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산은 넘어야 의미가 있는 거지. (3)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전?”
“그…… 음, 그렇지. 이렇게 되면 무당파가 화산에 도전하는 게 되는 건가?”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말이나 되는가?”
“허어. 내가 뭐 틀린 말 했는가?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상황이! 막말로 무당이 화산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뭐 하러 비무를 청하는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무당인데!”
상인들 나름대로는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겠으나, 허산자의 귀를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허산자는 저도 모르게 살짝 이를 갈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굳이 금선상단으로 직접 쳐들어오고 상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꺼냈다.
강호의 경험이 크게 없는 화산의 장로들은 이 함정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저 망둥이 같은 놈이!’
저 어린 도사가 그의 계획을 완전히 뒤틀어 놓았다.
물론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임기응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당이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찾아와 면전에서 비무를 청하는데, 그 상황을 냉정하게 보고 되받아칠 말을 순간적으로 찾아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후기지수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문파의 장로들도 무당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긴장하기 마련이다.
평소에 무당 따위는 별것 아니라고 허세를 떨어 대던 이들도 허산자와 무당의 제자들을 앞에 두면 눈앞이 캄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놈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기에 이리 태연하게 무당을 역으로 함정에 빠뜨린단 말인가?
‘검총에서부터 보통 놈이 아니라 생각은 했건만.’
허산자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말이라는 것은 물과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지금 그가 어떤 말로 면피하려 해도, 저 상인들의 머릿속에 틀어박힌 도전이라는 말이 지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도전이라…….”
허산자가 어떻게든 수습하려 입을 여는 순간 청명이 또다시 선수를 쳤다.
“네, 뭐 자연스러운 일이죠. 사실 무당이 유명하긴 하지만, 역사는 좀 짧잖아요. 화산이 도가의 선배니까 그 정도야 도와드릴 수 있……. 읍! 읍읍! 읍! 뭐, 뭐……. 으으읍!”
결국 청명을 붙들고 있던 백천 무리가 기겁하며 청명의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심지어 백천은 어디선가 준비해 온 천을 청명의 입 안에 마구 쑤셔 박고, 남은 건 입 주위로 빙빙 돌려 감아 버렸다.
“하…… 하하. 죄송합니다. 이놈이 더위를 먹었는지……. 아, 덥다, 더워.”
기다렸다는 듯, 아직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백천은 그래도 덥다는 듯 연신 손부채질을 해 댔다.
그 광경을 보던 허산자의 얼굴이 마침내 뒤틀렸다.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온화함을 가장하며 유지하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진 것이다.
‘저놈이…….’
무당이 화산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바로 역사 운운하는 것이다.
화산은 중원 도가의 적통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전진파. 그중에서도 천하에 이름 높은 전진칠자(全眞七子)중 하나인 학대통(郝大通)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다른 전진칠자들이 세웠던 유파들이 모두 쇠락한 지금, 전진의 명맥을 이은 도가의 적통은 단연코 화산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무당은 삼봉진인(三丰眞人)이 말년에 개파 한 곳으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뒷맛이 쓴, 그래서 언급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저 망할 놈이 그 부분을 콕 집어 입을 털어 댄 것이다.
그것도 남들이 다 듣는 곳에서.
“하하……. 죄송합니다, 장로님. 제자라고 거두어 놓고는 제대로 가르치질 못해서…….”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밉다고 했던가?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하는 현상을 보고 있자니 허산자는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차라리 저 망할 놈이 대놓고 무당을 무시하거나, 이 장로들이 허세를 떨어 댔다면 이렇게 속이 뒤집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제일 듣기 싫은 말을 슬슬 꺼내 가면서 사람 속을 깔짝거리고 있다. 허산자의 오랜 수양이 이 교묘한 짓거리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린 제자가 멋모르고 한 말에 화를 낼 만큼 제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닙니다.”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
“푸아아아아앗!”
그 순간 청명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천이 무참히 찢겨 나가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뭐? 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으아아아아! 빌어먹을 입 좀 다물라고 이 새끼야!”
백천이 일단 양손으로 청명의 입을 다시 틀어막으려 했지만, 청명은 입을 쫙 벌리더니 그의 손을 콱 깨물어 버렸다.
“아아아악!”
백천이 손을 부여잡고 물러나자 청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니, 사숙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게 없다니까? 사문의 역사를 알아야지! 내가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삼봉진인도 따지고 보면 화산의 제자라니까? 장삼봉이 섬서 화산에 올라서 화룡진인께 사사하고 그걸 바탕으로 무당파를…….”
“입! 입! 입!”
이젠 청명의 팔다리를 움켜잡았던 제자들까지 식겁하여 청명의 입을 막았다.
