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3)
무당의 분위기는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을 만큼 침체되었다.
사 연패.
아니, 냉정하게 말하면 오 연패다.
이 비무가 벌어지기 전에 누군가가 무당이 화산에게 내리 다섯 번을 질 거라고 말했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아마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 여겨 그저 웃어 버렸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 무당의 제자들은 상식이라는 것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무지라는 걸 절절히 실감했다.
하나 무당의 제자들의 심정이 제아무리 참담하다 해도 허산자가 느끼고 있는 절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우득.
그의 입에서는 숫제 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굴욕감에 몸서리를 치고서야, 허산자는 왜 선대들이 그토록 화산이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이해했다.
허산자를 비롯한 이들이 보기에야 그저 몰락한 문파였으나,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의 선대들은 화산이 어떤 곳이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까.
어린 시절 이와 같은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았다면, 몰락한 문파라 한들 심장에 박힌 비수처럼 여기고도 남음직했다.
‘같은 도가라…….’
산 하나에 두 마리 호랑이가 살 수 없음을 허산자라고 몰랐겠는가.
같은 길을 걷는다 해서 하하호호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일이다. 오히려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서로 으르렁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산자는 고개를 돌려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울분을 짓누르며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이제 됐다.”
“……예?”
“굴욕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 이겨서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면 그만이다.”
무진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장로님. 아직 화산신룡이 남아 있습니다.”
“화산신룡은 이번에 나오지 않는다.”
“……예?”
허산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화산 쪽을 일별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화산신룡은 맥없는 패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청명에 대한 정보는 숱하게 들었고, 성향에 대해서도 파악을 마쳤다.
“그가 지금 나오게 된다면, 다섯 번을 이기고, 나머지는 내리 지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 터. 그는 절대 그걸 용납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맥을 끊으려 할 거란 뜻이시군요.”
“그렇다. 그게 아니라면 마지막에 나서서 앞의 패배들을 일거에 날려 버리려 들겠지.”
만일 청명을 잘 아는 이들이 들었다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만큼 허산자의 분석은 나름 정확하고 예리했다.
“하면…….”
“그래.”
허산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제 저쪽에서는 우리를 상대할 이가 없다는 뜻이지.”
어차피 십 선승이라는 규칙을 정할 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검이라 불리는 다섯은 무당과 승부를 겨룰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절대 무당의 일대제자를 상대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남은 승부를 어떻게 치르느냐였다.
‘최악의 결과다. 하지만 그건 상정 범위 내일 뿐이다.’
다섯 번을 연달아 지면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남기기는 했지만, 앞으로 무당이 연승을 해낸다면 그 충격도 어느 정도는 가실 터. 그렇다면 승부에서 이겼다는 결과만은 지킬 수 있다.
“나서거라.”
허산자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남은 승부에서 완벽하게 승리해야 한다. 마지막에 나올 화산신룡은 따로 상대할 이가 있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보다!”
허산자가 살기까지 감도는 눈으로 제자들을 돌아보았다.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목적은 화산을 이기는 게 아니다. 화산에는 중진이 존재하지 않고, 후기지수들만으로는 결코 무당의 이름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만인에게 알리는 것이다.”
“예, 장로님!”
“무자비하게 몰아쳐라.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더없이 빛났으니, 오히려 그게 기둥 없이 처마를 올린 꼴이란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무당의 제자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허산자의 말대로 된다고 해도, 그들이 소기에 달성하려 했던 목적은 이미 망가졌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기에 더는 빼앗길 수 없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것이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허산자는 앞으로 나선 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무각(無覺).”
무각이라면 나쁘지 않다. 비록 무당삼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크게 뒤지지도 않았다. 무자 배들 중에서도 나름 상위에 있는 실력자니까.
“기세를 꺾고 오거라.”
“예!”
무각이 단호한 얼굴로 비무대에 올랐다.
“……그러니까.”
백천이 제자들을 쭉 둘러본다.
“……어떻게 하지?”
내보낼 이가 없다. 백천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나 허리가 없었나?’
사실 이건 화산의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영약을 과다 복용(?) 하고 수련을 과로사 직전까지 해 댄 정예청명병(?)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검과 비하자면 손색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 손색이 좀 심하지.’
막말로 저들 다섯이 달려들어도 윤종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니까.
이 극단적인 실력차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 온 길이었건만, 하필이면 그 와중에 무당과 비무가 벌어진 것이다.
“야, 청명아.”
“응?”
“너는 안 나가냐?”
조걸의 물음에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긴 할 텐데, 내가 지금 나가면 그 뒤엔?”
“……그렇지.”
그나마 등 뒤에 청명이라도 버티고 있으면 나가서 싸우는 이들도 부담을 좀 덜겠지만, 청명마저 승부를 내고 돌아와 버린다면 그 후에 나서는 이들의 부담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럼…… 소소를……. 끄응.”
백천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소소는 강하다. 심지어 북해에서 험난한 전투를 겪으며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소가 무당의 일대제자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은 실력이 조금 모자랐다.
“그럼 어…….”
백천의 고개가 좌우로 돌 때마다 제자들이 움찔움찔 목을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너…….”
“사형.”
