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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621화 (619/1,567)

621화. 자부심과 함께 잘라 드리겠습니다. (1)

“이겼다!”

“세상에, 윤종 사형이 이겼어!”

“무당삼검을……!”

화산의 제자들이 화르륵 끓어오르는 듯 일제히 일어섰다.

이겼다.

그 형태야 어찌되었든 윤종은 승리했다. 이것이 생사결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비무였다. 비무라는 방식 안에서는 누구도 윤종의 승리를 폄하하지 못할 것이었다.

“……진짜 이겼어.”

설사 윤종이 패하고 비무대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화산의 제자들은 윤종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그런데 최선을 다한 결과로 심지어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뭐 하느냐.”

백천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다리가 풀려서 걷지도 못하는 모양이니, 올라가서 데리고 오너라!”

“예, 사형!”

“예, 사숙!”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한 사람을 부축해 오는 일이니 둘만 가도 충분하겠으나, 흥분한 이들에게 거기까지 생각하라 하는 건 무리였다.

“윤종아!”

“사형!”

윤종은 떼로 달려오는 사형제들을 보며 허허 웃었다.

“부축 좀 해 줘. 다리가 풀려서 안 움직여.”

“내상은요?”

“괜찮다.”

그 말에 모두가 좌우로 달려들어 윤종을 거의 반쯤 들쳐 멨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비무대를 내려왔다.

“소소야! 사형을……!”

“잠시.”

윤종은 바로 소소를 찾으려는 사형제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사형제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그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힘겹게 걸음을 뗀 윤종은 현상의 앞에 섰다.

“장로님. 다행히…….”

현상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

“애썼다. 참으로 애썼어.”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들으며 윤종이 옅게 웃었다.

“……밥값은 했습니다.”

“밥값이라니, 이놈아! 네놈은 밥에 황금이라도 뿌려 먹느냐!”

윤종을 품에서 떼어 낸 현상은 눈을 붉혔다.

기특하다 못해 가슴이 벅찼다.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보여 준 자세가, 그 검의 실린 의지가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이다.

“어서 치료를 받거라. 혹여 내상이 남았을지도 모르니.”

“예, 장로님.”

보고를 마친 윤종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검이 보였다.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백천과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감정이 넘치는 듯 주먹을 꽉 쥔 유이설, 답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문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조걸.

그리고…….

“알겠지만.”

“…….”

“열 번 싸웠으면 아홉 번은 졌을 거야.”

“안다.”

청명까지.

윤종은 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절실히 통감했다. 무연의 실력은 분명 윤종보다 뛰어났다. 그는 아직 무연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청명이 씨익 웃었다.

“이겼으면 그만이지.”

“…….”

“어깨 펴. 이길 수 있을 만한 상대를 이기는 건 자랑스러운 것도 뭣도 아니야. 진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 못 이길 상대를 이겼을 때지. 끝내줬어, 사형.”

“……뭔 바람이 불어서.”

보나마나 잔소리나 실컷 할 줄 알았던 놈의 뜬금없는 칭찬에 윤종은 잠깐 당황한 듯 굳었다.

하나 그도 잠시, 결국 그의 입가에도 더없이 맑은 미소가 피어났다.

‘이게 승리구나.’

비무대회에서 나름 좋은 성적을 거뒀을 때도, 빙궁과 싸우고 마교와 격전을 벌였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성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감상에 젖어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다 했어요?”

“…….”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윤종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다가온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끝났으면 가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윤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녀를 따라 뒤쪽으로 향했다.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기쁨과 웃음만이 담긴 건 아니었다. 사제든 사숙이든 모두가 저마다 윤종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느꼈으니까.

“이어지는 검이라.”

백천은 윤종의 등을 빤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질투 나는군.’

저렇게 흔들림 없는 올곧은 의지가, 그 뚝심이.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품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그의 솔직한 심정인 것을. 그는 조금 남부끄러운 이 질투심을 재빨리 묻어 두고 감추려 했다.

하지만.

“동룡이 표정 봐라. 저거, 저거.”

“…….”

아, 저 귀신 같은 새끼.

백천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청명을 흘겼다.

“쯧쯧.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욕심만 많아서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얼굴을 확 붉힌 백천이 무어라 반박하려는데 청명이 나직하게 말했다.

“사숙에게는 사숙이 해야 할 일이 있겠지.”

차분한 그 말에 백천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청명의 눈을 보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진짜 저놈의 조동아리는…….”

안다. 윤종이 후대의 화산을 등으로 이끌어야 할 이라면, 백천은 지금의 화산을 반석 위에 올려야 할 이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 우열을 매길 순 없다. 둘 다 더없이 중한 일이었다.

백천은 조용히 청자 배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조걸과 윤종의 승리로 더없이 상기되어 있었다.

‘희망을 보았구나.’

조걸은 단순히 배분과 나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고, 윤종은 스스로를 다그쳐 나아갈 근성만 있다면, 재능마저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망할 사질 놈들 같으니.”

그가 나서기도 전에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으니, 이젠 지고 싶어도 질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둘 다 더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그는 저들의 사숙이었다. 아직은 저놈들에게 질 수 없다.

“잘 봐 둬라, 이놈들아.”

백천은 매화 검을 꽉 쥔 채 비무대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가려고?”

청명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백천은 당연하단 듯 답했다.

“이 기세를 이어 가야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응?”

