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24화 (622/1,567)

624화.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4)

“와…….”

“역시 사형이다.”

화산의 제자들이 승기를 잡은 백천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비무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물론 지금까지의 비무도 화산이 모두 승리했지만, 그건 몰아치는 상대에게 반격하는 데에 성공하는 양상이었다.

몰아붙이며 공격하는 쪽은 쭉 무당이었고, 이쪽은 그 무당의 공세를 이겨 내는 흐름이었단 의미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누가 보아도 비무의 승기는 백천이 잡고 있었다.

“저 무당을 상대로…….”

“……그러니까.”

모두가 백천의 활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정말 입이 찢어지도록 벌어진 이들은 따로 있었다.

“저…….”

“아니, 저게…….”

무당과 검을 섞어 본 조걸과 윤종의 놀라움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이들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저걸 자른다고?’

‘아니, 미친 저게 말이나 되나?’

검기를 잘라 내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이쪽이 상대보다 더 정제된, 더 강한 검기를 만들어 내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상대의 검기가 가지는 특성이었다.

“……칼로 물을 베었네.”

“말이 안 되는데…….”

조걸과 윤종은 백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무당의 검기는 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이어짐의 근원은 검 끝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검기다.

생각해 보라.

계속 흐르는 물을 자를 방법이 있겠는가?

물론 자를 수야 있다. 저 검기가 강철처럼 단단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물이란 잘라 내도 다시 합쳐지고, 막아 내도 뭉쳐 든다.

하지만 지금 백천은 말 그대로 물을 잘라 냈다. 아주 끊어 버린 것이다.

“……야, 청명아.”

“응?”

“저게 되는 거냐?”

“안 될 이유라도 있어?”

시큰둥한 대답에 조걸이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았다.

“나는 안 되던데?”

“사형이니까.”

“사숙은 되는데?”

“사숙이니까.”

“…….”

조걸이 검을 꽉 움켜잡자 윤종이 얼른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지금 상처에 처맞기까지 하면 진짜 죽는다.”

“…….”

붉으락푸르락하는 조걸의 얼굴을 흘끗 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물은 당연히 못 자르지.”

“그렇지!”

“그런데 저게 물이냐? 검기지?”

“…….”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가의 무학은 자연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아. 화산이 개화를 논한다면 무당은 흐름을 논하지. 무당의 무학은 그저 끊이지 않는 물을 닮아 가려 하는 것뿐, 완전한 물이 될 수는 없어. 물론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된다면 일대제자가 아니라 일대종사겠지.”

“물론 그렇긴 하지만…….”

“결국 저 검기는 기운과 기운이 발출되는 속도를 극단적으로 줄여서 흐름을 이은 거야. 아무리 완벽하게 물을 흉내 낸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미세한 단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어.”

조걸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럼 그 미세한 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고?”

“간단하지?”

“……이 새끼야, 그게 말이 쉽지…….”

조걸은 학을 떼며 다시 비무대 위의 백천을 보았다. 흐름과 흐름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는 건, 상대의 검기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 대련을 나누는 사형제들 사이에서도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할 일을 오늘 처음 본 이를 상대로 시도한다?

‘제정신인가?’

조금만 어긋난다면 되레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성공한다 해도 얻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은 데다 실패할 시엔 큰일이 날 만한 일을 누가 시도하겠는가. 실로 미련한 짓이 아닌가.

‘아니, 아니야.’

생각을 이어 가던 조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백천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는 확신이.조걸에겐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만, 백천에게는 딱히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게 지금 조걸과 백천 사이의 거리였다.

그 까마득한 거리를 실감하는 순간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천이 더 강하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거리를 꽤 좁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천은 단 일 수만으로 조걸과 그 사이의 거리가 딱히 좁혀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

차마 입도 열지 못하는 조걸의 귓가에 윤종의 탄식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사람 맥 빠지게 하는 분이야.”

“…….”

“그렇지?”

조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평소의 조걸답지 않은 그 무거운 반응이었다. 윤종은 슬쩍 고개를 내저었다.

‘훨씬 충격이 크겠지.’

사실 윤종 같은 이에게 백천의 존재가 딱히 클 것도 없다. 어차피 짧은 시일 내에 백천을 따라잡는다는 꿈 같은 건 꿔 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조걸에게는 다를 것이다.

‘부지런한 천재라는 건 희망을 앗아 가는 악귀 같은 존재지.’

그를 좇는 이들은 마치 결승점이 점차 멀어지는 달리기를 하는 기분일 것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가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후들거리는데 결승점은 가까워지기는커녕 더욱 멀어진다.

그 절망을 버텨 내는 게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윤종은 비무대 위에 선 헌앙한 자태의 백천을 주시했다.

어쨌든 지금 가장 충격이 큰 것은 백천을 상대하고 있는 무오이리라 생각하면서.

“…….”

무오의 눈에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절망? 좌절?

아니다.

절망과 좌절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인정했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하지만 무오는 아직 직접 본 광경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평생을 노력해서 얻어 낸 검기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움직임 한 번에 잘려 나갔는데 이를 쉬이 인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실수다.

아니, 우연이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가 마침 실수를 저지른 순간, 우연히 백천의 검이 검기를 파고들었을 수 있다.

