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화. 나는 배분 같은 건 모르고! (3)
허산자는 당혹한 진현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졌다? 졌다고……?’
진현은 무당의 이대제자 중 제일기재로 인정받아 검룡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그런 그가 화산의 이대제자도 아니고 삼대제자에게 패하다니.
‘대체 어떻게?’
그래, 패한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산자를 진정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패한 진현이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저건 ‘졌다’고 표현할 수 없다.
‘제압’당했다는 게 더 옳다.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단순히 이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단 사실쯤은 강호의 상식이 아니던가? 그런데 믿었던 진현이 저 화산의 제자에게 이리 간단히 당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으…….”
허산자의 깊은 수양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무당의 제자는 그 수양이 깊지 않은 나이일 때는 비슷한 배분의 타 문파에 비해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건 무당의 무학, 그리고 도가의 무학이 가지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건 같은 배분, 같은 나이일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저 화산의 조걸이라는 자는 명백하게 진현보다 어리고, 배분 역시 낮다. 그런 이에게 패한다는 것은 어떤 변명도 가져다 댈 수 없는 참사였다.
‘대체 이 일을…….’
그때였다.
“뭐 그렇게 억울한 표정 지으실 건 없어요.”
허산자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비무대 위에 선 조걸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건 승리로 안 치는 거니까요.”
허산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화기가 솟으니 절로 이가 갈렸다. 뼈가 으스러질 지경으로 꽉 쥐여진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수치가.’
차라리 당당하게 패배하는 쪽이 나을 뻔했다.
승리로 치지 않는 승부라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승리로 치기에도 창피한 대결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그런 의미로 시작한 승부는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지켜보는 이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당의 이대제자가 화산의 삼대제자와 승부를 겨룰 자격조차 되지 않는다니. 이 승부 하나만으로 그가 그렸던 비무는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허산자는 떨리는 눈으로 관객들을 훑었다.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다들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다. 이 승부의 결과가 저들에게도 충격 그 자체란 뜻 아니겠는가?
‘이 일을 대체 어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허산자조차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도 조걸의 입은 쉬지 않았다.
“빨리 다시 시작하면 좋겠네요, 몸이 식기 전에.”
무당 제자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새끼 일부러 저러는 거지?”
“무조건입니다. 장담합니다.”
“……애가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됐지?”
“근묵자흑이라지 않습니까.”
윤종은 ‘그리고 솔직히 사숙도 요새 저거랑 별다를 게 없습니다.’ 하고 덧붙이려다가 꾹 참았다. 이건 괜히 말해 봐야 타박만 받을 게 분명했다.
선봉으로 나서서 상대를 도발하고, 속을 긁어 놓는 게 오늘 조걸의 역할이었다. 문제는 그 역할을 너무 과도하게 잘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변방을 지키라고 장수를 보내 놨더니, 어느새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있는 형국이랄까.
이 기괴한 상황에 놀란 것은 비단 무당뿐만은 아니었다.
“와…… 조걸 사형이 검룡을…….”
“저렇게 쉽게?”
화산의 제자들도 이 결과에 깜짝 놀라 연신 눈을 끔뻑였다.
물론 그들은 조걸을 잘 알고 있으니 검룡에게 쉽게 지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화산오검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화산의 제자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검룡을 저렇게 완전히 발라 버릴 줄은 몰랐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당이 생각보다 별게 아닌 건가?”
“아니지, 인마! 조걸이가 센 거야! 검룡이 약할 리가 있나!”
“그, 그렇죠?”
모두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단 얼굴로 웅성거리는 걸 보며 백천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애초에 화영문에서 마주했을 때도 진현과 조걸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그때 맞붙었다면 조걸이 패할 확률이 구 할은 넘었겠지만, 그래도 승부를 겨뤄 볼 정도는 됐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수련?
그래, 물론 수련을 했겠지. 진현도 제 나름으로는 뼈를 깎는 수련을 했을 것이다.
‘그게 진짜로 제 나름이라는 게 문제지.’
저 망할 청명이 놈이 오기 전에는 그도 수련이라는 게 사람을 그렇게 지옥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백천은 무당이 아무리 고된 수련을 했다 해도 그 강도가 화산의 반에도 채 미치지 못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반이 뭐야, 빌어먹을. 반의반도 안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 둘 사이의 차이는 수련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
진현이 무당 안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을 동안, 조걸은 몇 번이고 목숨을 건 실전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대했던 이들은 언제나 그보다 더 강한 이들이었다.
진현이 만인방의 무력대들과 목숨을 걸고 겨뤄 봤겠는가? 아니면 북해빙궁의 궁도들과 전쟁을 치러 봤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저 마교의 교도들과 싸워 봤겠는가? 마교의 주교가 날리는 장력을 몸으로 받아 내 봤겠는가?
둘 다 명문이라는 이름하에 있지만, 그 이름으로 피워 낸 과실은 전혀 다르다. 진현이 화단 안에서 그저 곱게 피어난 꽃이라면 조걸은 칼바람을 맞으며 억세게 자라난 잡초다.
같은 재능과 동급의 무학을 가지고 시작했다 한들, 그 과정이 다르니 성장이 같을 리가 없다.
