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2)
“잠깐.”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선명히 들렸다.
아마도 기저에 깔린 날카로움이 너무도 똑똑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장로님?”
무진이 흠칫하며 허산자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허산자는 그런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비무대 위에 선 백천만을 응시했다.
‘화정검이라.’
이곳에 있는 다른 무당의 제자들은 화산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무당의 제자들을 이끌고 화산을 상대해야 할 허산자까지 뜬소문에만 의지하여 계획을 짤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화산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입수했다.
물론 무위에 대한 정보는 당장 개방에 달려가 따져묻고 싶을 정도로 맞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간과할 수 없는 정보가 있다.
‘화산제일기재.’
화산에 대한 정보를 취급하는 모든 곳에서 같은 말을 했다.
화정검. 화산제일기재 백천.
사실 화산신룡이 있지만, 그는 이미 후기지수로 놓기에는 그 무위와 영향력이 너무 컸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저 백천이 화산을 대표하는 후기지수라고 봐야 한다.
이런저런 평가가 있었지만, 그중 허산자의 이목을 가장 잡아끈 말은 단 하나였다.
천재.
과거 천하에 이름을 떨쳤던 후기지수 오룡 중 일인이었던 진금룡을 격파했고, 나아가 저 만인방의 대주를 실전에서 꺾어 내었다.
그리고 훗날 화산의 장문인이 될 게 거의 확실하다.
어떤 수식어를 보아도 무시할 수 없는 이라는 게 결론이었다.
이 모든 걸 감안하여 판단해 볼 때, 최소한 먼저 싸운 화산의 제자들보다는 백천이 더 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산자는 다른 고민을 해야 했다.
무진이 반드시 백천을 꺾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물론 허산자도 알고 있다. 무진은 강하다. 무당 역시 그에게 큰 기대를 품고 있을 만큼.
하나 앞선 세 번의 비무를 모두 지켜본 허산자는 완벽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에라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무당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차라리…….’
허산자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무진.”
“예. 장로님.”
“이번에는 네가 나가지 않는다.”
“……예?”
두 눈을 크게 뜬 무진을 일별한 허산자가 뒤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무호!”
“예!”
“네가 나가거라.”
생각지도 못한 지목에 무호는 어안이 벙벙한 듯 반문했다.
“자, 장로님. 제가 말입니까?”
“그렇다.”
무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눈이 있고, 눈치가 있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는가? 스스로의 검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비무는 결코 일대제자 중 말석에 가까운 그가 나설 만한 비무가 아니었다.
“자, 장로님. 저자가 무진 사형께 도전을 했습니다만.”
“나도 귀가 있다. 설마 그걸 듣지 못했겠느냐?”
“하오면 어찌…….”
무호가 꾸물대며 시원스레 움직이질 않으니 짜증이 치민 허산자는 신경질적으로 백천 쪽을 다시 넘겨다보며 말했다.
“무진은 무당삼검의 일인이자, 무당 일대제자 중 수위에 꼽히는 이다. 그런 이가 화산의 이대제자와 손을 섞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지.”
“장로님!”
무진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허산자가 한 말이 틀려서가 아니다. 다만 그 말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허산자는 승부를 회피하고 있다.천하의 무당이 말이다.
“저쪽에서 걸어온 승부입니다. 한데 어찌 피한다는 말입니까. 한 배분이나 낮은 이가 도전해 오는 건데 겁을 내어 달아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허산자는 입꼬리만 당기며 빙그레 웃었다.
“조금 전에 너와 무연이 말하지 않았더냐? 이것은 비무이고, 친교의 장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더 배울 것이 없는 너보다야 무호가 나가 화산의 검을 견식 해 보는 것이 비무의 뜻에 더욱 걸맞지 않으냐?”
“…….”
무진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허산자는 그런 반응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긴말할 것 없다. 저 백천이라는 자는 무호가 상대한다.”
“장로님!”
다시 한번 크게 소리치려던 무진은 주변의 이목이 점점 쏠리자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뭐가 말이냐?”
“당당하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곳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놈.”
허산자는 차갑게 조소했다.
“이미 세 번을 패했다.”
그리고 씹어뱉듯 말했다.
“여기서 한 번 더 패하게 되면 세상이 우릴 두고 뭐라 하겠느냐? 정정당당하게 패한 훌륭한 문파라고 칭송이라도 할 것 같으냐?”
“…….”
“천만에!”
허산자의 눈을 보던 무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도무지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비무를 지켜본 이들은 화산의 승리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할 것이다. 무당의 일대제자가 화산의 삼대제자에게 연이어 두 번 패했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이다. 더구나…….”
그 패한 무당의 제자 중 하나가 무당삼검이라는 건 더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허산자도 이 말까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소리 내어 이야기하기엔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허산자의 핏발 선 눈이 무진을 노려보았다.
“너마저 패한다면 무당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세인들은 화산의 성장을 칭송하고, 무당의 퇴보를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지금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장로님.”
“너는 무당삼검의 수장이다. 절대 저들에게 패해서는 안 된다.”
