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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34화 (632/1,567)

634화.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4)

“그러니까…….”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던 백천의 고개가 일순간 옆으로 획 돌아갔다.

‘어?’

조걸과 윤종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바로 무슨 일인지 물을 수가 없었다. 백천의 얼굴이 너무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사고?”

그때 등 뒤에서 당소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이설 역시 백천과 비슷한 얼굴로 한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소소가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뭘 보는 거지?’

백천과 유이설이 바라보는 곳은 같았다. 비무대 너머의 무당 진영 쪽.

“청명아.”

“흐음.”

백천의 나직한 부름에 청명이 뺨을 긁적였다. 잠깐 묘한 눈으로 무당 쪽을 응시하던 청명의 입가가 비틀리듯 말려 올라갔다.

“이거…… 아무래도 꽤 거물이 행차하신 모양인데.”

느껴지는 기운이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딱히 내세우지 않음에도 사위를 내리누르는 존재감이 뚜렷하게 전해졌다.

“한 번은 보여 주겠다는 건가?”

나쁠 건 없었다. 적어도 화산 쪽에서는 말이다.

허공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형과 사질들에게 향하는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무자 배들이야 그런 말을 들었다 해서 장로인 허공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허산자는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참지 못한 노기가 벌겋게 피어올랐다.

“이놈! 그게 무슨 망발이냐?”

엄중한 기세의 꾸짖음이 날아들었지만 허공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그토록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형.”

“…….”

“무인에게 있어서 무위가 전부일 수는 없겠지만, 결코 부족해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허산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저 말이 그를 두고 하는 것임을 모를 허산자가 아니다.

“평소 수련을 게을리하고, 잡기에나 힘을 쏟으니 이런 망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말 다 했느냐?”

허산자의 시퍼런 살기 머금은 시선과 허공의 여유로운 시선이 서로 얽혀 들었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깬 것은 허공의 나지막한 웃음소리였다.

“그리 화내실 것 없습니다. 지금 사형께서는 제가 무학에만 전념했던 것에 감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산자는 아랫입술을 감쳐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무당의 장로들은 괴팍하다.

도를 닦는 도인들이 괴팍하다는 말이 얼핏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해지는 법. 평생에 걸쳐 강함을 좇다 못해, 이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행을 이어 가는 이들의 성정이 부드러울 리 없다.

그렇기에 무당에서도 웬만해서는 장로들을 건드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허공은 그런 무당의 장로들 중에서도 특히나 괴팍한 편이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검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같은 사형제들로부터 경원시당할 정도이니 그 성정의 모남이 얼마나 극심한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장문인께서 분명 네게 명을 내리셨을 터! 어찌하여 이리 늦었느냐?”

“딱히 늦지는 않았습니다. 도착은 이미 오래전에 했지요.”

“그럼 왜 지금에야 온 것이냐?”

“그저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뭐라?”

허공이 고개를 살짝 돌려 무자 배들을 보았다. 허공의 시선을 마주한 무자 배들은 모두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제가 눈을 뗀 사이에 사문이 얼마나 한심해졌는지 말입니다.”

“……이놈이…….”

허산자는 이를 갈았다.

사문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긴 했으나, 사실은 무학에 전념하기보다 대외적인 활동에 더 관심이 많은 허산자와, 더 나아가서는 그런 풍조를 조장한 장문인을 비판하는 말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심산유곡에 파묻혀서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더냐?”

허공이 살짝 손을 들어 올린다.

이 논제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너무 그리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리 오지 않았습니까.”

“…….”

“다만.”

허공이 고개를 돌려 화산 쪽을 바라본다.

“기껏 부르시기에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나 했더니, 고작해야 타문의 아이들을 겁주는 일이라니…….”

그의 입가에는 고소가 스며 있었다.

“안타깝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문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며 이것저것 하시더니. 생각만큼 뭐가 잘 풀리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사형.”

허산자의 꽉 다물린 턱이 불끈거렸다.

그와 허도진인은 무당의 명성을 높이고, 그 영향력을 천하 방방곡곡에 떨쳐야 한다는 쪽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무당의 장로들이 모두 그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수의 장로들이 도가 본연의 수양에 힘을 쓰고, 무학에 조금 더 정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이건 무당 안에서 파일 대로 파인 깊은 골이며 해묵은 갈등이었다.

그 일에 대해 다시 논하기 시작하면 말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진다.

“허공.”

“예, 사형.”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너 역시 무당의 검이 화산 아래에 놓이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겠지.”

허산자의 말에 허공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가 삐딱하게 꺾었다.

“적어도…….”

“…….”

“제 목이 붙어 있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허산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런 성정 때문에 허도진인이 허공을 이곳에 보낸 것이다.

