀린 게 없으니까.
화산의 제자들은 너무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승리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패배한 제자들마저도 눈물겨울 만큼의 분투를 선보였다.
저 무당을 따라잡는 것이 꿈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하지만 허공의 말대로 위에서 이끌어 주는 이가 없다면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 벽을 뛰어넘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화산의 제자들은 다른 명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악전고투를 치러야 할 것이다.
윗대가 이끌어 줄 수 없으니까.
‘내 알량한 자존심이 중요한가?’
쓰디쓴 감정을 누르며 현상이 무어라 막 입을 열려는데, 옆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현영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하나 묻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 자리는 승패를 가르는 비무인데 여기에서 도장께서 나오신다면 승패는 어찌되는 것입니까?”
“승패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영이 살짝 심호흡을 하고는 부연했다.
“무당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 번의 승이 더 필요합니다. 설마 장로가 직접 나서서 싸우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날카로운 질문에, 허공은 비릿하게 웃었다.
“승패라……. 승패……. 그게 무어가 중요하겠습니까?”
“…….”
“비무란 결국 서로의 무학을 견주고, 서로에게 배우는 것. 서로 얻은 것이 있다면야 승패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지요.”
현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허공은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굳이 승패를 가려야 속이 풀리시겠다면, 화산의 승리라 하셔도 무방합니다.”
현영이 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작자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건 이 비무의 의미 자체를 낮춰 버리겠다는 수작이다.
승리하더라도 많은 것을 잃게 된 무당이 들고 나올 수 있는 최선의 수이기도 했다. 설마 허산자도 아닌 장로가 능수능란한 화술을 보일 거라 생각지 못하고, 화제를 그쪽으로 끌고 간 현영의 실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중인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무당이 이기고 있었잖은가? 그런데 화산의 승리라니?”
“승패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저 적당히 겨루는 교류의 장이니까.”
“그럼 지금껏 무당이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는 건가?”
“그건…….”
중인들도 적잖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확신을 얻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그렇지! 무당이 진심으로 싸웠다면 어디 화산의 이대제자들에게 졌겠는가?”
“무슨 소리! 비무를 눈으로 직접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가? 그게 어디 설렁설렁 싸우는 모습이었나?”
“쯧쯧. 그 눈으로 뭘 안다고. 아무렴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화산의 이대제자들에게 지기야 하려고. 화산의 체면을 봐서 적당히 져 준 뒤에 연속으로 승리를 거둔 것 아닌가!”
“허허! 저치가 아주 좋을 대로 가져다 붙이는군!”
관객들도 저마다의 의견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물론 화산의 편을 드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는 화산이 지더라도 이기는 승부라는 평이 압도적이었는데 이제 와서 의견이 갈린다는 건, 결국 판이 뒤흔들리고 있단 걸 보여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빌어먹을.’
현영은 치미는 노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상대 쪽에서 장로가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장로가 나서야 한다. 하지만 그와 현상은 절대 저 허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발을 빼고 물러서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꼬리를 마는 모습을 보인다면 화산의 윗대가 무당의 장로를 상대할 수 없음을 자인하는 꼴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현영이 현상의 표정을 흘끗 살폈다. 현상 역시 답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
현영은 알고 있다. 그들이 대책을 내어 놓지 못할 때 항상 답을 내는 이가 누구인지 말이다.
‘청명…….’
“아니!”
“…….”
거 반 박자 빠른 놈 같으니라고.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청명을 돌아보았다. 바닥에 불량스럽게 쪼그려 앉은 청명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건들건들 입을 열었다.
“거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똑바로 하세요. 그래서 졌다는 거예요, 뭐예요?”
“……음?”
“우리가 이겼다는 거죠?”
“허허.”
허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생각해도 좋네.”
“아니, 말귀를 영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은데.”
“……뭐라 했는가?”
청명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당이 졌다 이거죠?”
“…….”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조금 전까지는 말 무지하게 잘하시더니.”
허공은 웃음기를 거두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청명.”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좀 유치하지만 화산신룡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죠.”
화산, 무당, 그리고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명에게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