이성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렇게 여기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는 지금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처럼 당황했으니까.

그 순간.

“오십시오.”

백천이 검을 들어 그를 똑바로 겨누었다. 실로 흔들림 없는 자세였다. 백천 주변의 공기만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무오의 마음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건만, 백천은 마치 파문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 백천이 했던 말이 무오의 뇌리를 뒤늦게 강타했다.

- 상대의 검을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쪽만이 아닙니다.

관찰. 그는 분명 관찰이라고 말했다.

그럼 이 몇 번의 비무만으로 무당의 검이 가지는 특성을 이해하고, 그걸 토대로 무오의 검기를 잘라 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무오는 이를 뿌득 갈아붙였다.

‘우연이다!’

그는 절대 백천이라는 자를 경시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눈이 있고, 지금까지의 비무를 모두 지켜보았다. 앞서 나온 화산의 제자들보다도 더 강할 것이 분명한 백천을 얕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당 검기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아예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그런 게 단숨에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무당이 명문으로 이름을 지키는 게 가능했겠는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무오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떨리는 검 끝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백천을 겨누었다.

이제 그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들끓는 눈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울분을 읽은 순간, 백천은 묘한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만하구나.’

무오가 들으면 통탄할 생각이었다.

무오는 이미 백천이 자신보다 위에 있음을 인정했다. 화산의 이대제자를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한 무당의 일대제자에게 오만이라는 말은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백천은 그가 오만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겸손한 게 아니다.

무오는 백천의 강함을 인정하지만, 그 강함을 어떻게든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자신의 상식이 무너질 리 없다는 확신으로 말이다.

이건 명백한 오만이자 확실한 경험의 부재였다.

그에 비해 백천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세상에 상식을 초월하는 괴물들과 재단이 불가능한 천재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그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도 말이다.

‘겪지 않았다면 나 역시 몰랐겠지.’

화산이라는 작은 문파 안에서는, 종남이라는 좁은 우리 안에만 갇혀 있을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일이다.

청명을 따라 세상을 누비며 백천은 세상을 배웠고,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갑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무력함을 무당 역시 알아야 할 때다.

파앗!

백천이 바닥을 박차며 무오의 전면으로 쇄도했다.

무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애초에 그가 생각했던 백천 상대법은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백천이 되레 그와의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마치 거리의 차이 따위는 너를 상대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는다는 듯 말이다.

“이……!”

그 무시 아닌 무시에 분노한 무오가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의 검기가 마치 폭포수처럼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내 백천의 전신은 푸르게 넘실대는 검기에 완전히 뒤덮였다.

하나 그 순간.

파아아아앙!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파도처럼 몰아치던 검기 한중간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쏟아지는 검기가 수십이지만, 무오 역시 무당에서 끊임없는 고련으로 자신을 단련시켜 왔다. 간결하고 낭비 없는 검격이 일시에 쏟아지는 수십 번의 찌르기를 모조리 막아 내었다.

‘어림없지!’

백천의 요행에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침착함을 되찾기만 한다면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앙! 카앙!

저렇게 수십 번의 찌르기를 감행한 이상 상대도 언젠가는 호흡을 돌려야 할 터. 그 틈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다면 수세를 공세로 전환할 수 있다.

카앙!

한 번의 틈만 보인다면…….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카앙!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았던 무오의 눈에 다시금 당혹감이 어렸다.

‘왜 끊기지 않…….’

파아아앗!

찰나의 순간 제대로 막지 못한 백천의 검이 무오의 눈 바로 옆을 가르고 지나갔다. 위로 비껴 나간 검이 그의 귀 끄트머리를 살짝 깎듯이 잘라 내었다.

욱신!

생생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무오를 삽시간에 현실로 끌어내렸다.

‘왜 멈추지 않는 거냐?’

일격에 힘을 싣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실은 찌르기를 쉬지 않고 연이어 날리는 것은 그보다 수십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백천의 검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수없는 찌르기가 흡사 쏟아지는 듯 무오를 향해 퍼부어졌다.

끊기지 않는 검기, 이건 마치…….

‘이, 이놈이?’

생각이 어느 지점까지 닿는 순간 무오의 감정이 찰나간 요동쳤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쏟아지던 검영 사이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찌르기가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카각!

순간적으로 치켜든 검면으로 막아 내어 목이 꿰뚫리는 것만은 면했지만, 그 찌르기에 실린 힘은 급하게 휘두른 검으로 해소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충돌이 일어난 순간, 무오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날았다.

쿠다당! 쿵!

바닥에 머리를 처박히고, 떠오른 몸이 다시 몇 차례나 비무대 위를 굴렀다. 연신 바닥을 구르고 굴러서야 겨우 멈춰 선 무오는 땅을 움켜잡듯 긁어내리다 온몸을 들썩였다.

“우웨에에에에에엑!”

이내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순간적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무오는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흔들리는 눈으로 백천을 올려다보았다.

“너…… 그거…….”

“장로님께서 말씀하셨죠.”

백천이 무심한 눈으로 담담히 말했다.

“서로의 검을 견식 하는 좋은 자리가 될 거라고.”

“…….”

“그래서 한번 배워 봤습니다. 나쁘지 않군요, 무당의 검도.”

무오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