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2)
스으으읏.
검이 물 위를 누비는 제비처럼 날렵하고 날카롭게 상대를 공략했다.
일견 황홀하기까지 한 검기를 보며 화산의 제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고는 진짜 다르구나.”
“같은 검술이 아닌 것 같아.”
어느새 비무대에 오른 유이설이 상대로 나온 무당의 제자를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햇살 아래서 유려하게 휘둘러지는 그녀의 검은 무당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화산의 제자들마저 경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백천 사숙과는 좀 달라.’
백천의 검은 말하자면 화산 제자들의 이상(理想)과도 같았다.
현재 그들이 익히고 있는 검을 가장 완벽하게 펼쳐 내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 때문에 그들은 모두 백천과 같은 검을 펼쳐 내는 날을 꿈꾸며 지금도 수련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이설의 검은 그 궤를 달리했다.
분명 같은 투로를 그리고, 같은 초식을 펼쳐 내고 있음에도 그녀의 검은 다른 화산 제자들의 검과 그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검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다르되, 그 위력이 부족하단 의미는 결코 아니다. 실제로 그녀를 상대하는 무당의 제자는 지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길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었다.
‘뭔 검이……!’
이 검은 뭔가 이상하다.
더없이 우아하게 허공을 누비는가 싶다가도, 섬뜩할 정도의 살기를 품고 급소를 노리며 쇄도한다.
이전까지 다른 제자들이 보여 준 화산의 검이 화려하고 매혹적인 검기로 사람을 현혹했다면, 이 검은 움직임 그 자체로 시선을 빼앗고 정신을 앗아 가는 것만 같다.
게다가…….
‘어찌 이리 정교한가.’
조금만 검을 섞어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검이 얼마나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한지.
‘대체 같은 투로를 몇 번이나 연습한 거지?’
그가 어찌 알겠는가?
청명이 화산에 도달하기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산에서 가장 검에 미쳐 살던 이가 바로 유이설이었다는 것을.
청명이 화산에 다양한 검법을 전하기 전부터, 유이설은 얼마 남지 않은 화산의 조잡한 검법들을 침식을 잊어 가며 수련했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된 검법을 배울 기회를 잡았으니 어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휙!
더없이 가볍게 상대의 검기를 뛰어넘은 유이설은 고요한 움직임으로 무당의 제자를 향해 검을 찔렀다. 실로 서늘한 기세였다.
“……사고는 사고네.”
조걸은 그 외에 더 할 수 있는 말도 없다는 듯 멍하니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유일하게 백천에게 비견될 수 있는 이가 바로 유이설이다. 백천의 화려한 검은 시선을 강제로 빼앗았고, 유이설의 고요한 검은 폐부를 직접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구나.”
“뭐가 말입니까?”
“다들 같은 검법을 익히고 같은 수련을 했는데도, 검이 이렇게나 다르니 말이다.”
“아…… 그렇죠.”
윤종의 말에 조걸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오검은 지금까지 대개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청명이 그들에게 시킨 수련도 대동소이했고, 각자 개인적으로 수련을 할 때도 딱히 대단히 다른 방식을 취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검의 검에선 각자의 특색이 확연히 드러났다.
“원래 경지가 높아지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청명이 놈이 저번에 그랬잖습니까. 같은 검을 익혀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 특색이 달라진다고.”
“하지만 무당의 검은 다들 대동소이하지 않느냐?”
“으음.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물론 무당의 검도 쓰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다. 하지만 화산 제자들의 검에 비하면 다르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혹시 우리 쪽에 뭐가 문제라도…….”
윤종이 살짝 불안한 어조로 조심스레 입을 떼자 그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게 아니다.”
놀란 윤종이 획 돌아보자 운검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서 있었다.
“사, 사숙조.”
비무대 위로 옮겨지는 운검의 시선은 평소처럼 그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당의 검은 선(善)이 있는 검이다.”
“선(善)이요?”