“사숙이 생각하는 대로 될까 모르겠네.”

살짝 불길함을 느낀 백천은 청명을 흘끗 보았다. 이놈이 이런 말을 할 때면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순서를 바꿀까?”

“아니, 뭐…….”

청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별 의미가 없을 거야. 나가도 돼. 일단 멋지게 이기고 와.”

백천은 영문을 모르고 그런 그를 멍하니 보았다.

이럴 거면 왜 그런 말을 한 건가?

“일단 다녀오마.”

“어.”

백천이 살짝 애매한 얼굴로 비무대를 향해 나아가자 청명은 혼자 쓰게 웃었다.

“훌륭해서 명문인 게 아니야. 이겨 왔으니 명문인 거지.”

이제 백천도 그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비무대에서 내려온 무연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허산자였다. 노려보는 눈길이 놀랍도록 살벌했다.

무연은 그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허산자의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한참 무연을 노려보던 허산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수양이라 했느냐?”

“…….”

“사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너는 사문의 명예보다 네 개인의 만족이 더 중요하더냐?”

실로 칼을 품은 목소리였다.

무연이 일대제자이고, 무당삼검으로 불릴 만한 실력자라고는 하나 장로의 진노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짧게 탄식한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뜨인 무연의 눈엔 한 자락의 흔들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장로님. 그렇게 얻은 명예에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의 담담한 반론에 허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 했느냐?”

무연이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명예란 정당히 얻어 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패한 것을 두고 이겼다 우기고, 스스로의 잘못을 감추어 얻는 명예는 잘못을 저질러 받는 손가락질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분노가 끓다 못해 허산자의 얼굴은 숫제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무연의 말은 꿋꿋하게 이어졌다.

“명예가 중하지 않아 물러난 게 아닙니다. 명예가 중요하기 때문에 물러난 것입니다. 저들이 보지 못했다 하여 실수를 감춘다면 제가 어찌 떳떳한 무당의 제자를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허산자는 이를 악문 채 무연을 노려보다 말했다.

“다 지껄였느냐?”

“장로님.”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무진이 슬쩍 나서며 그를 만류했다.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

“그리고 제가 듣기에는 무연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뭐라?”

“저들이라고 해서 무연이 저지른 실수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다 몰랐다 해도 한 사람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화산신룡.

무진이 본 것을 그가 보지 못했을 리 없다.

“무연이 거기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더 큰 망신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화산을 얕보았다가 망신당한 이들의 소문은 충분할 만큼 듣지 않았습니까.”

“이……!”

하지만 허산자의 분노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는 이를 갈아붙이고 일갈했다.

“어찌 이리 어리석을꼬!”

하나같이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들이 말하는 도의가 사실은 여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결국엔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이는 도의를 논할 수 없고, 힘이 없는 이는 정의를 논할 수 없다. 그들이 지금 잘난 듯 떠들어 대는 모든 것이 사문의 부와 명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들은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너무 세상과 유리되었어.’

청정도량에서 오로지 검을 갈고닦으며 도를 좇는다는 것은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는 결국은 세파를 겪어 보지 못한 채 온실 속에서 자라났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선대가 피 흘려 이룩한 명문의 이름 아래서 입바른 소리만 해 대는 나약한 놈들이 자라났구나.’

허산자의 시선이 스산해졌다.

그는 더 이상 이들과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답이 없는 논쟁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반드시 승리라는 결과를 가져가야 한다는 것. 그게 이곳으로 그를 보낸 장문인의 의도이자 뜻이었다.

“장로님. 다음 상대가 올라옵니다.”

허산자는 차게 굳은 얼굴로 비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반대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백천을 보며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너는 근신하고 있거라.”

“예, 장로님.”

대답이 돌아왔지만 허산자는 끝까지 무연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비무대에 오르는 백천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화정검인가?’

화산신룡을 제외한다면 화산의 후기지수들 중 최고라 불리는 백천이다. 물론 과거 비무대회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종남의 진금룡을 꺾어 내고 이번 대별채 토벌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이들은 삼대제자들이었다.’

같은 오검이라는 이름하에 불린다고 하나 배분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저 백천은 지금껏 나왔던 조걸이나 윤종에 비해서 적어도 한 수 이상은 앞서 있을 게 분명했다.

비무대 중앙으로 걸어온 백천이 가만히 포권 했다.

“화산의 이대제자 백천입니다.”

그는 무당을 한번 훑어보더니 무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제가 상대를 고를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무인으로서 원하는 상대가 있는 건 탓할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진 대협과 검을 겨뤄 보고 싶습니다.”

무당 제자들의 시선이 무진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이대제자가 무당의 일대제자에게 비무를 청하는 것이 건방져 보일 수는 있지만, 사실 지금은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화산의 삼대제자들이 보여 준 활약을 감안하고, 화산 내에서 화정검이 가지는 입지를 생각했을 때, 무진에 대한 비무의 요청이 그리 무리하게 만은 보이지 않았다.

“음.”

무진 역시 그리 생각했는지 가볍게 송문고검을 어루만졌다.

어차피 청명과 승부를 겨룰 수 없다면, 그를 제외한 가장 강한 이와 붙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도전 받아 주겠…….”

그때였다.

“잠깐.”

허산자가 싸늘하게 무진을 막았다. 목소리가 나지막한데도 기이할 만큼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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