“무학을 뿌리부터 올바로 익히고, 뼈를 끊는 고련을 하고, 실전에서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이것이 조걸이 거쳐 온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조걸을 더없이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금 오검을 제외한 나머지 화산의 제자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결국엔 화산 전체가 더 단단해질 것이다.’
이 비무를 기점으로 더욱더.
“비무 하시던 분들 어디 가셨나?”
“…….”
앞에서 너스레를 떨어 대는 조걸을 보며 백천이 고개를 뚝 떨궜다.
단단해지는 건 좋은데…….
저런 부분까지 청명이를 닮지는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응? 조걸아.
응?
조걸이 무당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턱짓했다.
“그래서 누가 나오신다고요?”
허산자가 이를 갈아붙이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뒤에 있던 무진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그리 크지 않은 발소리였지만, 이는 흥분해 있던 무당파의 제자들의 의식을 환기하기에 충분했다.
“장로님.”
“으음.”
허산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진에 비해 쉬이 경거망동하는 성격이라서 이리 쉬이 평정을 잃는 건 아니었다. 무진은 스스로의 일만 돌보면 되지만 허산자는 이 비무의 여파까지 생각을 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몰릴수록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다급해질 수밖에 없다. 무진은 이를 충분히 이해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무진아?”
무진은 차게 굳은 얼굴로 조걸을 올려다보았다.
“분위기가 넘어갔습니다. 다음에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지켜보는 이들은 화산이 무당을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머릿속으로는 ‘화산이 무당을 뛰어넘었다’라고 표현했지만 허산자의 앞에서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으음.”
허산자는 침중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무언가가 분명 필요했다.
승리라는 것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역시 중요하다.
적과 치열하게 드잡이한 끝에 얻어 낸 신승과, 잃은 것이 없는 압승을 같은 결과라 할 수는 없다.
하나…….
“너는 괜찮겠느냐?”
무진은 무당 일대제자의 수좌와도 같다. 그런 이가 화산의 삼대제자를 상대한다는 것이 과연 그 격에 맞는 일이겠는가?
사문은 필요에 따라서 그런 일도 요구할 수 있겠지만, 받아들이는 무진의 입장에서는 수치심을 느끼고도 충분할 일이었다.
하지만 무진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담담히 말했다.
“사문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무진아…….”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화산신룡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면 사문이 가장 필요로 할 때 나가는 게 옳았다.
“기다리십시오, 사형.”
그 순간 뒤쪽에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호(無湖)?”
사제인 무호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고개를 젓더니 무진을 말렸다.
“사형께서 나가실 일이 아닙니다.”
“…….”
“지금 승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당삼검이 나가 승리한다고 해서 저들이 우릴 다시 보겠습니까? 되레 화산의 삼대제자를 상대하기 위해 무당삼검까지 내보내야 했다고 조롱을 받지 않겠습니까?”
“…….”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저 녀석을 콧대를 꺾어 주고 돌아오겠습니다.”
“음.”
무진이 의견을 구하듯 허산자를 바라보자 그 역시 무호의 말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래. 가거라. 무당의 일대제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저 방자한 아이에게 똑똑히 알려 주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호가 검을 한 손에 잡은 채 예를 표했다. 그러더니 주저 없이 몸을 비무대 쪽으로 돌렸다.
“진현.”
“…….”
“진현!”
“예! 예, 사숙!”
패배의 충격에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던 진현이 화들짝 놀라 무호를 보았다.
“상심할 것 없다.”
“…….”
“지금 너는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너의 패배는 진정한 패배가 아니다. 내가 그걸 증명해 주마.”
마지막으로 진현을 일별한 무호는 당당한 걸음으로 비무대로 향했다. 비무대 위에 있던 조걸은 영 실망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쪽이에요?”
무호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조걸의 말을 듣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망했는가, 도우?”
“실망은 아니죠. 제 주제에 무당의 일대제자 분과 검을 섞어 볼 수 있다는 건 더없는 영광이니까요.”
“호오?”
의외의 말에 무호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조금 전까지 까불거리던 태도와는 다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그럼 아까는 왜 무진 사형을 고집했는가?”
“기왕이면 목표는 높은 게 낫죠.”
조걸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붙어서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일 센 사람과 붙어야 배우는 게 있잖아요.”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왕이면 이기는 게 더 좋은 건 당연하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무호의 두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천둥벌거숭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로 생각이 깊지 않은가.
자유분방하고 무례한 태도와는 별개로, 저 어린 도사는 자신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이게 화산의 기질인가?’
하긴, 그러니 여기까지 와 무당의 앞에 서 있겠지.
“좋은 목표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군.”
“천만에요.”
조걸은 손에 든 검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한없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되었든 최고의 적은 지금 내 앞에 선 사람이죠.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무호의 입술 끝이 올라가며 호선을 그렸다.
“나 역시 무시하던 마음을 깨끗이 버리도록 하지. 좋은 승부를 펼쳐 보세.”
스르릉.
뽑혀 나온 무호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조걸에게로 향했다. 딱히 위협적이지 않은 간결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묵직했다.
조걸의 검 역시 가만히 무호를 겨누었다. 가볍고 날카로운 기세가 스며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마주보던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아아아앗!”
“하아아아아압!”
무당의 검과 화산의 검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