“올바름이라고 해야겠지. 선인들이 수련을 거듭하고 연구하여 가장 완벽한 투로를 찾아내고,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경지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아…….”
“그러니 모든 검이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지. 한 번의 휘두름에 몇 푼의 힘을 넣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내력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가 모두 정해져 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무당의 검은 완벽을 추구하는 검이다.”
조걸과 윤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반면 화산은 그 검이 정도에서 어긋나지만 않으면, 굳이 틀림을 논하지 않는다. 그건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금까지 검을 펼치면서 운용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쪽이 옳은 겁니까?”
“글쎄다. 나는 잘 모르겠구나.”
운검이 고개를 내저었다.
“경지에 오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때로는 무당이 옳을 수도 있고, 때로는 화산이 옳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무당의 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과거 화산의 검이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명맥이 끊기는 일 없이 쭉 이어져 온 무당과는 달리, 화산의 검은 한 번 그 명맥이 끊어졌으니까. 지금은 그저 비급을 통해 과거 화산의 검이 어땠는지 추론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게 완벽한 화산의 검이라고 알려 줄 수가 없다. 그게 화산 제자들을 가르치는 운검의 가장 큰 아픔이었다.
자유로움과 엄격함 중 무엇이 더 옳은지 그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화산 검의 명맥이 쭉 이어져 왔고, 그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때였다.
“원래 그래.”
“응?”
조걸이 쭈그리고 앉은 청명을 보며 되물었다.
“뭐가?”
“화산 검은 원래 그렇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비급 보면 모르냐?”
청명이 갑갑하다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사형 눈은 뭐 옹이구멍이야? 쓸모도 없는 거 뭐 하러 뜨고 있어. 그 두 눈으로 분명 비급을 봤을 거 아냐?”
“보긴 봤는데…….”
조걸이 어물거리자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조께서 정형화된 운용을 전하고 싶으셨다면, 비급을 조금 더 자세히 썼겠지. 설마 귀찮아서 쓰다 말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니겠지. 아무리 백 년 전이라고 한들 너 같은 사람이 또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칭찬이야?”
“욕이다, 청명아.”
“이씨, 뭐라고?”
청명이 발끈하며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백천이 그의 머리를 잡고 꾹 눌렀다.
“가만히 좀 있어라, 인마! 상황을 봐 가면서 날뛰어야지!”
“그래서 사숙은 상황을 그렇게 잘 봐서 무당 놈들 앞에서 그렇게 각을 잡아 대셨나?”
“잘했지?”
“……그래. 잘했다.”
진짜 잘했으니 뭐 할 말이 없네.
청명이 구시렁거리다 이내 다시 피식 웃었다.
“딱히 옳고 그름을 나눌 일은 아니야. 물은 서로 다른 듯해도 결국엔 한곳으로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커다란 종착점이 존재한다는 거야.”
“음, 그렇지.”
“하지만 매화는 서로 다른 꽃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지. 하나하나가 다르다고 해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야.”
“음.”
“그리고…….”
청명이 고개를 들어 비무대를 바라본다. 어쩐지 그의 눈이 먼 곳을 보는 듯했다.
“결국은 순환이야.”
“순환?”
돌아오는 물음에 청명이 천천히 끄덕였다.
“물은 바다에서 시작해 하늘로 올랐다가 비가 되고 이슬이 되어 다시 산으로 흐르잖아. 물이 내를 이루고, 강이 되어 흐르다 다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
“매화는 열매로 시작해 씨앗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새싹이 되었다가 나무가 되고, 다시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지.”
“그렇지.”
“자연이란 결국 그렇게 순환하고 또 순환하는 거야. 무당도 화산도 결국은 그 순환의 흐름을 사람의 몸을 통해 구현하려는 것뿐이야.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인 거지. 누가 더 우월하다, 어디가 그르다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가만 듣던 윤종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얼빠진 듯한 그 반응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아, 아니. 그, 맞는 말이고 당연한 말인데…… 그게 네 입에서 나오니까 너무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좀…….”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사형이야, 인마!”
