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605화 (603/1,567)

605화.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5)

“여기 있습니다.”

“아이고,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손을 꼭 잡아 오는 노파를 보며 윤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다 산적 놈들이 훔쳐 갔던 재물입니다.”

“그래도…….”

노파가 주름진 눈가를 훔치자 조걸이 고개를 쏙 내밀고는 말했다.

“헤헤. 할머니! 이게 화산파에서 드리는 거라는 걸 꼭 기억해 주세요!”

“너는 조용히 해라.”

“……눼.”

도끼눈으로 조걸을 한번 흘겨본 윤종이 노파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이고. 내가 밥이라도…….”

“아니에요. 진짜 괜찮습니다.”

그리고 뭐라도 주려 하는 노파를 극구 만류하며 뒷걸음질로 집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몸을 돌려 아주 멀어질 때까지 노파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은 어디지?”

“저 앞쪽이라고 했는데요. 오 리 정도 더 가야 합니다.”

“흐음.”

윤종은 슬쩍 시선을 돌려 조걸의 얼굴을 살폈다.

민심은 바닥부터 잡아야 한다는 청명이 놈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지금 무한이 아닌 성 바깥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곡식을 나눠주는 중이었다.

둘뿐만 아니라 다른 화산의 제자들도 저마다 짝을 지어 곡식 수레를 하나씩 끌고 다니며 무한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돌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네?”

윤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웬일로 네놈이 불만 없이 일하는구나. 평소 같았으면 이런 일을 꼭 해야 하냐고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었을 텐데.”

“에이. 제가 무슨 청명이 놈도 아니고.”

조걸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어느덧 멀어진 노파의 집을 슬쩍 돌아보았다.

“사실…….”

“응?”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협의가 뭐고, 이런 걸 왜 해야 하는지.”

“…….”

“협의라고는 하지만, 이건 그냥 청명이 놈이 무당을 엿 먹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저 화산에 좋은 일일 뿐이죠.”

윤종은 대답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래서 뭐 제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없는데…….”

다시 앞을 보던 조걸이 겸연쩍은 얼굴로 툭 내뱉듯 말했다.

“그냥 뭐랄까…… 곡식을 나눠 주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뭐가 좀 간질간질한 게.”

나지막이 헛기침까지 하는 걸 보니 이런 것들이 잘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좀 그러네요.”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윤종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거면 된 거다.”

“……예?”

“나는 협의에 반드시 하나의 형태만 있다 생각하지 않는다.”

“…….”

“네가 말한 대로 희생을 전제하는 것도 협의겠지. 하지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해서 그게 협의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어렵습니다.”

조걸이 윤종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윤종은 조금 더 풀어서 말을 해 주기로 했다.

“이건 그저 화산에 좋은 일이라고 했느냐?”

“예. 일단 제 생각에는…….”

“그럼 더 좋은 것이 아니더냐?”

“예?”

윤종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도 좋고, 다른 이들도 좋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지. 이번 일로 화산이 이득을 보아서 양민들이 피해를 입었느냐?”

“그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곡식을 나눠 주었으니 호북의 백성들 역시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이 없었다.

“나를 희생해 이루는 협의는 더없이 빛나고 가치 있겠지. 하지만 나의 희생이란 결국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 희생이 내도록 이어진다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윤종의 부드러운 얼굴은 흡사 봄날의 훈풍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옳은 협의란, 나의 이득이 다른 이들의 이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오래, 더 많은 협의를 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

조걸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이는 과거 윤종이 야수궁주의 앞에서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 화산의 영광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좀 더 편히 만든다면, 화산의 모든 제자들은 당당히 그 영광을 자랑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그저 화산만의 영광에 머무른다면, 화산은 그저 언제든 다른 문파로 대체되어도 상관없는 무파가 될 뿐입니다!

그때의 그 외침이 조걸의 안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사형이 빈말을 했던 게 아니었구나.’

무언가를 한다 하여 티를 내지도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하자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윤종은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해냈고, 그와 동시에 제 안의 도 역시 지켜 내고 있었다.

‘화산의 영광이 세상의 영광이라.’

거창한 말이다.

하지만 윤종의 입에서 나오면 그리 거창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해내며, 마음속의 도를 이루어 갈 것이다.

소처럼 우직하게 말이다.

“……못 당하겠네?”

“응?”

“아닙니다, 아무것도.”

조걸은 피식 웃었다.

그때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인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아직은 조금 모호하지만 말이다.

다만…….

“사형이 말씀하신 화산을 이뤄 나가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청명이 놈이라는 점이 좀 걸리는데…….”

“…….”

그러자 부드럽던 윤종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청명이 놈이 그런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겠지.”

“그럼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주,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더냐!”

도인이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조걸은 굳이 그런 윤종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라니까.’

청명이 놈이 하는 일은 항상 그렇다.

그놈에게 타인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존재할 리 없으니, 그놈이 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화산의 이득을 위한 일이거나 다른 문파를 엿 먹이기 위한 일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편협한 마음으로 벌인 일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득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놈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린 양반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겠지.’

그러나 어쨌든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지 않은가?

청명이 놈은 운남의 빈곤을 해결했고, 북해의 위기 역시 해결해 냈다. 그리고 이제는 호북을 구휼하고 있다.

행적만 보면 마치…….

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조걸의 얼굴이 미미하게 뒤틀렸다.

“……저 혹시 말입니다, 사형.”

“응?”

