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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32화 (630/1,567)

632화.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2)

비무대를 내려온 무각이 허산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혜검을 사용했습니다. 이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허산자는 조금 미묘한 심정으로 무각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였느냐?”

“…….”

“혜검을 쓰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만한 상대였다. 그런데도 굳이 사문의 법도를 어겨야 할 이유가 있었느냐?”

“……말로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무각의 대답에 허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겼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승리한 이에게 죄를 묻는다면 천하가 무당을 비웃을 터. 네 죄는 없는 걸로 하겠다.”

“하나…….”

“괜찮으니 어깨를 펴거라! 사죄할 일이 아니다.”

“……예.”

허산자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혜검을 눈으로 보고, 일대제자의 참담한 패배를 눈으로 보았으니 저들도 자신감을 잃었을 터. 노한 마음에 잠시 혈기가 오를 수야 있겠지만, 곧 현실을 알게 될 것이다.”

“…….”

“남은 것은 승리를 쓸어 담는 것뿐이다. 이제 되었다.”

무각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허산자를 지나쳐 뒤쪽으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이겼다라…….’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승리한 것은 그일진대 이겼다는 생각이 들질 않았다. 승부에서는 이겼으나 검수로서는 패배한 기분이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무진이 다가왔다.

“사형.”

“어떠했느냐?”

“…….”

무각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비무에 대한 감상을 몇 마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사형.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문득 저 멀리 있는 허산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무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당의 제자가 입에 담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진은 그 말을 듣고도 꾸짖기는커녕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비무라…….”

비무는 서로의 무를 견주어 배우는 것.

세상 사람들은 비무의 참뜻을 견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진정한 비무의 의의는 배우는 것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 비무를 통해 생각 이상의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다른 사제들도 알면 좋겠건만…….’

무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그냥 탈진하신 것뿐이에요.”

“진짜 괜찮으냐?”

“네.”

당소소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듯 운검의 맥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내상이 있긴 하지만, 사나흘 정도 정양에 들면 깨끗하게 나으실 거예요.”

“휴우.”

“다행이다…….”

그제야 화산의 제자들의 어깨에 가득하던 긴장이 풀렸다. 혹 운검이 큰 상처를 입기라도 했다면 그들의 속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관주님…….”

의식을 잃은 운검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해 보였다. 몇몇 화산의 제자들이 그런 그를 보다 결국 눈가를 훔쳤다.

특히나 백상은 금방 통곡이라도 할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

모두가 돌아보니 청명이 태연한 신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고 배운 거나 제대로 기억해. 관주님은 그걸 원하실 테니까.”

“물론이다.”

“절대 안 잊는다!”

무슨 수로 잊겠는가? 그런 광경을 눈으로 보았는데. 운검이 전하려 한 것을 전신으로 느꼈는데.

한껏 진중해진 그들의 얼굴을 보며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건 그는 할 수 없는 이야기이고, 전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사람이니 응당 홀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서로 모여든다. 혼자는 할 수 없어도 함께라면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청명이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직도 지는 게 무서운 사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모두의 눈빛이 충분히 답하고 있었다.

“좋아!”

크게 고개를 끄덕인 청명이 턱짓으로 비무대를 가리켰다.

“다음은 누가 나갈래?”

“나다!”

“비키십쇼, 사형! 제가 나갑니다!”

“사숙들까지 나서실 것 없습니다! 제가 갑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무서운 기세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 나서기를 꺼려하며 눈치만 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아, 사형은 저보다 약하잖습니까!제가 갑니다!”

“뭐, 이 새끼야? 붙어 볼래?”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 모두 헛소리 말고 꺼져라!”

“뭐요? 정수리에 대침 박혀도 위아래 소리 나오는지 한번 봐?”

“소, 소소야, 진정해라.”

“…….”

그…… 뭐, 좀 과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우물쭈물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조금 당황한 청명이 그중 한 명을 지목하려는 순간이었다.

“다들 조용히 해라.”

스산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귀 같은 얼굴로 검을 꽉 움켜잡은 백상이었다.

“내가 나간다.”

“…….”

“불만 있는 사람?”

“……없습니다.”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불만을 이야기하려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았다.

백상이 입술을 꽉 깨문 채 청명을 바라본다.

“내가 나가도 되겠지?”

“어…… 어. 나가.”

심지어 천하의 청명마저도 그 기세에 움찔했다.

“간다.”

백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무대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청명이 식은땀을 닦았다.

‘애들이 어려서 그런가.’

좀 과격하네, 좀…….

“다들 이제 저리 가세요. 관주님께선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소소가 딱 잘라 말하자 운검의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물러섰다. 절대 운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청명은 의식을 잃은 운검을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내가 그 격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사실 청명은 이들에게 이겨 내는 법만을 가르쳤다.

그렇기에 전할 수 없었던 것. 그가 모르는 사이 놓치고 있던 정신을 운검이 오늘 너무도 훌륭하게 전해 주었다.

‘고생했다.’

청명이 아닌, 매화검존으로서 깊은 감사를 전한 청명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비무대 위에 선 백상을 응시했다.

아직 무당에서 나올 이는 정해지지 않았는지, 백상만이 홀로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나올까?”

“……아무나 나오겠지.”

“이길 수 있을까?”

“설마.”

청명의 칼 같은 반응에 백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겠지.”

이제는 요행으로도 승리를 바랄 수 없다. 아무리 앞에서 다섯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한들, 연이어 열 번의 패배를 당하면 그 승리는 흐려지고 자괴감만 가득해졌을지도 모른다.