지목당하기가 무섭게 백상이 빙긋 웃었다.
“저는 재경각에 투신한 몸입니다. 칼질 같은 건 할 줄 모릅니다.”
“……자랑이다, 이 새끼야.”
백천이 막막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두가 자신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일대제자와 이, 삼대제자들이 비무를 한다는 것부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걸 기어코 해내다 못해 승리까지 거머쥔 오검들이 이상한 거지, 이들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끄응. 두어 명만 더……. 응?”
그때 여기저기를 방황하던 백천의 눈길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검은 무복들 사이에 뭔가 노릇노릇한 것이 눈에 띈 것이다. 고개를 살짝 더 들어 보니 뭔가 반질반질한 것이…….
“스님?”
“어? 혜연 스님?”
“계셨습니까?”
“나는 따라온 줄도 몰랐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타오르며 시뻘게졌다.
“아, 아미타불. 혼자 남아 있기 멋쩍어서…….”
애초에 그는 화산과 무당이 비무를 하는데 소림 출신인 자신이 껴 있으면 모양이 이상해진다며 홀로 상단에 남았었다.
그런 그가 슬그머니 제자들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스님……. 어, 혜연 스님…….”
무어라 말을 하려던 백천이 갑자기 눈에 불을 켜며 고개를 획 돌리더니 청명에게 물었다.
“혜연 스님은 비무에 못 나가나?”
“……님. 돌으신……?”
“아, 아니, 화산의 식객이라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 세가 같은 데는 식객도 세가원으로 인정해 주잖아.”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차라리 저 민머리에 먹칠하고 검을 쥐여 주는 게 낫겠다! 그럼 매화 못 피워도 연꽃이라도 피우겠지! 지가 명색이 중인데!”
청명이 눈을 부라렸지만, 이번에는 백천도 지지 않았다.
“내보낼 사람이 없어서 그렇잖아, 내보낼 사람이! 그러니까 왜 대책 없이 앞에 애들을 다 몰아서 내보냈냐고!”
“대신에 이겼잖아!”
“그게 문제냐, 이 새끼야?”
“아, 아미타불…….”
두 사람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으르렁대자 혜연은 어쩔 줄을 모르고 불호를 외어 댔다.
그리고 그 순간.
비무대 위로 한 사람이 올라와 화산의 진영을 향해 포권 했다.
“무당의 무각입니다. 어느 분께서 제 상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
백천의 얼굴에 암담함이 어렸다.
이제 더는 시간을 끌 수 없다.
‘소소? 아니면 백상? 그것도 아니면 곽회나……. 백무.’
누구를 가져다 대도 확실하게 이기겠다 싶은 이가 없었다.
안다.
어차피 결과는 나와 있다. 그럼에도 백천이 고민하는 이유는, 연승이 끊기는 첫 패배를 그 누구도 감당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조금이라도 더 담대하여 그 패배에 상처받지 않을 이를 내보내고 싶었다.
“상아!”
백천의 얼굴이 단호해졌다.
“네가 나가거라.”
“저, 저 말입니까?”
백상은 난처한 얼굴로 백천을 보며 말했다.
“사형께서 말씀하신다면 나가겠지만…… 솔직히 큰 자신은 없습니다.”
“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는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패배에도 나름의 격이 있는 법이다. 화산 제자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거라.”
“……예, 사형.”
백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무대로 향하려는 그 순간.
“아니다.”
누군가 담담한 목소리로 백상의 발을 잡았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입을 연 이를 돌아보았다.
“상이가 아니지. 내가 나가는 것이 맞다.”
“사, 사숙?”
“관주님?”
운검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 모두 눈을 부릅떴다.
“과, 관주님…….”
“왜들 그러느냐?”
그 반응이 이상하다는 듯 운검은 피식 웃었다.
“무당에서 일대제자가 나오는데, 화산의 일대제자인 내가 나서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더냐?”
“…….”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솔직해서, 비어 있는 운검의 오른쪽 소매를 응시하고 말았다.
만일 그의 우수가 멀쩡했다면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운검이 나섰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용기백배했을지 모른다.
하나 지금은…….
“사숙.”
“내가 나가도 되겠느냐?”
백천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 사숙이십니다. 제가 어찌 사숙께서 하시는 일에 입을 데겠습니까.”
“고맙구나.”
운검은 빙긋 웃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살짝 두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때 그 당당한 걸음걸이를 잡아 세운 것은 퉁명스러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괜찮으시겠어요?”
운검이 슬쩍 청명을 바라보았다.
“뭐가 말이더냐.”
“좌수검에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으셨잖아요.”
운검은 이런 반응 또한 예상한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다 해도 검은 휘두를 수 있다. 제자들이 이리 열심히 싸우는데 스승이라는 놈이 구경만 하고 있으려니 영 민망하구나.”
“흠.”
청명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히 지켜볼게요.”
“그럼 더 좋겠지.”
청명을 향해 웃어 준 운검은 걸음을 옮기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아까 백천이 그러지 않았느냐.”
“네?”
“패배에도 격이 있다고.”
“…….”
운검은 비무대 쪽을 응시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 격을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텅 빈 소매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천천히 비무대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의 눈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중함이 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