“시간이 지나서, 먼 훗날의 누군가가 지금 화산의 행적을 되돌아보면요.”

“보면?”

“청명이 놈이 천하에 다시없는 협의지심을 가진 영웅쯤으로 보이는 것 아닙니까?”

“…….”

윤종의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서, 설마…….”

“아, 아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훗날의 후예들이 청명이 놈의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은지, 그놈이 얼마나 막돼먹은 인간인지 알게 뭡니까? 결국 남는 건 업적과 행적인데.”

“…….”

“그런데 그것만 놓고 보면…….”

“그만. 거기까지.”

이 이상은 천하의 윤종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끔찍한…….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거기까지 하고 하던 일이나 빨리 마저 하자꾸나.”

“…….”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윤종을 보며 조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영웅이라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 * *

빈 수레가 연이어 금선상단의 정문을 통과했다.

화산의 제자들이 상단의 한쪽에 깨끗하게 비운 수레를 줄맞춰 대고는 쪼르르 현상 쪽을 향해 달려갔다.

“장로님! 모두 나눠 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았구나.”

“저희도 맡은 마을을 모두 돌았습니다.”

“그래, 그래. 고생했다.”

현상이 빙긋 웃어주자 현영이 뚱한 표정으로 말한다.

“떼어먹거나 어디다 팔아 치운 건 아니겠지?”

“너는 좀 조용히 하거라.”

“그냥 농담…….”

“조용히 하래도.”

“……예.”

한편 뒷짐을 지고 제자들을 바라보는 두 장로 뒤에서, 금선상단주 송태악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묘하단 말이야.’

보면 볼수록 이 문파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장로쯤 되는 이들은 문파의 일에 사사건건 관여하기 마련이다. 그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문파들은 하나같이 그랬다.

하지만 이 화산이라는 문파의 장로들은 그저 제자들의 일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격려하고 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송태악도 한 상단을 운영하는 입장이다 보니 아랫사람들의 일에 입을 대지 않고 묵묵히 믿으며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디 장로들뿐이던가.

장로들의 뒤를 지키고 있는 일대제자들도 다들 제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있다.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할 만한 나이임에도 말이다. 오히려 그러다 보니 어린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책임감을 느끼며 의욕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새였다.

‘어쩌면 이게 화산이라는 문파가 천하에 이름을 날리게 된 원동력일지도 모르겠군.’

송태악이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빈 수레들이 계속해서 상단 안으로 들어왔다.

“읏차!”

마지막으로 돌아온 조걸이 수레를 대고는 씩씩하게 외쳤다.

“모두 복귀했습니다!”

“수고 많았다.”

현상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다들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하구나.’

첫 실전을 치르고 녹림의 산적들을 물리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들의 얼굴에 어린 감정과 그때의 감정은 조금 결이 달랐다.

‘기껍도다.’

그 힘든 수련을 이겨 내고, 살벌한 실전을 거쳤음에도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아직 타인을 돕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크게 남아 있다.

현상은 그 사실이 너무도 기껍고 자랑스러웠다.

“그럼 이제 대충 끝난 것이냐?”

현상의 물음에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한 곡식은 모두 나눠 줬습니다. 무한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낸 것이지요.”

“음.”

현상이 가볍게 주억거리고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명아.”

“네.”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면 되겠느냐?”

“흐음.”

청명이 뺨을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예, 뭐. 이제 더 할 건 없네요.”

“그럼 출발은 언제가 괜찮겠느냐?”

“내일 하시죠.”

“내일?”

의외의 대답에 현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다들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고단했을 테니 오늘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청명은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제자들의 사정을 봐줄 이가 아니었다.

시간은 금이요, 나태는 죄악이라 외치며 당장 화산까지 전력으로 뛰어간다고 소리치고도 남을 놈이 내일 출발이라…….

“무슨 생각이 따로 있느냐?”

“뭐 그런 건 아닌데…….”

청명은 살짝 뜻 모를 얼굴로 웃었다.

무언가를 아직 숨겨 둔 듯한 표정에 백천과 그 일행의 얼굴이 불안함으로 일그러졌다.

‘저거…… 분명히 음모 꾸밀 때의 얼굴인데.’

‘이젠 저 얼굴만 봐도 심장이 쪼그라든다.’

‘여기서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저거 지금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이들의 불안을 알 길 없는 청명은 그저 히죽 웃으며 답했다.

“시간을 끌 만큼 끌었으니 손님이 올지도 모르겠다 싶어서요.”

“손님?”

“네.”

현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라니. 섬서도 아닌 곳에서 화산에게 찾아올 손님이 누가 있단 말인가?

“혹 네가 누구를 부른 것이냐?”

“음.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으응?”

내내 뚱딴지같은 소리만 늘어놓으니 현상의 눈이 슬그머니 가느스름해졌다.

그때였다.

“상단주님!”

누군가가 다급하게 정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송태악이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크, 큰일입니다!”

“응?”

“소, 손님이…… 손님이 오고 계십니다!”

“손님이라니. 누굴 말하는 것이냐?”

그리고 상단에 손님이 온다는데 그리 다급할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려던 송태악은 그 다음 말에 턱이 떨어져라 입을 벌렸다.

“무, 무당! 무당파가 오고 있습니다!”

흡사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청명에게로 획 돌아갔다.

청명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히죽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낄낄낄낄. 무당 장문인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었나 봐!”

“…….”

아니…….

이 새끼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모든 화산 문하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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