윤종과 조걸이 청명의 입을 틀어막고, 유이설이 그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심지어는 백아마저 작은 두 앞발로 청명의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읍! 으으으읍! 으읍!”
청명이 눈을 부릅뜨고 저항을 해 댔지만,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도 전에 없이 필사적이었다.
청명이 어느 정도 제압이 되자 현상이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미안함을 절절하게 담아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아이가 뭘 몰라서……. 제가 확실하게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허산자는 아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말도 나오지 않는다더니, 지금 딱 그런 심정이었다.
지금 그가 열이 끝까지 오른 이유는 청명이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 아니다. 저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역시 조사의 행적을 정확하게 모두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말들 중에 무당의 조사 장삼봉이 섬서의 화산에서 화룡진인에게 사사받았다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기는 했다.
‘빌어먹을.’
그렇기에 더더욱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도가의 뿌리가 화산에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지니 말이다.
허산자의 눈이 다시금 상인들 쪽을 훑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표정을 보니 허탈함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검만 무서운 줄 알았더니.’
검총에서 보여 준 신기와 비무대회에서 보여 준 활약을 감안하면 저 화산신룡을 중원 최고의 기재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본 결과, 화산신룡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저 세 치 혓바닥이었다.
허산자는 화산의 장로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죄송해 어쩔 줄 모르는 현상과는 달리,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현영의 얼굴에는 속 시원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보라고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화가 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뿌드드득.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허산자는 움찔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멍청한……. 이런 속이 빤한 격장지계에 당해서 뭘 하겠다는 건가!’
평소의 그라면 이만한 일에 화를 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저 청명이라는 어린 도사 놈에게는 사람 속이 뒤틀리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같은 말도 저 얼굴과 저 어투가 더해지는 순간 같은 말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다.
“후우.”
짧게 숨을 내쉬어 마음을 진정시킨 허산자는 다시 차분하게 화산의 장로들을 보았다.
노기에 찬 마음으로 비무를 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요원할 터. 지금은 일단 그부터 진정해야 했다. 그래야 제자들도 화를 가라앉힐 테니까.
“하하하. 그렇지요. 그렇기에 한 수 배운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어떻습니까? 화산 역시 같은 도가문과 교류해 본 일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 기회에 저희 무당의 제자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으으음.”
현상이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 말했다.
“제안에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허산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여기서 물러난다고?’
그럴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이는 장문인께서 계시지 않은 자리에서 쉬이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화산의 장문인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고 해도 반대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일은 제자들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슬슬 물러설 곳을 좁혀 버리는 허산자의 말에 현상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화산은 무엇 하나 홀로 결정하는 일이 없는 문파입니다. 귀문에서 주신 제안은 잘 이해했으니, 제자들과 함께 논의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일을 두고 제자들과 논의를 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알기로는 여러분이 화산의 둘뿐인 장로인 것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당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화산은 그러합니다. 더 오래 살았다 해서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직위가 더 높다고 해서 더 현명한 것은 아니니까요.”
허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체 어느 문파가 장로들이 제자들과 상의해 문파의 대소사를 결정한단 말인가?’
이건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러니 잠시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 필요하다면 그리하십시오.”
현상은 짧게 포권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현상이 뒤쪽으로 다가가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화산의 제자들이 우르르 주위로 몰려들었다. 과연 그 말이 허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허.”
허산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극심한 위화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역시 몸을 돌려 제자들에게로 다가갔다.
“장로님.”
무진이 앞으로 나서며 슬쩍 입을 열었다.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허산자가 그에게 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무진.”
“예.”
“저들은 결국 이 비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
“그러니…….”
그는 살짝 입술을 짓씹다 말을 이었다.
“처음 계획했던 정도로 끝내지 마라. 완전히 박살을 내어 놓아야 한다!”
단호한 목소리에 무진이 움찔했다.
“……그렇게나 말입니까?”
“그렇다.”
“하나 저들은 아직 이대제자들입니다. 물론 일대제자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해를 못 하는구나.”
“……예?”
“이치와 도리를 따지지 말고 반드시 뭉개 놓아야 한다.”
무진이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장로님의 이런 얼굴은 처음 보는군.’
언제나 여유로움과 온화함으로 가득했던 허산자의 얼굴이 전장에 나선 장수처럼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차마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허산자는 화산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인 화산의 제자들이 왁자지껄 뭐라 떠들어 대고 있었다.
-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있더냐?
‘장문인.’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나 허도진인은 그가 보지 못했던 것을 그 자리에 앉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옳게 흐르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나 그 흐름의 기세가 만만찮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이란 결국 어떻게든 흐르는 법. 옳은 방향이든 옳지 않은 방향이든 결국에는 강이 될 것이다.
‘피를 봐서라도 여기에서 막아 낸다.’
허산자의 눈에 차가운 살기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