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1)
포권 하는 자세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차례 비무를 치렀음에도, 백천의 새하얀 무복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그 모습 자체가 완전무결한 승리를 보여 주는 듯했다.
“……이긴 건가?”
“자네는 눈이 없는가? 그럼 저게 진 걸로 보이나?”
“아, 아니, 어이가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저건 말 그대로 찍어 눌러 버린 수준인데.”
관객들은 탄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지금껏 그들은 조걸의 용맹에 찬사를 보냈고, 윤종의 의지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강자’의 입장에 있는 무당을 상대로 선전한 ‘약자’에게 보내는 응원에 가까웠다.
그런데 조금 전 보인 백천의 검은 절대 ‘약자’의 것이 아니었다.
“……화산이 무당을 저리 쉽게 쓰러뜨린다고? 그것도 이대제자가?”
“모르는 소리! 화정검이면 벌써 강호에 그 명성이 자자하지 않은가. 그런 이를 어찌 평범한 이대제자로 취급하는가?”
“명성이 올라가면 배분이 바뀌기라도 하나? 아무리 그래도 이대제자는 이대제자 아닌가!”
“……그건 그렇지.”
관객들의 시선에 황망함이 어렸다.
“진짜 화산이 무당보다 센 건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보게! 벌써 화산이 삼 연승을 했네. 아니, 승부로 치지 않았던 첫 비무까지 포함하면 사 연승이란 말일세.”
“…….”
“한두 번이야 요행으로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 번 연달아 이기는 걸 두고 누가 요행이라 한단 말인가? 이게 운이면 세상에 운이 아닐 일이 뭐가 있는가?”
은근히 무당을 비호하던 이들도 이 말에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비무야 그렇다 치고, 이번은…….”
무어라 말을 하던 이가 흥분을 이기지 못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비무대를 한참 보고서야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이번은 정말로 실력차가 확실한 비무이지 않나.”
“…….”
모두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비무대를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는 바람에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흥 삼아 이곳에 왔다.
저 화산이 정말 무당을 상대로 이렇게 선전할 거란 기대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그런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부수어 놓았다.
“이, 이러다 진짜 화산이 무당을 이기는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
지켜보던 이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중 눈치 빠른 이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설령 화산의 선전이 여기까지라고 해도 이미 일은 벌어졌다.’
지금부터 무당이 내리 연승을 해 낸다 해도, 세상에는 화산이 이룬 사 연승만이 회자될 것이다. 세인들은 약한 문파가 강한 문파를 거꾸러뜨리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니까.
만약 언젠가 화산이 무당을 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그 시작은 분명 이 비무가 될 것이다.
세인들은 긴장 가득한 얼굴로 양쪽의 진영을 응시했다. 실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무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
허산자가 그를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방심해서 한 패배라면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긴장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거라면 따끔하게 나무라거나, 어쩌면 위로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방심도, 긴장도 아니었다. 온전히 실력이 상대에 비해 모자라 당한 패배였다.
당연히 패할 이가 패해 돌아왔는데, 거기다 대고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허산자는 그 어떤 말도 차마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무오를 보기만 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진이 한숨을 내쉬며 허산자 대신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예, 사형.”
“들어가 몸을 추스르거라.”
“……상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담긴 울분을, 무진은 잘 알 수 있었다.
비무에 패했다는 사실보다 패하고 내려왔음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수치스러울 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울분을 위로해야 할 허산자는 지금 직면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기력을 모조리 소진하고 있었다.
“들어가거라.”
“……예.”
무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어깨를 보노라니 무진의 가슴도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로님.”
그는 이를 갈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게 장로님께서 원하시던 결과입니까?”
그는 평생을 무당의 엄한 규율 속에서 살아왔다.
윗사람에게 이치와 옳고 그름을 따져 묻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사태들은 그런 무진의 인내심마저 끊어 놓기에 충분했다.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이젠 명분마저 잃었습니다. 세상은 화산을 칭송하며 무당을 욕할 것입니다.”
무진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차라리 제가 나갔다면 패할지언정 이리 손가락질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장로님께서 원하신 결과가 정말 이런 참혹한 패배였습니까?”
“이놈!”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허산자가 벌컥 고함을 내질렀다.
“어디 무당의 대제자라는 놈이 사문의 어른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대거리를 하느냐! 사문이 네게 그리 가르치더냐!”
허산자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하지만 무진은 외려 그 반응에 더욱 큰 실망감에 빠졌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태도를 두고 꾸짖는 허산자의 말이 그를 더욱 참담하고 암담하게 만들었다.
“흥분할 것 없다.”
“…….”
“생각한 것보다 모양이 나쁘기는 했지만, 예상하던 결과다.”
“장로님!”
“이제부터 이기면 된다! 다섯 번을 지든! 여섯 번을 지든! 아홉 번을 지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열 번을 이기면 된다! 몇 번 패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중요한 건 결과다.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꽉 깨물린 무진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산자의 말은 아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을 뒷받침하는 논리 역시 처음과 같다. 하나 그건 겉으로 보았을 때일 뿐이다.
허산자는 지금 감정에 한껏 젖어 있었다. 앞뒤를 따져 결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리 얄팍했던가?’
그의 사문은 그야말로 고고한 도가의 향취가 묻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무진은 그 고아함의 이면을 본 기분이었다.
