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3)
비무대에서 무호를 바라보는 백천의 기분이 유쾌할 리는 없었다.
그도 나름 총명한 기재였다. 무당의 미묘한 분위기며 무호의 좋지 못한 표정을 보며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비무대에 오르기 전 청명이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무당의 일대제자 무호요.”
“…….”
백천은 즉각 대답하지 않고 무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호는 그 시선을 오래 마주하지 못하고 슬쩍 눈을 피했다.
차라리 당당하기라도 하면 욕이라도 해 주련만. 백천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참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호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 역시 결국엔 피해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죄가 있다면…….
백천의 시선이 비무대를 바라보는 허산자에게로 옮겨 갔다.
‘저자겠지.’
당당하다.
차마 백천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다른 무당의 제자들과는 달리, 허산자만은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뒤를 지키는 제자들과 허산자의 반응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다. 백천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천 역시 강호의 논리, 즉 냉혹한 힘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니 저 장로의 선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 장로님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저 현상과 현영이었다면 백천에게 사문의 영광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수치를 감내하라는 말을 했을까? 냉혹한 강호의 논리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련하고 냉정하지 못한 행동일 수도 있다. 감정을 배제하고 본다면 무당의 저 결단이 더 문파에 이롭고 옳은 것일 수도 있다.
하나…….
백천은 가라앉은 눈으로 무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입니다.”
두 손을 포개며 정중하게 포권 했다. 상황은 조금 달라졌지만 예의를 잃지 않았다.
스릉.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뽑았다.
검을 뽑는 손길이 조금 다급해 보이는 무호와 달리, 백천은 천천히 검을 뽑아 느긋하게 중단세를 취했다.
“…….”
무호는 백천을 슬쩍슬쩍 보았다.
검을 뽑았으면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겠으나, 백천은 그의 기색에서 뭔가 하고픈 말이 있음을 읽어 내었다.
“말씀하시지요.”
“…….”
백천이 먼저 운을 떼자 무호가 살짝 머뭇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본의는 아닐세.”
“이해합니다.”
사문의 명이란 태산보다도 무겁다. 무당의 이름을 지고 살아가는 이가 그를 거부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백천이 차분히 한마디를 보태었다.
“승부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어깨를 펴고 내려가는 것은 제 쪽일 것 같군요.”
“…….”
무호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살짝 숙였을 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자들이 어깨를 펴지 못하게끔 만드는 명성이, 제자들이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명예가, 떳떳이 자랑할 수 없는 승리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그래, 저 선택이 옳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백천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일로 명성을 얻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뿐만 아니라 화산에 적을 둔 모든 제자의 마음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백천은 검을 들어 올렸다.
‘명문 무당이 가엾군.’
그리고 다시 중단세를 취하며 말했다.
“잘 봐 두십시오.”
그를 바라보던 무호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다른 무당 제자들의 시선이 모두 백천에게로 꽂혀 있었다.
‘윤종은 제 역할을 해냈다.’
그는 뒤따르는 제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백천이 화산에서 이루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백천의 묵직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 승부, 나아가 비무 대회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무당과 화산의 경쟁은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이 검이 당신들을 뒤쫓는 검입니다. 똑똑히 봐 두십시오.”
실로 건방지고 무례한 말에 무당 제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나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저 말을 듣고도 지적조차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입장이었다.
“이게 화산의 검입니다.”
백천이 두 눈을 빛내며 심호흡했다.
“와, 우리 동룡이 성질 긁어 대는 것 좀 보소.”
청명은 비무대 아래에서 그런 백천을 보며 신나게 낄낄 웃었다.
‘못 말리겠네.’
너무 적절하지 않은가. 진심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청명이었다면 저렇게 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조목조목 저들의 실책을 지적하여 피를 토하게 만들 수는 있었겠으나, 저토록 묵직한 한 방으로 낯이 뜨겁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결과가 중요하다고?’
멍청한 새끼.
청명은 허산자를 일별했다.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명성이라는 것은 한번 추락하면 다시 올리는 데에는 기존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청명은 이제 안다. 과거의 청명이라면 그 역시 어떻게든 승리라는 두 글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썼겠으나, 이제는 승리엔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이 비무에서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화산이 무당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이다.
허산자의 선택 덕분에 화산의 제자들은 저 무당의 일대제자들이 승부를 회피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다.
반대로 무당의 일대제자들은 그 사실을 화인처럼 간직하게 될 것이다.
입으로는 허세를 떨어 대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여전히 무당을 높은 산처럼 여기고 있다. 사람의 발로 오를 수 없는 곳은 아니지만, 차마 오를 엄두는 나지 않는 높은 산.
하지만 이제는 그 산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쐐기를 박고 와.”
그리고 이제 백천이 그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스읏.
백천의 검이 가볍게 허공을 내리그었다.
