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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31화 (629/1,567)

631화.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1)

뻗어 나간다.

굵게 자라난 아름드리 거목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을 막으며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까지 본 화산의 매화와는 조금 다른,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다르다는 게 틀렸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화산의 매화는 피어나는 꽃, 즉 개화(開花)를 형상화한다. 하나 지금 이 검이 만들어 내는 것은 매화나무 그 자체였다.

밀려오는 것은 태극혜검(太極慧劍).

음(陰)과 양(陽)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태극(太極)의 이치를 형상화한 무당의 최고의 절기.

그 위력은 혜검에 대해 논하는 세간의 모든 말들을 능가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콰지지직!

단단한 청석으로 만든 비무대 바닥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쩍쩍 갈라졌다.

부드럽게 밀어 내는 것 같다가도 세차게 후려치고, 따뜻하게 감싸다가도 차갑게 찌르고 들어온다.

음과 양의 조화, 다시 말하자면 서로 다른 성질이 공존한다.

음양(陰陽)과 양의(兩意).

이 검은 무당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콰득! 콰득!

압력을 이기지 못한 바닥이 부서져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하나 밀려오는 검기는 그 으스러진 돌조각들마저 포용하듯 휘감으며 운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실로 부드럽고도 강한 공격이었다.

부상자에게 날릴 마지막 일격으로는 과하다 못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공할 검기였다.

하나 운검은 되레 감사함을 느꼈다.

이건 무각이 그를 인정한다는 증거.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 검기를 보여 주겠다는 의지다.

한때는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던 무당의 제자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검을 펼치고 있다. 무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운검 역시 일말의 망설임을 담지 않았다.

‘뻗어라.’

언젠가, 청명의 검이 매화를 피워 냈다.

백천의 검 역시 매화를 피워 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운검의 검은 매화를 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운검은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의 성장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음속에 생겨난 한 줄기 고뇌를 외면하고 내리누르며 미소 지었다.

그래. 피어나는 건 저 아이들의 몫이다.

그는 그저 선대와 후대를 이어 주는 교량.

아직 여린 꽃들이 뜨거운 햇살에 말라 버리지 않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이다.

가지가 뻗어 나갔다. 세상에 토해 내는 울분처럼.

‘장로님.’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

지금이야 가르치는 입장이라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그 역시 배우는 입장이었다.

몰락해 가는 사문과 하루하루 힘을 잃어 가는 화산. 그 절박하고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현상이 그들을 바라보는 눈은 그저 따뜻했다.

‘제가 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서 받은 것을 온전히 아이들에게 쥐여 줄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이제야 깨달았는데. 당신께서 어떤 심정으로 저를 가르쳤는지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 깊은 마음을 저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운검은 검을 조금 더 세게 꽉 움켜쥐었다.

아니다. 그는 그저 믿을 뿐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절절히 외치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은 사람에게 전해진다고, 그저 그렇게 믿을 뿐이다.

커다란 나무에서 뻗어 나간 가지 끝에서 새순이 돋았다.

화려하게 피어나던 제자들의 꽃과는 다르게, 운검의 검 끝에서 피어난 새순은 그저 푸르렀다.

콰아아아아아!

밀려온 태극의 검기가 운검이 만들어 낸 검기와 충돌했다. 그 순간 운검의 검기 전체가 튕기며 크게 휘청였다.

“쿨럭!”

운검의 입에서 피가 폭포처럼 터져나왔다.

검기에 실린 어마어마한 경기와 상상을 뛰어넘는 위력이 그의 내부를 온통 뒤집어엎은 것이다.

‘아프군.’

하지만 이건 고통이라 할 수도 없다.

육체가 으스러지는 고통 같은 건 얼마든지 버텨 낼 수 있다.

무력함에 처진 스승의 어깨를 보는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할 때 느끼는 단장(斷腸)의 고통에 비하면 이건 고통이라 할 수도 없다.

콰드득!

운검의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흡사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모양새였다.

세상은 언제나 차고 가혹하다.

‘하나, 제자들아.’

겨울은 언제고 끝난다.

