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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30화 (628/1,567)

630화.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5)

넘실거리는 푸른 검기를 붉디붉은 검기가 막아 냈다.

하지만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푸른 검기를 온전히 모두 막아 내기에 붉은 검기는 너무도 미약하여 힘겨워 보였다.

“사숙.”

백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깨물었다.

- 오늘부터 내가 네 스승이란다.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네던 운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그때 백천의 눈에 운검은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사람이었다.

드넓은 어깨는 모든 것을 포용해 줄 것만 같았고, 단단한 입매에는 확고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운검의 그런 인상은 그라는 사람을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단 하루도 자신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검을 빚어 사람을 만든다면, 저런 모습이 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동경했던 사람. 지금도 동경하는 사람.

‘사숙…….’

어디선가 나직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꾹 참아 보려 애는 쓰지만, 결국 참지 못하여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신음과도 같은 울음소리.

모두가 운검이 저 자리에 어떤 심정으로 서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차오르는 눈물에 시야가 흐려져도 눈을 떼지 않았다. 턱이 절로 덜덜 떨리고,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 와도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단순한 비무가 아니었다.

운검의 외침이었다. 늘 그래 왔듯,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들에게 보여 주는 운검의 가르침이었다.

제자가 되어 어찌 스승의 가르침에서 시선을 뗄 수 있겠는가?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주먹을 움켜쥔 백천이 눈을 부릅떴다.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이토록 격정에 찬 제자들 사이에서 오직 운암만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운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제.’

검기가 거칠었다.

검날보다도 더 날카롭게 정제되었던 과거의 검기가 아니었다. 거칠고, 부자연스럽고,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덜컥댄다.

마치 비바람에 낡아 버린 물레가 끼긱거리며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사제. 그게 뭐가 문제겠는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이는 여전히 운검인 것을.

운암은 안다.

높은 산에서 굴러떨어진 이가 부러진 다리를 끌며 다시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렇기에 지금 운검의 검이 과거 운검의 검보다 몇 배는 더 대단하다는 것을 말이다.

- 저는 언젠가 화산제일검이 될 겁니다.

‘지지 말게, 사제.’

오래도록 봐 왔던 등이 왜 이토록 애처로운지. 검을 들고 있을 때면 언제고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했던 그 등이 지금은 한없이 처연해 보였다.

하나 운암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느낌을 부정했다.

‘싸우는 이를 동정하지 마라.’

그건 검을 들고 있는 이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운검의 승리를 믿는 것.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저 믿는 것뿐이었다.

가가가각!

검 끝이 갈려 나가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건 청명이 제작해 온 한철검이었다. 좌수검을 써야 하는 운검을 위해 특별히 무게 배분부터 손잡이의 방향까지 세심히 신경 써 만든 물건.

운검은 알고 있었다. 청명이 어떤 심정으로 이 검을 만들어 왔는지.

그런데 어찌 이 검을 들고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파아아아앗!

밀려오는 검기가 넘실대며 그의 전신을 노리고 들었다.

‘느리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마음이 일면 자연히 움직이던 검이 이제는 생각하는 것보다 반 박자 늦게 도달한다.

좁힐 수 없는 간극과 어찌할 수 없는 위화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건 다른 말로는 ‘절망’이라 불러야 할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운검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무당의 제자가 아니라 그를 뒤덮고 있는 절망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다면…….

덜덜 떨리는 검을 부여잡은 운검의 입가에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운검의 고개가 화산의 제자들 쪽으로 살짝 돌아갔다. 물론 시선을 돌릴 순 없으니 시야에 담을 순 없지만 마음만은 전해지리라 믿었다.

‘녀석들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끌어 주는 이가 있고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이제껏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며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하나 그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는 없다.

언젠가는 그의 제자들도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나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조우하고, 넘을 수 없는 드높은 산을 직면해야 할 것이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산을 말이다.

‘나는 못난 스승이지.’

이제 그는 저들에게 더 가르칠 검이 없다.

