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3)
“후욱! 후욱! 후욱! 후욱!”
핏발 선 눈이 연신 불길하게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눈을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은 모두 불안으로 서서히 일그러졌다. 결국 그들이 바라볼 곳은 한 사람뿐이었다.
‘어떻게 좀 해 보십시오.’
‘내가 뭘 어떻게?’
‘아니! 그래도 사숙밖에 없잖습니까? 저러다 터지면 난리 나는 거 아시잖아요.’
‘끄으응.’
이 망할 놈들은 평소에는 동룡이, 동룡이 해 가면서 사숙 취급도 안 해 주다가 이럴 때만 사숙, 사숙 하며 찾아 댄다.
사제 놈들이나 사질 놈들만 압박해대는 거라면 대충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데, 문제는 뒤에 선 장로들까지도 은근히 백천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노골적인 부탁과 이어지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한숨을 푹 쉬며 슬쩍 청명의 곁으로 다가가 눈치를 살폈다.
“연패……. 연패……. 칠 연패…….”
“…….”
“무당 잡놈들 따위에게 칠연패……. 무당 따위에게…….”
미쳤다.
평소에도 좀 맛이 가 있는 놈이지만, 지금은 아주 제대로 가 버린 모양이었다. 저 희번덕대는 눈과 파들파들 떨리는 손만 봐도 알 만했다.
멀쩡해도 힘들 마당에 아예 맛이 가 버린 청명을 말려야 하니 백천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었다.
‘선조시여.’
이러다 죽겠습니다, 진짜.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떻게든 진정을 시켜 볼 요량이었다.
“저…….”
“크르릉…….”
“저기 그…….”
“어?”
청명의 시선이 백천 쪽으로 획 돌아왔다.
‘……눈깔 보소.’
곧 눈으로 불도 쏘겠네…….
“그…….”
백천은 그답지 않게 더듬대며 말했다.
“네, 네가 그랬지 않느냐.”
“뭘?”
“그……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다고.”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백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애들이 배우는 게 있으니 그리 화를 낼 것까지는…….”
그 순간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툭 꺾였다.
‘망했다.’
‘조졌다.’
‘토낄까?’
그와 동시에 청명의 눈치를 보던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사숙.”
“으, 으응?”
“그랬지. 물론 내가 그 말을 했지.”
“그, 그렇지. 청명아.”
“……근데.”
“응?”
“그게 뭐 어쨌다고.”
“…….”
“사숙은 안다고 다 해? 엉?”
청명의 눈이 서서히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걸 다 할 수 있으면 공자지, 청명이겠어? 부처도 제 아는 걸 행하는 데 평생이 걸렸는데, 내가 아는 걸 못하는 게 뭔가 문젠데? 뭐가!”
“…….”
아이고, 우리 사질은 어쩜 이렇게 성질이 더러울까.
“이 땔감으로도 못 쓸 것들이 무당한테 칠 연패를 해! 칠 연패? 오 연패도 아니고! 육 연패도 아니고! 칠 연패? 칠 연패애애애?”
거품을 물 기세로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던 청명이 돌연 딱 몸을 굳히며 뒷목을 잡았다.
“끄윽……. 뒤, 뒷목이!”
“지, 진정해라!”
기겁을 한 백천이 청명을 급히 다독였다.
“이득은 볼 만큼 보지 않았느냐! 여기서 날뛰면 진짜 죽도 밥도 안 된다.”
“그, 그래, 청명아! 자, 제발 진정하고!”
“누가 빨리 가서 당과 가져와, 이 새끼들아!”
다른 제자들도 백천을 도와 열심히 청명을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들도 이미 청명과 함께 지낸 지가 수년이었다. 이놈이 불뚝대기 시작하면 항상 참혹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충분히 알고도 남을 기간이었다.
“후욱! 후욱! 후욱! 후욱!”
핏발 선 눈으로 앞을 노려보던 청명은 가쁜 숨을 씩씩 내쉬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저 새끼들 대가리 싹 다 깨 버리고 그냥 어디 산에다 묻어 버리는 게…….”