무진의 눈에 허탈함이 깃들었다.
허산자는 평소 이성적이고 온화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선 그런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장로님, 이건…….”
“긴말할 것 없다. 이건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말이 나오자 무진이 한숨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허산자는 무당의 일대제자이고, 무당의 장로이다. 게다가 이곳으로 오며 장문인인 허도진인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에서만큼은 허산자의 명이 곧 장문인의 명과 같단 의미였다.
“물러나라.”
“명을…… 명을 받듭니다.”
무진이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허산자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 모습을 외면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게 수치스러운 일이고,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그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이건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와의 승부를 회피하고 승리라는 결과만을 만들어 낸다고 해서 그들에게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하지만 치욕은 잠깐이고 결과는 영원히 남는다. 그가 겪을 어떤 수치도 천하의 무당이 화산의 어린 제자들에게 실력으로 밀렸다는 평가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무호. 나서거라.”
“……예.”
옅은 한숨을 토해 낸 무호가 이내 처진 어깨로 비무대에 올랐다.
“뭐야?”
“무진 대협이 아닌데?”
화산 제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무진이 올라올 줄 알았건만, 정작 비무대에 오른 이는 그들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지?”
“남은 무당삼검 중 일인인가?”
“아닌 것 같은데?”
모두가 예상 밖의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백천은 자타공인 그들 중 최고의 고수다. 그러니 당연히 저쪽에서도 그에 걸맞은 이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이미 두 번의 승부에서 화산이 승기를 가져간 이상 저들도 화산을 마냥 경시할 수는 없을 터. 응당 저쪽에서도 총력을 쏟아부을 거라 예상한 것이다.
“숨겨 놓은 진짜 고수, 뭐 그런 건가?”
“그래 보이냐?”
“……역시 아닌 것 같지?”
딱 봐도 아니었다.
내내 비무대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확연한 존재감으로 그들을 압박하는 무진이나,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윤종을 완벽하게 압도했던 무연에 비한다면 지금 올라온 이의 기세는 아무래도 몇 수 처지는 느낌이었다.
어리둥절하여 쑥덕거리는 화산의 제자들을 보던 조걸이 이를 악물고 청명을 향해 말했다.
“아까 네가 말한 게 이거냐?”
청명은 무당 쪽을 보며 조소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저렇게까지 노골적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이길 생각이 없다고?”
조걸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워낙 계산속이 빠른 상인의 자식이다. 지금 무당이 무슨 수를 둔 건지 그가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빤한 필승법이 아닌가.
변수가 될 수 있는 백천과 유이설에게 약한 말을 내보내 승리를 넘겨주는 대신, 자신 있는 말들로 남은 화산의 제자들에게서 착실한 승리를 따내겠다는 수작이다.
이렇게 되면 백천은 손쉽게 이기고 올 것이다.
유이설 역시 간단히 이기고 돌아오겠지.
하지만 남은 이들은?
남은 무당의 일대제자들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이들이 화산에 또 누가 있는가?
고작해야 청명뿐이다.
“그냥 싸워도 이길 수 있잖아! 왜 저런 약아 빠진 짓을……!”
“명문이란 그런 거지.”
열이 뻗칠 대로 뻗친 조걸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청명은 그저 심드렁했다.
“잘나고 훌륭해서 명문이 된 거지만, 결국 명문의 이름을 결정하는 건 성과고 결과야. 오랫동안 명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었던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거야. 과정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그래서 저게 정당하다고?”
“아무도 정당하다고는 안 했어.”
조걸은 정말로 분한 듯 이를 갈아붙였다.
“이게…… 이게 무당의 방식이라고?”
흡사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로 무당 쪽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다른 제자들 역시 비슷한 분노를 담아 무당을 흘겼다.
청명은 적에게 정당함을 바라는 게 멍청한 행동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래, 화가 나겠지.’
지금의 화산에게 있어 무당이란, 뛰어넘어야 할 목표인 동시에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화산이 무당보다 높은 시절을 살았던 청명과는 달리, 이들은 원래 감히 무당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의 마음속에서 무당은 당연히 드높아야 하고, 또 강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민낯을 정면으로 직시해 버렸으니 배신감 같은 걸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청명은 허산자가 선 쪽을 바라보다 조용히 웃었다.
‘그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려놨다 이거지?’
과감한 결단이다.
대개 체면에 목을 매는 이들은, 그 체면 때문에 더 끔찍한 결과를 대면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대가로 승리만은 가져가겠다는 판단은 차라리 현명해 보일 정도였다.
“똑똑히 봐 둬.”
청명이 싸늘하게 말했다.
“협의를 논하고 낭만을 논하는 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이들의 여유일 뿐이야. 제 목에 칼이 겨눠지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숨겨 뒀던 본성을 드러내는 법이지.”
“…….”
그 말에 모두가 말을 잃고 비무대만 바라보았다.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다만…….’
이내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그려졌다.
‘그게 마음대로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
허산자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한 없이 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