다른 무당의 장로들이라면 아무리 사문의 체면이 걸려 있다 해도 까마득하게 어린 화산의 제자들과 손을 섞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허공은 다르다.

그는 무당의 이름이 화산의 아래 놓이는 것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당의 검이 화산의 검만 못하다는 소리만큼은 절대 참지 못할 이였다.

‘성격이야 어찌되었든 그 실력만은 확실하지.’

허공은 장로들 중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한다. 저 무진과 나이 차이가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 실력은 모든 사형들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 그 오만하고 괴팍한 성정을 버리고 포용력만 조금 더 갖출 수 있다면, 언젠가는 충분히 무당제일의 검이 될 수 있을 것을. 제 안에 제가 갇힌 놈이다.

이게 허공에 대한 허도진인의 평가였다.어쨌든 그런 인사가 왔으니, 적어도 저 화산에 무당의 힘을 보여 주는 것만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허공 역시 자신의 임무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지체하지 않고 본론을 말했다.

“괜히 시간 끌고 싶지 않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기다려라.”

허산자의 말에 허공이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허산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딱 잘랐다.

“아직 비무가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제자들과의 비무에 장로가 나간다는 건 창피한 일이다.”

“창피요?”

허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체면도 무시한 채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허례에 집착하니 이렇게 망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형!”

“…….”

“창피란 창피는 다 당했건만, 여기서 무슨 격식을 더 따진단 말입니까? 이대제자를 장로가 상대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일대제자들이 상대하는 건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

말문이 막힌 허산자가 입을 다물자 허공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선재. 선재로다.”

비웃듯 중얼거린 허공은 이내 무자 배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

“무당의 일대제자가 되어서 화산의 이대제자들에게도 기를 펴지 못하는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 말이다.”

은은하게 노기 서린 그 말에 무자 배들이 면목 없단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한심한 것들.”

허공의 입가에 명백한 비웃음이 어렸다.

“그래서, 이젠 누가 나서겠느냐? 누가 나서서 광대놀음을 하고 승리를 거두겠느냐. 어디 말해 보아라.”

“…….”

“어서!”

허공이 일갈하자 무자 배들의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무진.”

“……예, 장로님.”

“네가 나서겠느냐?”

무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지금 일대제자 둘이 더 나서서 화산 이대제자 둘을 더 꺾는다 해서 무당의 명예가 돌아오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건 차라리 패배보다 더한 수치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검을 이루기 위해 사문에 너무 신경을 쓰지 못했구나. 설마 무당의 제자라는 놈들이 이런 한심한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무당으로 복귀하는 대로, 네놈들의 썩어 빠진 정신 상태부터 고쳐 주마.”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제자들을 일별한 허공은 획 몸을 돌렸다.

“광대놀음을 원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너무 기다리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허산자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겨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두 번을 더 이긴다해서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은 또 아니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사기를 감안한다면 차라리 이쯤에서 저들에게 쐐기를 박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허공.”

“예.”

“대신…… 확실하게 찍어 눌러야 한다.”

허산자의 당부에 허공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가 누군지 그새 잊으신 모양이군요, 사형.”

실로 건방진 말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믿음직스럽게만 들렸다.

허공은 검을 툭 쳐 보이곤 앞으로 나섰다.

“무당을 넘보기에 아직 백 년은 멀었다는 사실을 화산의 햇병아리들에게 알려 주겠습니다.”

허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느긋하게 비무대로 향하는 허공의 뒷모습을 보던 무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로님.”

슬쩍 무진을 본 허산자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네게는 미안하구나. 무위를 펼칠 기회를 주었어야 하는 건데.”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정말 허공 장로님께서 나서셔도 괜찮을지…….”

“걱정이더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무당에서도 허공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이는 없다.

그가 약해서가 아니다. 도인답지 않게 워낙 손속이 잔인하고, 상대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게 무당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타문파라면 문제가 벌어지고도 남는다.

“걱정할 것 없다.”

“하지만…….”

“장문인께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하셔서 허공을 보내셨겠느냐?”

무진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장문인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허공을 보냈다면 의도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허공이 과하게 손을 쓰지 못하도록 확실히 통제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거나…… 그게 아니면…….

“정도를 모르고 날뛰는 아이에게는 때로 매도 필요한 법이지.”

“…….”

“같은 도가의 어른으로서 콧대를 한번 꺾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화산에게는 좋은 약이 되겠지.”

허산자가 나지막이 도호를 외었다.

하지만 무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게 정말 올바른 계도를 위한 매입니까?’

아니면, 치고 올라오는 후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내리치는 발작적인 폭력입니까.

그러나 차마 이렇게 물을 순 없었다. 그저 비무대에 오른 허공을 보며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더는 사문에 실망할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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