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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29화 (627/1,567)

629화.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4)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꽤 오랜 시간 검을 익혀 왔고, 나름의 길을 관철해 왔음에도 운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제대로 된 비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자리가 그의 생에 제대로 된 첫 비무였다.

그런 상황에 그가 느끼고 있는 심정은 뭐랄까…….

‘조금 설레는군.’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비무였다면 긴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비무는 그의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저…….

비무대 위에 올라선 운검이 상대를 마주 보았다.

“화산의 일대제자 운검입니다.”

“…….”

건너편에 선 무각이 운검의 비어 버린 소매를 응시했다.

“일대제자라…….”

무각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다 말했다.

“화산 일대제자가 비무에 나설 줄은 몰랐소이다.”

운검은 조금 겸연쩍은 낯으로 볼을 긁적였다.

“제자들의 명성에 기대 호강을 누리는 못난 사람이기는 하지만, 검을 휘두를 줄은 아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무각은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 있는 팔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분명 처음에는 우수로 검을 익혔을 것이고, 어느 순간부터 좌수검을 익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 화산 일대제자들에 대한 평가. 거기에 좌수검까지. 어느 하나 높이 평가할 요소가 없다.

하나…….

‘만만한 이가 아니군.’

풍기는 기세만큼은 그 모든 요소를 누르게끔 하기에 충분했다.

새벽의 산처럼 고요하다.

‘검수’라는 이름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였다.

무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더는 질 수 없다. 무당은 지금 벼랑 끝에 선 거나 다름없었다.

“무당의 일대제자 무각입니다.”

“화산의 일대제자 운검입니다.”

검을 뽑아 기수식을 취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꾸욱.

백천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변한 손바닥 위로 땀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운검 사숙.’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과히 긴장한 얼굴로 비무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제가 나갔어야 하는 건데…….”

백상이 울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 운검까지 나서게 만든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백천은 단호히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망설이지 않았다 해도 결국에는 사숙께서 나서셨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예, 사형.”

백천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긴장, 아니. 이건 걱정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운검이 패할 것을 두고 걱정하진 않는다. 설사 제대로 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한다고 해도 화산 제자 중 누구도 감히 운검을 괄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이가 있다면 백천부터 참지 않을 터였다.

다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전보다 못한 자신의 검을 직면해야 할 운검이 받을 마음의 고통이었다.

운검은 하루도 쉬지 않고 정진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우수를 잃고 무위를 잃었다는 게 어떤 의미였겠는가?

“사숙…….”

결국 참지 못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다. 적의 창에 꿰뚫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운검의 모습이 말이다.

운검의 빈 소매는 그들의 나약함의 산물이자, 그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대들의 노력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지켜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백천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에게 운검은 언제나 드높은 산과 같았다. 이렇게나 강해지면서도 누구 하나 운검을 뛰어넘었다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때문에 저 빈 소매가 너무도 아프고 서글펐다.

“사숙이 팔만 잃지 않았어도…….”

누군가의 작은 중얼거림이 다른 화산의 제자들의 귀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묵묵히 앉아 있다 획 돌아본 청명이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이 햇병아리들이…….”

“…….”

“사형들이 그렇게 걱정할 사람 아니야. 잔말 말고 그냥 지켜보기나 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린 그는 다시 운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딱히 크지도, 그렇다 하여 작지도 않은 평범한 등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운검의 등을 보며 청명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어색하군.’

운검은 좌수로 검을 꽉 움켜잡으며 생각했다.

한때는 검이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던 시기도 있었다.

검이 내가 되고, 내가 검이 되는 경지였다.

하지만 자연스레 검을 받아들이던 그의 오른손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쥔 검은 여전히 어찌할 수 없는 위화감을 안겨 주었다.

어쩌면 이 위화감은 평생,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검을 신체의 일부처럼 여겼던 그 순간은 그의 생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후.”

짧게 숨을 내쉰 그는 검을 잡은 손에 안정적으로 힘을 주고는 말했다.

“오시오.”

무각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탓!

바닥을 박찬 그의 몸이 쾌속하게 운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카아아앙!

허공에서 검과 검이 충돌했다. 검신을 통해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이 운검의 몸을 크게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파아아아앗!

힘으로 내리눌러 운검의 자세를 흐트러뜨린 무각은 검을 재빠르게 회수하는 동시에 벼락처럼 다시 내질렀다. 일순 여러 갈래로 갈라진 검기들이 운검의 사방을 찌르고 들어왔다.

카앙! 카앙! 카앙!

날아드는 검기를 쳐 낸 운검이 뒤쪽으로 보법을 밟는다.

내리는 비는 우선 피하고 봐야 하는 법. 상대가 기세를 올릴 때는 적당히 물러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 무각 역시 운검을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물러나는 운검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짓쳐 들어왔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피이이잉!

검 끝이 대기를 찢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무당답지 않은 날카로운 쾌검이 운검의 몸 중심부를 노리고 들었다.

“흡!”

그 공격적인 움직임에 짧은 호흡을 토한 운검은 날아드는 검을 위로 후려쳤다.

쾅!