“뭐래, 이게 미쳤나?”
“아니, 사숙. 원래 미치긴 했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미친놈도 때와 장소는 가리는 법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미친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니까 문제가 크지 않은가!
“아니! 빌어먹을 칠 연패가 말이나 되나!”
“네가 못 이긴다며, 이 미친놈아!”
“못 이기지! 당연히 못 이기지! 그런데 이겨야 할 거 아냐!”
“……제발,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좀…….”
백천이 애원했지만 청명은 아예 사람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청명도 안다.
오검을 제외한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아직 무당에 미치지 못한다. 무당이 일개 동네 무관도 아니고, 한 배분이나 차이가 나는 이들을 무슨 수로 이기겠는가?
그게 가능했다면 화산은 벌써 천하제일문파급에 올라 소림의 중놈들 민머리에 매화를 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안다. 당연히 안다. 알긴 아는데…….
‘아는데 빡친다고!’
아이고, 내 팔자야.
오래 살다 보니 무당한테 이렇게 처참히 지는 꼴도 보는구나!
이 새끼들아, 나 때는, 어?
저 새끼들 얼굴을 본 적이 없어! 대가리에 쓴 도관만 봤지! 어디 무당 새끼들이 화산 앞에서 대가리를 뻣뻣이 들어, 들기를!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 된 청명은 검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지, 진정하라고, 이 새끼야!”
“당과 멀었어?!”
그때였다.
쿠다다당!
삼대제자를 대표해 비무에 나섰던 곽회가 날아든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비무대 바닥에 처박혔다.
“저, 저, 저……. 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청명이 아예 뒤로 기우뚱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저 새끼는 왜 져도 이럴 때 지고 지랄이야!’
‘저 눈치도 없는 새끼!’
‘내려오기만 해 봐라!’
나름 최선을 다했음에도 쌍욕만 얻어먹게 생긴 곽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으나,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런 법이었다.
같은 짓을 저질러도 시기를 못 맞춘 놈은 된서리를 맞는다.
“후우우욱!”
가까스로 다시 몸을 일으킨 청명이 깊게 심호흡했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얼굴이 조금씩 온화해졌다.
“……그래. 내가 사숙들한테 뭐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거지.”
“그, 그래, 청명아. 일단 진정하고! 응?”
“다음에! 다음에 이기면 되잖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응?”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거지! 내가 나간다!”
“잡아!”
“막아!”
주변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잽싸게 몸을 날려 청명을 덮치고 짓눌렀다.
“놔! 안 놔? 내가 저 새끼들 대가리 전부 빡빡 깎아서 소속을 소림으로 바꿔 준다!”
“아, 아미타불. 그건 본문의 입장도 들어 봐야…….”
“시끄러워! 도움도 안 되는 게!”
“…….”
“이 밥버러지 같은 게! 화산 밥을 그만큼 처먹고 비무도 못 나가? 어? 처 먹은 거 다 뱉어, 이 새끼야!”
혜연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잔뜩 물들었다.
아니, 싫어서 안 나간 것도 아니고, 솔직히 소림 소속인 그가 무슨 수로 화산과 무당의 비무에 나간단 말인가.
“왜 스님한테 화풀이냐!”
“쓸모가 없잖아! 쓸모가! 저 민머리 저거!”
하아아아악!
청명이 눈을 까뒤집자 그의 옷 안에서 백아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혜연을 향해 하악질을 해 댔다.
한껏 시무룩해진 혜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윤종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님.”
“……고맙습니다.”
윤종이 혜연을 위로하는 와중에도 청명의 발작은 계속되었다.
“놔! 안 놔? 내가 나간다니까? 내가 나가서 저 새끼들 모가지를 똑똑 분질러 버리면 해결될 거 아냐!”
“넌 마지막에 나간다며, 이 새끼야!”
“네가 어설프게 한 명 잡고 돌아온다고 뭐가 달라질 상황이 아니라고!”
“자자, 당과 먹어라, 당과! 어서!”