백천이 다시금 청명의 정수리를 꽉 눌렀다.
“여하튼.”
청명은 입술을 삐죽대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각자의 방식을 추구하는 거야. 무당이 더 옳을 것도 없고, 틀릴 것도 없어.”
“……이해했다.”
다시 심드렁한 눈으로 비무대를 보는 청명의 뒷모습을, 운검은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녀석도 참…….’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하겠지만, 때때로 그는 청명에게서 사려 깊음을 느꼈다. 지금도 마치 운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고 그리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 주는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르고, 생각 없이 한 말이 그저 얻어걸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운검은 벌써 몇 번이고 청명의 이런 말들 덕에 위안을 얻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순환이라.’
그래. 그거면 됐다.
화산이 추구해야 할 바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검 같은 겉치레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음.’
한편 슬쩍 운검의 눈치를 살핀 청명은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여하튼 소심해 가지고는.’
그저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게, 저 모든 생각들이 결국에는 후인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책하기보다는 되레 기특하다 해야겠지.
화산의 윗대들은 청명이 보기에도 참 잘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이 비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과거에도 이랬지.’
과거 청문이 이끌었던 청자 배는 화산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강자들이 즐비한 배분이었다. 청명이 워낙에 특별할 정도로 강해서 조금 묻힌 감이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들도 웬만한 문파의 고수들은 찜 쪄 먹고 다닐 정도로 강했다.
그게 모두 청명에게 시달린 결과라는 문제가 조금 있긴 했어도…….
어쨌든.
그때의 청자 배들도 검에 각기 고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의 오검이 자신에게 맞는 검을 찾아가는 것처럼, 그때의 매화 역시 각양각색으로 피어났다.
모두 다르지만 결국은 숲을 이뤄 하나가 된다. 그게 매화다.
그리고…… 지금의 오검과 그들을 따르는 이들까지 모두 저마다의 매화를 피워 낼 수 있다면, 화산은 과거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저마다의 매화를 피워 화산의 정경을 만들어 낸다면 실로 장관이리라.
하지만 그 광경을 상상하던 청명의 얼굴은 점차 표정 없이 굳어졌다.
‘순환이라…….’
조금 전 그의 입으로 뱉은 말이었다.
그래. 세상의 이치란 결국 순환에 있다. 생은 사로 이어지고, 사는 또다시 생으로 이어진다. 이는 당연하고도 유구한 이치다.
하지만…….
‘나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 있다는 거지.’
순환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썩고 일그러지는 법.
지금이야 청명의 존재가 화산에게 홍복이겠지만…… 훗날의 화산에도 과연 도움이 될까?
아니, 그 전에…….
대체 왜 순환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된 것일까?
- 어이하여 그리되었느냐. 어이하여…….
달뢰라마의 비통한 목소리가 청명의 뇌리를 스쳤다.
굳은 얼굴로 한없이 깊은 상념에 빠지려던 청명을 강제로 끌어 올린 것은 비무대 위에서 터져 나온 커다란 폭음이었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현실로 끌려든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길지 않았던 비무의 결착이 나 있었다.
“으…….”
바닥에 주저앉은 무당의 제자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유이설을 바라보았다.
하나 유이설은 이런 승리로 기뻐할 이유 따윈 없다는 듯 여전히 무감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잘 배웠어요.”
“……잘 배웠습니다.”
미련 없이 돌아 나오는 그녀를 보며 청명은 히죽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애초에 유이설이 질 거라곤 생각조차 안 했다.
“청명아.”
“응?”
“일단 우리는 다 이겼다.”
“그래야지.”
백천이 안색을 살짝 굳히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셈이냐? 누굴 내보내려고.”
“응?”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냐?”
“응?”
“…….”
해맑아 보이는 청명을 보며 백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아무 생각이 없었어?”
“…….”
청명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수줍게 헤헤 웃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
새삼스레 이 새끼가 얼마나 대책 없는 놈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백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