화산 특유의 기수식을 택한 그는 그저 처음처럼 담담하게 무호를 보고 있었지만, 정작 무호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왜 이러지?’
상대는 이대제자다.
비록 명성은 그보다 높고 천하에 손꼽히는 기재라고 불리기는 하나 수련을 해 온 시간 자체가 다르고 배분 차이도 난다.
그런데 왜 이리 움츠러드는 것인가?
‘조금 전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기세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무호는 백천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보았다.
이자에게는 지금까지 비무에 나선 화산의 제자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위압감과 중압감. 소위 ‘거물’이라 불리는 이들이 가지는 그 존재감을 이 어린 자가 가졌다.
‘사형과 마주하는 것 같군.’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무진과 대련할 때를 떠올리게 만들 만큼 어이없는 중압감이었다. 그보다 최소 열 살은 더 어린 자에게서 중압감을 느낀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상식은 상식이고, 현실은 현실. 지금 무호는 분명 눈앞의 상대에게 움츠러들고 있었다.
‘내가 도전자라는 거로군.’
무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양은 좋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는 무당의 일대제자였다. 승부에서 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무호는 이내 기합을 내지르며 검기를 내뿜었다.
파앗!
탐색을 위해 짧게 끊어 친 검기가 반월처럼 백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
쾅!
실로 가볍게 휘둘러진 매화검이 묵직한 검기를 가뿐하게 쳐 날려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가 넘치는 움직임이었다.
무호는 그 광경을 선뜻 믿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가볍게?’
짧게 끊어 날렸다고는 하나, 그 검기에 실린 내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저리 가볍게 튕겨 낼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백천의 실력이 그가 예상한 것보다 배는 더 강하다는 의미였다.
조금 오만한 시선으로 무호를 한번 바라본 백천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이기에 오히려 더 압박감이 느껴졌다.
입술을 짓깨문 무호는 다시 한번 기합을 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형들은 거리를 벌리다가 오히려 패했다.’
본디 무당의 검은 중거리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사형들은 상대에게 거리를 내어 주다가 현란하기 짝이 없는 화산의 검술에 승기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상대가 제대로 매화검법을 펼치기 전에 승부를 본다.’
무호의 판단은 그리 잘못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산의 검술을 제대로 파악한, 현명한 대처라고 할 수 있었다.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의 상대가 하필이면 백천이라는 점이었다.
“하아아압!”
강한 내력을 실은 검이 백천의 사위를 휩쓸고 들어왔다.
카앙! 카앙!
하나 그 검은 채 뻗어지기도 전에 매화검에 가로막혔다.
우득.
일순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이 쏟아지자 무호는 한껏 눈살을 찌푸렸다. 검과 검이 맞닿은 순간 상대의 검에서 말도 안 되는 반탄지기가 밀고 들어온 것이다.
조걸의 검은 날렵했고, 윤종의 검은 간결했다.
하지만 이 검은?
‘장대하다.’
맞닿는 순간 힘과 내력으로 그의 검을……. 아니, 무호라는 사람 그 자체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이대제자의 검이라고?’
검이란 세월과 함께 무거워진다. 그 세월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이대제자가 어떻게 이런 검을 휘두를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아아아아압!”
무호가 고함을 내지르며 매화검을 쳐 낸 뒤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나는 무당의 제자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에게는 천하제일도문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되었다.
이내 그의 검에서 물과 같은 검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끊기지 않고 멈추지 않는 무당의 검기였다.
‘한순간도 틈을 주지 않겠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자가 그 화려한 매화검법을 쓰게 만드는 순간 패배하게 될 것이란 걸. 하지만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일 수만 있다면 승기를 잡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내 검은 끊기지 않…….’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읏.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백천의 검이 무호의 검기를 파고들었다.
‘뭣?’
막아 낸 것이 아니라 파고든 것이다. 마치 무호의 검기를 잘라 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무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멍청한 짓…….’
촤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 백천의 검이 흐르는 물처럼 끊이지 않던 무호의 검기를 말 그대로 반으로 갈라 버렸다.
‘……뭐?’
무호의 입이 충격으로 쩍 벌어졌다.
면면부절.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무당의 검기가 단 일 검에 잘려 나갔다. 마치 쏟아지던 폭포수가 중간에 뚝 잘린 것처럼.
그리고 검기를 베어 버린 매화검이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백천은 검의 손잡이로 비어 버린 무호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앙!
무호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나가 떨어졌다.
“…….”
바닥에 처박혔지만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격을 고스란히 흡수한 가슴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제 검기가 일 검에 잘려 나갔다는 충격만이 가득했다.
그때 바닥에 주저앉은 무호를 바라보던 백천이 가만히 말했다.
“상대의 검을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쪽만이 아닙니다.”
“…….”
“그 검기…….”
백천의 입가에 하얀 미소가 맺혔다.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무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