백천을 비롯한 몇은 이미 그를 뛰어넘었고, 다른 이들도 곧 그를 추월해 나갈 것이다. 이제는 그가 저들에게 배워야 할 입장이다.

콰드득!

미처 막아 내지 못한 검기가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어깨의 살을 파고든 검기가 뼈를 부러뜨렸다.

‘그러니 잘 봐 두거라.’

그럼에도 그가 아직 저들의 스승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아직 검을 제외하고도 저들에게 가르칠 게 남았기 때문이다.

‘세상이란 언제나 혹독하단다.’

나는 너희의 앞에서 그 칼바람을 막아 줄 수 없다. 더는 지키고 이끌어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절망을 버텨 내는 법 정도는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다.’

헤맬지언정 굳건히 땅에 발을 붙이고 나아가는 방법을 보여 줄 수 있다.

파아아앗!

세차게 뿜어져 나온 붉은 검기가 밀려오는 검기의 파도를 갈라 냈다.

여전히 거칠기 그지없는 검기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쿵!

운검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것과 같다.’

높은 파도를 한 번 이겨 낸다 해서 끝이 아니다. 파도는 언제든 또 밀려오고, 다시 밀려드니까.

‘그러니 흔들리지 말거라.’

굳건하게 발을 붙이고 이를 악문 채 버텨야 한다.

결국 파도란 스쳐 가는 것. 그저 몸을 훑고 밀려가 사라진다.

절망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지금은 버텨 내기 힘겹고 이가 갈리도록 고통스럽다 해도 언젠가는 스쳐 지나간 파도처럼 으스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버텨 내라.

혼자서 힘겹다면 내가 그 등을 받쳐 줄 테니, 두려워할 것 없다.

콰아아아아아!

그 순간 밀려오던 푸른 검기가 두 배는 높이 치솟았다. 운검이 뿜어낸 검기가 푸른 검기에 휩쓸려 무너지고, 이윽고 운검의 몸마저 밀려든 검기에 얻어맞아 튕겨 나간다.

그 와중에도 검은 놓을 수 없으니 몸을 받칠 팔이 없었다. 운검의 육체는 속절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사숙!”

“사숙조오오오오!”

“관주님!”

멍멍한 귓가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파고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운검은 멍하니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르겠군.’

그도 명확히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싸우고 있는지.검수로서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함인지. 화산이라는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게 아니면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인지.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콰득!

검이 바닥에 꽂혔다.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킨 운검은 또렷한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검기에 휩쓸리며 깊게 베인 상처들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운검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럼에도 그의 다리는 굳건하게 다시 바닥을 디뎠다.

그 모습에 무각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승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이미 난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운검이 빙그레 웃었다.

“죄송하지만 본도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소. 조금만 더 같이 어울렸으면 좋겠구려.”

“……그러시다면.”

무각이 표정을 굳히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쇄애애애액!

섬전과도 같은 쾌검이었다.

뿜어져 나온 검기가 일순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운검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카앙!

운검이 몸을 비틀며 날아드는 검기를 쳐 냈다.

하나.

파아아앗! 파아아아앗!

무각의 검기는 그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연이어 발출되어 운검의 전신을 노렸다.

카앙! 카아앙! 카앙!

검기를 막아 낼 때마다 몸이 한 자씩 뒤로 밀려났다. 검기는 막아 냈을지언정 그 검에 실린 힘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거듭 검기를 막아 내던 운검의 몸이 끝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도로 엎어졌다.

콰당!

한 팔이 없는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탓에 균형을 잡는 데 실패한 것이다.

꾸우욱.

검을 움켜잡은 운검의 주먹이 바닥을 내리눌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하나 남은 팔.

하지만 그 팔로도 용케 몸을 지탱한 그는 다시 꾸역꾸역 일어섰다. 검을 잡은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만은 처음 비무를 시작할 때처럼 그저 담담했다.

그 얼굴을 보던 무각은 저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고 말았다.