조걸이 어디선가 공수해 온 당과를 청명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청명은 당과가 무당 놈들 대가리라도 되는 것처럼 살벌하게 씹어 댔다.
“끄으으으.”
당과를 물었음에도 여전히 진정하지 못하는 청명의 모습에 백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칠 연패……. 아니, 팔 연패는 조금 과하긴 했지.’
운검이 선전한 이후로 다들 정말 최선을 다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패배는 패배였다. 패배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당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은 확인했다.
하지만 그 거리가 확연하게 존재한다는 것 역시 똑똑히 확인한 순간이었다.
‘무당이라…….’
백천은 무거운 낯으로 무당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높구나.”
“그러게요.”
백천과 윤종은 무당의 진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당은 확실히 천하제일검문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저 일대제자들을 따라잡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 수에서 차이가 난다.’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여기에 전부 온 것도 아니다. 무당은 일대제자만으로 그 수가 백에 육박한다. 화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다.
심지어 그들이 성장하는 동안 무당의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 역시 성장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전력의 차이는 웬만해서는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저들을 극복해도 그 뒤에는 무당의 장로들이 있다는 거겠지.”
“……웬만하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좀 끔찍할 정도네요.”
“그래. 그렇구나.”
이게 명문의 저력이라는 거겠지.하나하나를 뛰어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명문이란 그 하나를 추월해도 또다시 높은 산의 형태로 가로막아 온다.
“하지만…….”
백천의 얼굴에 단단한 의지가 서렸다.
“그쯤은 되어 줘야 추격할 맛이 있지.”
아직은 더없이 높다.
하지만 넘지 못할 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비무를 통해 화산의 제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과거에는 너무도 높아서 그 끝도 가늠할 수 없었던 무당이지만, 이 비무를 통해 대략의 높이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오를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이 비무의 가장 큰 수확은 자신감을 얻고 돌아가는 거겠지.’
백천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무당의 장로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한번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어려울 겁니다. 장로들이란 쉽사리 나서는 이들이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허산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허산자는 무당의 진짜 장로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허산자와 같은 대외적인 활동을 맡는 이가 아니라, 무당의 심산유곡에서 오로지 수련에만 전념하고 있는 진짜 장로들의 힘이었다.
‘그것 하나를 놓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다른 것은 얻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끄으으응. 저 무당 새끼들이…….”
“…….”
그러니 일단은 저 개부터 좀 진정시키고…….
……죽겠네. 진짜.
“수고했다.”
“예, 장로님.”
승리하고 돌아온 제자를 보며 허산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여덟 번.
유이설과의 비무에서 패배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 여덞 번을 모조리 승리했다. 계획한 것의 팔 할은 이루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연승을 지켜보면서도 허산자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분명 이기고 있는데.’
왜 이토록 이기고 있단 실감이 나지 않는단 말인가?
허산자가 입술을 깨물고 화산 쪽을 흘끗 보았다.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은 누가 보아도 패배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차라리 대승을 거둔 이들의 모습에 가까워 보일 정도였다.
반면 무당은 승리하고 있음에도 그 분위기가 점차 침체되고만 있었다.
‘꺾어야 하거늘…….’
이 비무를 시작한 이유를 생각한다면,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서는 안 된다. 대외적으로 차이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산에게 무당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라는 것을 실감케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산자가 버럭 소리쳤다.
“허공 이 녀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 장문인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거늘, 어찌 이리 무도하단 말이냐!”
“이미 도착했으니 그리 화내실 것 없습니다.”
무진이 무어라 대답할 줄 알았던 허산자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치켜떴다. 획 돌아보니 살짝 묘한 표정을 지은 사제의 얼굴이 보였다.
“사형. 보아하니 꽤 고생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왜, 왜 이리 늦었느냐!”
허산자의 닦달에 허공이 미소 지었다.
“참담합니다.”
“……뭐라?”
“언제부터 무당이 이리 나약해졌습니까? 장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화산 하나 상대하지 못하다니요.”
“이, 이놈…….”
“그렇지 않습니까, 사형?”
허공의 나지막하고 위압감 있는 목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