운검의 시선이 슬쩍 자신의 비어 버린 한쪽 소매로 향했다.

그는 잃어야만 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대개의 사람은 상처를 입은 만큼 강해진다.

하지만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하는 법이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직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다.

“아아아아아아아!”

울부짖듯 소리친 운검의 검이 다시 한차례 휘둘러지자 그 끝에서 불꽃 같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타오를 듯 솟아오른 검기가 밀려오는 음양의 기운을 밀쳐 냈다.

쾅!

두 기운이 서로 충돌하며 비무대 바닥을 크게 휩쓸었다.

콰앙!

다시 한번!

콰아아아앙!

또 다시 한번!

충돌이 거듭될수록 운검의 몸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박혀 들 것처럼 기울어졌다.

하나 결코 무릎을 꿇거나 쓰러지진 않았다.

밀려오는 기운에 상처를 입어도, 충돌할 때마다 깎여 나가듯 허물어져도 운검의 두 다리는 처음처럼 굳건하게 땅을 딛고 있었다.

“…….”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백천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꽉 쥔 주먹에선 어느새 맺힌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운검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숙!’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그의 심정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운검이 제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확연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건 조악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그저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천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렸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이 비무를 지켜보는 화산의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비장함이 어려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광경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언제고 밝은 얼굴을 유지하던 조걸도, 아직은 화산의 의기를 마음 깊이는 이해하지 못하던 당소소도, 심지어는 스스로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유이설마저도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운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꾸욱.

선두에서 비무대를 바라보던 청명도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아해야.’

잃은 것이 너무 많구나.

운검의 마음이 어땠을지 청명만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스스로 굳게 믿었던 것을 한순간에 잃는 마음을 누가 그만큼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운검은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그저 다시 정진하고 또 정진했을 뿐이다.

제자들에게 배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다시 걸었을 뿐이다.

그 모든 걸 버티며 선 등을 보고 있으니, 가슴을 차고 오르는 감정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사형.’

제가 틀렸습니다.

제가 화산을 다시 이끈 게 아닙니다.

애초부터 여기에 있었습니다.

화산의 혼이.

청명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훌륭하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건 시대를 넘어 화산의 혼을 이은 후대에게 전하는 선대의 울림이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의식이 점차 흐릿해졌다.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순간순간 의식이 날아가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쿵!

커다란 충격이 연신 몸을 때려 대지만, 정신이 다시 들기는커녕 자꾸 흐려지기만 했다.

‘내가 뭘 하고 있었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검은 여전히 허공을 그어 내고 있다.

의식이 멀어져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의지가 꺾일 듯 흔들려도.

평생을 그려 온 투로는 여전히 그와 함께 있다. 의식하지 않아도, 의지를 담지 않아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검을 펼쳐 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음과 양이 서로 충돌하며 거력을 자아냈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힘이 운검을 고스란히 덮쳤다.

꽉 다문 입을 비집고 다시 한번 핏덩이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덕분에 되레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강하구나.’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무당은 여전히 높은 산이었다. 어쩌면 그는 평생을 고련해도 무당을 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우우우웅!

금방이라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듯 격렬하게 흔들리던 검이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검은 정직하지.’

울부짖는다고 해도, 악을 쓴다고 해도 불가능하던 게 갑자기 될 리는 없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소리치는 게 아니라 쌓아 올려야 한다.

‘하루를 쌓고, 또 하루를 쌓아…….’

그리하여 언젠가는 도달하는 것.

그게 검수가 가야 할 길이다.

우우우우우우웅!

검이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맑은 검명을 토해 냈다.

‘놀자꾸나.’

검이 흐른다. 밀려오는 검기를 타듯, 바람에 얹혀 노닐 듯.

전신을 압박하던 압력도 어느새 사라지고, 귀를 찢을 것 같은 굉음도 멀어졌다.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손에 잡힌 검의 감촉.

무엇을 전해야 할까?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 것도 잠시, 운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하나뿐이지.’

그는 양다리를 살짝 벌리며 단단히 바닥을 내디뎠다.