‘사문 내에서만 고아한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문을 나와 세파를 얻어맞는 순간 그 자세와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진은 참담한 얼굴로 화산 쪽을 바라보았다.
‘경박하고…… 거칠고…….’
한없이 자유롭다.
도가의 근본은 본디 세상과 자연을 내면에 품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격한 규율에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보다 저쪽이 더 도가(道家) 그 자체에 가깝지 않겠는가?
무진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하지만 귀까지 막을 순 없기에, 환호하는 화산 제자들의 목소리는 시리도록 아프게 꽂혀 왔다.
“여윽시! 여윽시 사숙이다!”
“사형! 정말 최고였습니다!”
“와, 나는 진짜 흉내도 못 내겠네!”
비무대를 내려오는 백천을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다들 열심히 싸웠지만, 백천만큼 확고한 우위를 보여 준 이는 없었다.
내내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무당이라는 거대한 산은 언제나 그들의 어깨를 눌러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천이 그 거대한 산을 단칼에 갈라 버린 것이다.
“정말 멋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검기를 쓸 수 있는 겁니까? 저도 가르쳐 주십시오, 사형!”
주위로 와글와글 몰려든 화산의 제자들을 보며 백천이 빙긋 웃었다.
“너무 띄워 주지 마라. 쑥스럽구나.”
“아니요! 이건 진짜 자랑스러워할 일 아닙니까!”
“아, 진짜 아쉽다! 무진이 나왔어야 하는 건데!”
“무진이라니, 이 새끼야! 그래도 무진 대협이라고 해야지.”
“아, 그렇지…….”
백천은 자꾸만 커지는 미소를 어쩌지 못하고 난감해했다. 환호하고 기뻐하는 사형제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기분이 부풀었다.
‘이 말이었구나.’
화산의 이름을 드높일 사람이라던 말뜻이.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야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건 백천만이 홀로 고고하단 의미가 아니었다.
윤종과는 다른 방식으로 화산의 제자들을 이끌어 나간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청명의 뜻을 그제야 이해한 백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떠냐. 완벽하게 해냈…….’
하지만 순간 백천은 돌처럼 굳어졌다.
짝 다리를 짚은 채, 영 불만스런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청명과 조걸……. 그리고……. 응?
윤종아? 너는 왜 거기 있니? 윤종…….
“거…….”
청명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건들건들 말했다.
“영웅 나셨네?”
“왜? 사숙이야 원래 자알나셨잖아.”
“아이고오. 눈이 부시네. 눈이 부셔. 눈멀겠다.”
“…….”
윤종과 조걸은 흡사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뚱하게 백천을 노려보았다.
“거, 그렇게 화려하게 안 해도 충분히 이겼을 텐데.”
“뭘 새삼스럽게 그러느냐.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근데 저 새끼들이?
기분 좋았던 게 언제냐는 듯 백천은 눈에 불을 켰다.
“아니, 이 새끼들아! 사숙이 이기고 돌아왔는데 반응이 그게 뭐냐?”
“축하하고 있잖습니까?”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사숙! 이 사질은 감동해서 아주 그냥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 아, 아니, 잠깐만, 검은 뽑지 마시고, 에헤이.”
윤종과 조걸이 뒤로 후다닥 꽁무니를 뺐다.
백천은 단정한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잠시 착각했다.’
그냥 화산의 제자들과 저 새끼들은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어야 했는데.
백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청명을 노려보았다.
“시킨 대로 했으니, 너는 불만 없겠지?”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 뭐 대단한 거 잡았다고 목에 그렇게 힘을 주고 있어? 곧 부러지겠네.”
“……썩을, 진짜.”
결국 험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저 새끼한테 기대를 한 내가 병신이지, 내가!
한숨을 푹푹 쉰 백천은 고개를 홱 돌리고는 제자리로 향했다.
오검이야 시큰둥하고 쀼루퉁했지만,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선망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로들까지도.
“백천아.”
“예, 장로님.”
“정말 잘해 냈구나.”
현상이 어깨를 두드려 오며 말하자 백천은 빙그레 웃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와, 저 양반 말하는 것 보십쇼!”
“걸아. 다 들린다, 다. 조용조용 말해라.”
윤종 이 새끼야…….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해야지, 조용히 말해라는 뭐냐?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하튼 이 새끼들은…….’
하여간 사람 속을 벅벅 긁어 대는 데는 다들 일가견이 있었다. 백천은 이내 피식 웃어 버리고는 무당 쪽을 흘끗 보았다.
‘한때는 그랬지.’
그도 무당을 부러워한 적이 분명 있었다.
종남을 떠나 화산을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화산이 아니라 무당을 택했더라면 종남에게 굴욕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에 밤을 지새운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화산의 제자라 다행이다.’
자부심이라는 건 강함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지금 백천은 자신이 화산의 제자라는 사실에 절로 가슴 뻐근할 만큼의 자부심을 느꼈다.
물론 조금쯤 궁상맞고, 가끔 속이 시끄럽고, 종종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하고 자랑스러운 문파가 바로 이곳이었다.
“……표정 보니 지금 아주 멋에 만취하셨는데?”
“내버려 둬라. 하루 이틀 일이냐?”
“…….”
아니. ‘따뜻하다’는 빼자.저 썩을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