“……왜?”

이자는 왜 이렇게까지 다시 일어나는 건가?

승부는 이미 났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얻겠다고 저토록 몸을 혹사시킨단 말인가?

무각은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요?”

“…….”

“고작 해야 비무가 아니오. 비무에서 진다고 한들 누가 그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겠소?”

“비난이라…….”

웃어 버리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은 운검은 무각을 바라보았다. 그런 운검의 얼굴에 악의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살아가다 보면 말이오.”

“…….”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오.”

“…….”

“잃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져 길을 잃을 때도 있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각은 그 뜬금없는 말을 잘라 세울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어찌해야 하는지 아시오?”

“……어찌해야 하오?”

운검이 고개를 내저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소.”

“…….”

“그저 걸어야지. 다시 일어서 걸어야지. 무릎이 까져 아파도, 발목이 삐어 시큰해도, 그저 다시 일어나 걷는 수밖에 없소이다.”

“도장…….”

“이보시오, 도장.”

운검이 검을 들어 올렸다.

“제자들에게 삶을 이겨 내고 걷거라 말해야 하는 내가 고작 이 정도에 엄살을 부리라는 거요?”

“…….”

“살다 보면 산중턱에서 포기해야 할 때도 있소이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건 아니오. 포기했다면 다시 오르면 그만이오. 진짜 포기는 산을 내려가는 것도, 굴러떨어지는 것도 아니오. 다시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는 순간이 진짜 포기인 법이지.”

무각은 알 수 있었다.

이자의 말은 무각에게, 심지어 운검 스스로에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비무를 지켜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괘념치 말고 오시오. 나는 화산의 검수요. 화산의 검수는 이 정도로 좌절하지 않소.”

무각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그대의 이름을 다시 여쭤도 되겠소?”

“화산의 운검.”

“운검…….”

무각이 낮게 탄식했다.

‘장로님. 우리가 틀렸습니다.’

화산에 후기지수밖에 없다는 그 말은, 이끌어 줄 윗대가 없다는 말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가 제자들의 등을 받쳐 주는데 어찌 화산의 일대제자들이 무력하다 하겠습니까. 화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건 되레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 무당이…….

무각은 이내 허리에 묶여 있던 검집을 풀어내어 바닥에 툭 내던졌다.

검수가 검집을 버린다는 것은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 하지만 지금 이 행위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앞에 선 이가 생사를 두고 싸워야 할 정도의 상대라는 뜻. 이는 상대에 대한 더없는 존경의 표현이었다.

“나는…….”

무각이 단호한 눈으로 운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절대 그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오.”

“감사하외다.”

“최선을 다하겠소. 각오하시오.”

“얼마든지.”

무각이 숨을 골랐다.

그의 검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과 같은 검기가 아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호가 허공에 그려졌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번뇌를 끊는 칼.

무당의 최고 절기.

비무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이 검을 상대에 대한 더없는 공경의 표시로 펼쳐 내었다.

검이 허공에 그려진 둥근 원을 가만히 갈랐다.

세상의 시작은 일원(一元)이 음과 양으로 나뉘는 것. 근원을 담은 검이 비무대 위에서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흑과 백으로 나뉜 검기가 웅혼하게 운검을 덮쳐 왔다. 그 검기를 마주한 운검은 매화검을 꽉 움켜잡았다.

‘이상하지.’

손에 쥔 검이 기이하게도 따뜻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검의 손잡이를 타고 한 줄기 미세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 관주님!

운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화산에 피어난 숱한 매화 속에서 아직 어린 그의 제자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너희는 나를 뛰어넘어 세상으로 나가겠지.’

그러니 그 전까지는…….

나의 검이 너희의 그늘이 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이윽고 운검의 검이 거대한 나무를 그려 냈다.

세상 가득 가지를 뻗어 편히 쉴 그늘을 만들어 줄 거목.

운검이 만들어 낸 그늘은 어쩌면 조금 따뜻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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