힘을 뺀 무릎이 자연스레 살짝 굽혀졌다. 마치 여전히 오른손이 있는 것처럼 양어깨를 내밀어 검을 앞으로 고정했다.

중단세.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자세.

비로소 맑아진 그의 시선에 날아드는 음양의 검기가 또렷하게 보였다.

흑과 백, 두 마리 용이 뒤엉키며 날아오는 것과 같은 장엄한 기세였다.

“시작은 언제나 하나.”

하지만 그의 검은 침착하게, 천천히 들렸다.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린 검이 등을 향해 늘어뜨려졌다.

한껏 올라갔던 검이 그의 모든 것을 담아 아래로 내리쳐졌다.

내려치기.

그가 처음으로 배운 것.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가르친 것.

그 끝은 모두가 다르지만, 시작은 모두가 같으리라.

이것이 그의 원형이며 화산의 원형이었다.

언제고 화산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날이 오리라. 하나 또 언젠가는 그 찬란한 이름을 잃고 쇠락하는 때도 올 것이다.

하지만 고사리손으로 목검을 꼭 잡고 휘두르는 아이들의 맑은 기합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화산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촤아아아아악!

장대한 검기를 실은 내려치기가 음과 양을 갈랐다.

“하아아아압!”

“타아아앗!”

두 검수의 전력을 실은 고함과 함께, 거대한 기의 폭풍이 비무대 위를 휩쓸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지만, 화산의 제자도, 무당의 제자도 결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반드시 두 눈에 이 비무를 새겨 넣겠다는 듯, 밀려오는 기운을 전신으로 받아내며 버텼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검고 흰, 그리고 푸른 기운이 어우러지듯 하늘로 솟구쳤다.

돌풍이 강풍이 되고, 그 강풍은 이윽고 잔잔한 산들바람이 되어 가라앉았다.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 고인 공간에 오직 두 사람의 옅은 숨소리만이 손에 잡힐 듯 울렸다.

운검. 그리고 무각.

두 사람이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운검이었다.

스르릉.

그는 천천히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 하나 남은 손을 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모양만 보아도 그 손을 내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심력이 소모되는지 알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힘이 빠져 허공으로 툭 떨어질 듯한 손이 기어코 앞으로 뻗어졌다.

“잘…… 배웠……습니다.”

무각은 주저 없이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양손을 내밀어 더없이 정중하게 포권 했다.

“정말…… 정말 잘 배웠습니다, 도장.”

무각의 목소리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운검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털썩.

“도장!”

“사숙!”

“사숙조!”

무각이 황급히 몸을 날려 그를 부축했다. 그와 동시에 화산의 제자들도 너나없이 비무대 위로 달려왔다.

“쿨럭.”

운검의 입에서 밭은 기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사숙! 괜찮으십니까?”

“관주님! 내, 내상이…….”

흐려진 시야로 제자들의 얼굴이 그득그득 차자 운검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꼴…….”

“…….”

“꼴사납……지는…… 않았느냐?”

그 물음에 운검의 손을 잡은 백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고였습니다, 사숙.”

운검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구나…….”

그러더니 안심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옆으로 축 늘어졌다.

“사, 사숙조!”

“요란 떨 것 없다.”

당황한 제자들을 말리며 백천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을 잃으신 것뿐이다.”

“…….”

그리고 운검을 안아 들었다. 비무대를 내려가기 전 무각을 향해 살짝 목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숙을 부축해 주신 것, 화산의 제자로서 감사드립니다.”

“무량수불.”

무각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요.”

“…….”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인 백천이 몸을 돌렸다.

품에 들린 운검의 몸이 너무도 가벼웠다. 그 사실이 백천을 괜스레 서글프게 했다.

“기억해라.”

“…….”

“너희가 뭘 보았는지.”

그의 무거운 목소리에 화산의 제자들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운검을 안아 든 백천을 필두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모두 어깨를 당당하게 편 모습이었다.

그들은 화산의 문하이고, 또한 운검의 제자다.

비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청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때로…….”

미소 맺힌 입꼬리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승리보다 값진 패배도 있는 법이지.”

이 패배는 화산 제자들의 가슴속에 확연히 남을 것이다.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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