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화.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5)
“…….”
경악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비무를 지켜보던 무당의 제자들은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백천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들 멍했다.
‘흉내 냈다?’
아니, 저건 단순히 흉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저건 말 그대로 ‘이해’한 것이다.
무리와 운용의 방식은 다를지 모르지만, 저 일 수에는 분명 무당 무학의 묘리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
‘대체 어떻게…….’
충격 그 자체였다.
이미 세 번의 패배를 경험한 것도 충격이긴 했으나, 앞선 패배들은 말 그대로 화산의 요행에 가까웠다. 다시 붙는다면 적어도 승패를 알 수 없는 수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백천은 무오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그것도 자신의 장기가 아닌, 무당의 묘리를 흉내 낸 검으로 말이다.
‘언제…….’
허산자의 눈두덩이 경련을 일으켰다.
‘언제 화산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비무는 화산이 그들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는 광경은 화산이 어느새 그들의 등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지금 백천이 들고 있는 저 검이 마치 허산자의 목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천재.’
그 단순한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있을까?
허산자는 안다. 천재라는 말이 가지는 허무함을.
세상에 재능을 타고난 이가 얼마나 많은가?
약관이 되기 전에 두각을 나타내는 이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약관을 넘어서면 그 앞서 가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은 평범해지고, 이립에 이를 즈음에는 채 한 줌도 남지 않는다.
결국 재능이라는 것은 타고났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그 재능을 갈고닦아 빛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한다면 천고의 재능을 타고난 이도 결국은 범부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자도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
비무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때 명성을 올린 이는 혜연과 청명, 두 사람뿐이다. 지금은 뛰어나지만, 결국 백천은 저 두 사람의 위광에 가려질 만큼 평범한 재능의 소유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온전히 빛나지 못했던 재능이 지금은 저렇게나 만개하고 있다.
‘대체 무엇을 겪은 거지?’
빛나지 못했던 재능이 갑자기 빛을 발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그 짧은 시간 동안 저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허산자의 상식과 머리로는 그 원인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진이라면 저 아이를 이길 수 있을까?’
내심 그럴 리가 있겠느냐 생각하면서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벌어질 사고를 피하기 위해 무진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지금 허산자는 제 선택이 더없이 옳았음을 깨달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칠 할.
아무리 무진이 강하다고 해도 저 백천을 상대로는 칠 할 이상의 승산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칠 할의 승산이라는 것은 세 번 싸우면 한 번은 진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한 번이 지금이 아니라는 보장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
‘화산…….’
허산자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이제 더는 화산이라는 문파가 겨우 눈엣가시 정도로 취급될 곳이 아님을.
무오의 얼굴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실려 있었다.
굴욕감, 분노, 경악, 공포, 그리고 좌절과 오기.
이 외에도 그의 얼굴을 면밀히 관찰한다면 더 많은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목을 긁는 듯이 낮게 읊조렸다.
“……나쁘지 않다고?”
무당의 검이?
천하를 오시하는 무당의 검을 두고 겨우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린다고?
뿌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그가 무시받은 것은 참아 낼 수 있다. 하지만 사문의 검이 평가절하당하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건방진 놈이…….”
무당의 도사답지 않은 거친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백천은 그저 담담하기만 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딱히 무당의 검을 무시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경솔한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저 가여울 뿐이지요.”
“…….”
귀에 꽂힌 말을 믿지 못하는 듯한 무오를 보며 백천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검은 물과 같아지려 하나, 정작 검을 쓰는 자들은 순리를 역행하려 하니 어찌 그 검이 가엾지 않겠습니까?”
“…….”
무오는 대답하지 못하고 검을 움켜쥔 손만 파르르 떨었다.
‘……장로님.’
이래서 순리가 아닌 길은 선택하면 안 된다. 사문의 검이 무시받고 그가 평생 해 온 노력이 평가절하당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한마디의 변명도 할 수 없게 되지 않는가.
이는 무당이 순리를 거스르고 이득을 취하려 한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이자와 마주 서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검문의 검이란 그저 검을 쓰는 기술만 두고 논할 것이 아닙니다.”
백천은 무심코 고개를 슬쩍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문파의 명운이 걸린 비무에 참관하고 있음에도 제멋대로 주저앉아 귀찮은 듯 하품이나 하고 있는 놈을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한 문파의 검은 그 문파를 상징합니다. 그렇기에 소림의 권은 중후하고, 청성의 검은 쾌속하며, 무당의 검은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습니까?”
“…….”
“중심을 관통하는 진의(眞意)을 스스로 흐트러뜨리는 곳이 훗날 어찌될지는 너무도 빤하지요.”
백천은 이제야 청명을 이해했다.
과거에는 은근히 종남의 이송백을 도와주려 하는 청명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종남은 화산의 적이고, 이송백은 종남의 제자다. 그런 이를 어째서 돕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지금 무오를 보고 있자니 알 것 같았다.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어긋나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을 말이다.
이건 무당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무인으로서 느끼는 안타까움이었다.
“꽤 잘난 척 떠드는구나.”
하지만 무오는 그 말에 정말로 화가 치민 듯 이를 악물었다.
“네 말이 옳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는 오만하다. 설령 네 말이 옳다 해도 자신의 말이 반드시 옳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오만이다.”
“…….”
“좀 더 고심하고, 좀 더 많은 것을 겪은 사문의 어른들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 말이냐?”
백천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제자는 스승을 믿어야 한다. 제 생각에는 그게 틀린 것 같아 보여도, 제자가 스승의 판단을 믿지 못한다면 결국 불협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화산이 무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
“어긋나는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겠죠.”