‘사숙이 없었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운검은 화산의 제자들에게 승리가 전부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패배를 두려워해 나서기를 꺼리던 제자들이 너나없이 나서려 하는 것만 보아도 극명하지 않은가?

“당당하게 질 수 있다면 지는 것도 나쁘다 할 순 없지.”

“…….”

백천의 말에 청명의 얼굴이 뭔가 못마땅한 듯 비틀렸다. 심통이 나 죽겠지만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는 낯이었다. 백천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이기는 게 좋다는 건 알고 있다.”

“끄응.”

그러자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무당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스산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니 한 번은 참아야지. 하지만…….”

으드드득.

“다음에는 처발라 버릴 테다.”

청명이 이를 갈아붙이며 읊조린 말에 백천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여튼 욕심이 들끓기는.’

이미 그들은 말도 못 하게 많은 것을 얻었다.

이 비무 대회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 아닌 것까지 감안한다면 좋은 결과를 내었다 평할 수준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이놈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의 이런 성정 덕에 화산이 여기까지 온 거겠지만…….’

백천의 시선이 비무대 위에 선 백상에게로 향했다.

아마 백상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때로는 승리보다 값진 패배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힘내라. 백상아.”

화산의 의기를 보여 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백상은 나름 분전했지만, 절대적인 격차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똑똑히 보여 주었다.

연이어 비무대에 오른 이들 역시 최선을 다했지만, 무당 일대제자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중인들은 마냥 맥없이 패배한 이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화산을 보지 않았다.

“또 졌구먼.”

“이걸로 칠 대 오인가?”

“칠 대 사네.”

“아, 그렇지. 처음 그 판은 치지 않기로 했었지.”

중인들이 혀를 찼다.

“쯧쯧. 분전했지만 힘이 다한 모양이로군. 아쉽게 되었어.”

“그러게나 말일세.”

연신 아쉬워하던 중인들은 문득 깨달았다.

아쉽다는 건 그만큼 기대를 했다는 의미다. 그 말인즉슨 그들마저도 어쩌면 화산이 무당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비무대 위에서 싸우는 화산의 제자들이 확연하게 밀리고 있다는 걸 그들도 알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 패배를 비웃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대단하군.”

“무당 말인가?”

“무당은 무슨. 화산이 대단한 게지!”

중인들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저게 말이나 되는 싸움인가? 대체 어떤 경우에 일대제자와 이대제자가 비무를 한다는 말인가? 상대와 격을 맞춰 싸워야지.”

“그게 왜 무당의 잘못인가? 화산의 일대제자들이 빈약한 게지.”

“그래, 빈약하겠지!”

말을 하던 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상대가 빈약하다고 그걸 노려 비무를 거는 게 명문이라는 곳이 할 짓인가? 무당이 양심이 있었으면 저들도 이대제자들을 데리고 왔겠지! 애초에 이대제자를 싹 빼놓고 온 게 무슨 뜻이겠는가? 화산의 이대제자들을 일대제자로 상대하겠다는 속셈 아닌가?”

“설마 그렇기야 했겠는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지.”

“자네 말대로 그렇게 되었다 치세! 그럼 비무를 조금 늦추고 본산에 있는 이대제자들을 데리고 오면 될 일 아닌가!”

“…….”

“이건 치졸한 일이야.”

무당 쪽으로 향하는 중인들의 시선이 영 곱지 못했다.

처음 여흥으로 즐기러 왔을 때는 신경 쓰이지 않던 일이다. 하지만 승부가 생각 이상으로 치열한 데다 화산의 분전이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 무언가 비틀려 있음이 그들에게도 확연히 와닿은 것이다.

“그러니 화산이 대단하다는 게지!”

“…….”

“나더러 열 살은 더 많은 일대제자를 상대로 이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비무를 하라고 했으면, 뒤도 보지 않고 내빼 버렸을 걸세. 그런데 저들은 그게 비겁하다 욕하지 않고 묵묵히 당당하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듣고 보니.”

“저 일대제자와 싸우는 이가 지금이야 당연히 지겠지. 하지만 이십 년……. 아니, 십 년만 지나면 과연 무당이 화산의 상대가 되겠는가? 벌써부터 무당의 일대제자와 싸울 어린 제자들이 있는데?”

“…….”

처음에는 그저 호의였다.

산적들의 창고를 털고, 그걸 이 먼 곳까지 짊어지고 와서 나눠주는 이들에게 누가 호의를 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라 박수를 쳐 준 것이다.

하지만 승부를 지켜본 이들은 왜 화산의 이름이 점점 천하를 울리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케 되었다.

“세상이 바뀌겠구먼. 화산, 화산 하더니 명성이 높아지는 데는 이유가 있었어.”

적지 않은 수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심 부정하는 이,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반박하는 이들도 있어서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긴 했지만 화산이 결코 과거의 화산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화산이라는 문파는 어느새 저 명문인 무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위치까지 올라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혼란스런 감정의 소용돌이 뒤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쯧.”

거친 베옷 차림에, 장년과 노년 사이의 어디쯤에 머무는 얼굴의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비무대를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잠시 눈을 떼고 있었더니…….”

겨우 화산 따위에…….

그는 영 마음에 안 드는 양으로 고개를 내저은 뒤 뒤돌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제법 낡아 삭기 시작한 옷이 흩날렸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송문고검이 흡사 새것같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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