간결한 폭음과 함께 검이 위로 튕겨 올라가는 순간, 무각이 검의 힘을 따라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솟아오른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낙하하여 운검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채애애애앵!

운검은 빠르게 매화검을 들어 강하하는 무각의 송문고검을 막아 냈다.

검과 검이 맞닿아 서로를 밀어 냈다.

매화검을 든 운검의 왼팔이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상대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모든 힘을 실어 내리누르고 있다. 그 힘을 한 팔로 감당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가 부러질 것처럼 맞물렸다.

그그그그극.

검과 검이 마찰하며 소름 돋는 소리를 자아냈다. 그런데 그 순간.

화아아악!

맞닿은 무각의 검에서 물과 같은 검기가 폭포처럼 뿜어져 나왔다. 운검의 두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타아아앗!”

기합을 내지른 무각이 힘을 실어 운검을 밀쳐 날렸다. 그 힘을 버티지 못한 운검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굴렀다.

“사숙조!”

“빌어먹을! 사숙!”

화산 제자들답지 않은 높은 비명 소리가 비무대까지 들려왔다. 그 비명 속에서 몇 번이고 구른 운검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워 다시 자세를 취했다.

“흠.”

이번 교환에서 확연한 우위를 점한 무각은 운검을 연이어 몰아치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운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잠시 머뭇거린 그는 말했다.

“좌수검이 그리 익숙지 않아 보이오.”

운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됐소이다.”

“안타까운 일이오.”

그 말이 진심인 듯 고개를 내젓는 무각의 얼굴엔 실로 안타까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대가 우수를 잃지 않았다면 정말 좋은 승부가 되었을 것을. 아쉽고 또 아쉽구려.”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건 도발이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도발보다 더 아프게 사람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때로는 악의 없는 위로의 말이 악의 가득한 비난보다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검은 딱히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하지만 나는 잃은 것에 미련을 두는 성격은 아니외다. 내가 가진 것이 왼손뿐이라면, 그것으로 최선을 다해야겠지.”

“……좋은 자세요.”

운검과 무각이 다시 자세를 잡는다.

호수처럼 고요한 기세로 자신을 압박해 오는 무각을 보며 운검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이 늘었어.’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여전히 미련은 남았다. 아니, 남다 못해 그득하다.

아직도 꿈속에서 그는 익숙한 우수로 검을 휘두른다. 불현듯 깊은 잠에서 깨면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움직이려다 멍해질 때가 있다.

낮아진 무위.

낯설어진 삶.

사람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에는 절망하지 않는다.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잃었을 때, 그리고 잃은 것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온 마음으로 절망하는 법이다.

운검의 눈이 화산의 제자들을 한차례 훑었다.

걱정 어린 시선, 어찌할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거라.’

그 사이에서도 가장 낯선 얼굴로 전전긍긍하는 건 다름 아닌 운암이었다. 언제나 침착한 도인의 낯이었던 운암이 난생처음 보는 표정을 지은 채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사형.’

그래. 한때 그랬었다.

그들이 아직 꿈이라는 것을 놓지 않았던 시절.

새벽까지 이어지는 수련에 지쳐 벽에 기댈 즈음이면, 운암이 때때로 찾아와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언젠가 운암은 화산의 장문이 되고, 그는 화산제일검이 되어 사문이 잃은 명성을 되찾으리라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래. 그렇게 다짐했었다.

이제는 빛이 바래 버린 약속이지만.

- 운검아. 나는 장문의 자리에 오르지 않을 생각이다.

‘사형…….’

그래. 빛이 바랬다.

운암은 후대를 위해 장문의 자리를 포기했고, 그는 다시는 화산제일검의 자리를 노릴 수 없을지 모른다.

긴 어둠을 버텨 낸 선대와 빛나는 명성을 쌓아 가는 후대.

운자 배들은 그 사이에서 그저 그 둘을 이어 주고 있을 뿐이다.

“가오!”

무각의 새파란 검기가 비무대를 뒤덮듯 뿜어졌다.

실로 광활하고 더없이 장엄하다.

생생한 무각의 검기를 보고 있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저 검에는 여전히 빛이 찬란히 머금어져 있다.

바래 버린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바랬다고?’

운검의 검이 붉은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도 알고 있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찬란한 시절도.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차 있던, 그 푸르던 젊음도.

노력하면 언제고 이루어질 거란 순수한 희망도.

빛이 바랜 그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

‘내 검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휘둘러야 한다 해도.

이제는 결코 그가 목표로 하던 곳에 닿을 수 없다고 해도.

평생을 휘둘러 온 매화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다.

“아아아아아아!”

억눌린 고함을 토해 낸 운검이 노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검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약해졌다는 게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되는가?

발목을 부여잡고 질척거리는 이 미련이 발을 떼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지켜보십시오, 사형!’

바랬다 해서 사라진 건 아니다. 말라비틀어진 가지도 꽃을 피운다.

운검의 검 끝에서 솟아오른 검기가 세상을 향해 토해 내는 울분처럼 붉게 피어올랐다.

그는 여전히 여기에 서 있다.

여기에…….

바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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