화산은 그렇다.
제자 중 누가 불만을 토로하고, 잘못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도 그것이 파국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모두가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가 말을 할 자격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 그게 화산이다.
백천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스운 일이지.’
그 역시 청명을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신의 배분과 권위로 청명을 찍어 누르려 했었다. 심지어 그것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자 실력으로 청명을 단죄하려 했었다.
그 시절의 꽉 막혔던 백천에 비한다면, 지금의 무오는 오히려 무척 열려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지금의 백천은 무오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자의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믿음에 말이다.
“어차피 대화로는 풀리지 않을 일 아닙니까.”
백천이 검을 아래로 내렸다.
“오십시오. 검수는 검으로 증명해야겠지요.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무오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비무대와 관객석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아마 그들이 나눈 대화를 관객들도 모두 들었을 것이었다.
무오는 본의 아니게 무당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는 입장에 서 버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지금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터.
‘이 교묘한…….’
무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말로 무언가를 해 보려 하기엔 늦었다. 스스로의 약세를 드러내는 것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엔 그 역시 손에 쥔 검으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어졌다.
그리고 이게 검을 들고 강호에 나선 이의 숙명이었다.
“후우우.”
길게 심호흡을 한 무오는 검을 꽉 움켜잡았다.
‘근거리에서 우세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백천이라는 자는 근거리 전투에 기이할 정도로 익숙했다. 마치 칼과 칼이 마주 닿고,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실전을 수도 없이 겪어 보았다는 듯 말이다.
이는 그가 세운 필승 전력이 이미 무너졌다는 뜻이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빤하지.’
그렇다면 자신의 장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무오가 검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도 꽃이 핀다면 모두 함께 휩쓸어 버리겠다.’
자를 테면 잘라 봐라.
잘린 검기조차 더없이 강인하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하겠다!
각오를 굳힌 무오의 검기는 흡사 노한 파도와도 같았다. 도도한 물결 같은 무당의 검기와 그 성질이 달라 보였다. 폭풍에 밀려오는 탁한 급류에 가까웠다.
가공할 기세를 품은 그 검기는 일견 무연이 보여 주었던 것보다 더 강인하고 폭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백천은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검기를 보며 안색을 굳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것인가?’
아무리 말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무당의 검은 도도함과 차분함을 기반으로 한다. 한데 순간적인 분노에 자신을 맡기고 거친 검기를 쏟아낸다는 것은 결국 그 근본을 잃은 짓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 강인해 보이지만 그 안은 정돈되지 못한 거친 기운으로만 가득할 뿐이다.
- 사숙은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떨칠 사람이지.
‘오냐.’
네가 생각하는 내 역할이 그거라면.
‘전심전력을 다해 이뤄 주마!’
등 뒤에서 칼을 찔러 대는 망할 사질 놈들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화아아아아악!
백천의 검이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렸다. 검 끝이 그려 내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호선을 따라 생생한 매화들이 물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전의 비무에서 무당의 제자들이 보았던 매화와는 그 수준이 달랐다. 검을 스치는 곳마다 번지는 것처럼 쉬이 피어나는 꽃들은 물감이라도 뿌려 놓은 듯 다채로웠다.
실로 화려한 장관이었다.
붉디붉어 고혹적이기까지 한 매화는 우아하게 그 자태를 자랑하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지켜보는 모두가 넋을 잃었다.
관객들도, 이미 매화검법을 웬만큼은 견식 해 본 무당의 제자들도.
백천의 검을 수도 없이 본 화산의 제자들마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아…….”
심지어.그를 상대하고 있는 무오조차도 일순 넋을 놓았다.
‘매화…….’
붉게 피어난 매화가 날아드는 검기의 급류를 휘감고 돌았다. 검기는 검기일 뿐 결코 물이 될 순 없다는 듯, 부수고 으스러뜨리며 찢어 놓았다.
파아아아아앗!
검기를 분쇄한 매화 잎들은 이내 바람을 타듯 하늘로 솟아올랐다. 점점이 퍼져 나간 꽃잎은 세상을 붉게, 또 붉게 물들였다.
화원(花園).
온 공간이, 온 세상이 만개한 붉은 꽃으로 꽉 들어찬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적어도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무오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꽃잎으로 화한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화아아아악!
그토록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던 매화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무오를 향해 밀려들었다.
서걱!
어깨의 옷자락이 베였다.
서걱!
바지춤 역시 무참히 베여 나갔다.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오의 몸을 매화가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서걱! 서걱!
수십, 수백의 꽃잎이 무당의 무복을 난자하며 스쳐 갔다.
화아아아아악!
돌개바람처럼 밀려든 매화가 일제히 그를 스치고 지나간 뒤, 무오의 옷은 말 그대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
하지만 육체에는 단 하나의 생채기조차 남지 않았다. 그 많은 검기가 스쳐 갔음에도 말이다.
“…….”
무오와 백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깨물린 무오의 아랫입술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검기로 사람을 꿰뚫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많은 검기를 동시에 다루면서 사람의 몸에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위협만 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상처 입혀 쓰러뜨리는 것보다, 일격에 숨을 끊어 버리는 것보다도 훨씬.
이 절망적인 차이 앞에서 무오가 할 수 있는 말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제가…….”
그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가 졌습니다.”
납검조차 하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그 모습에 백천은 천천히 검집 안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스르르릉.
그리고 어깨를 쭉 편 후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내밀었다.
“잘 배웠습니다.”
이 이상을 논할 수 없는, 완벽한 압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