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4)
“……뭘 하고 있다고?”
허도진인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했다.
“그게…….”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허산자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물론 딱히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허도진인의 노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무한에…… 곡식을 뿌려 대고 있습니다.”
“무한에?”
“……예. 그…… 대별채에서 회수한 재물들이니 호북의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톡.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허산자가 시선을 슬쩍 들었다. 허도진인의 손가락이 가볍게 다탁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무한에……. 다른 곳도 아닌 무한에?”
“…….”
“요망한 짓들을 하는구나.”
수염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이 살짝 거칠었다.
“무한에 어려운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그 곡식을 하필이면 무한에 푼단 말이냐. 어려운 이들을 구휼할 것이라면 호북의 다른 곳을 찾았겠지.”
“하면…….”
“그래. 이건 대놓고 호북에서 화산의 영향력을 넓히겠다는 수작이로구나.”
허산자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장문인. 저들은 이미 중원의 서부에 거점이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호북까지…….”
“영향력이라는 게 꼭 지배력을 의미하진 않는다.”
허도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화산은 호북에서의 지배력을 굳이 높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호북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만 약화시켜도 그만이지.”
“약화라 하셨습니까?”
“사람이란 언제든 비교를 일삼지 않느냐. 섬서를 거점으로 삼는 화산이 호북에 와 산적을 퇴치하고 심지어는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같은 도문인 무당은 그동안 대체 뭘 했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겠느냐?”
허산자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그건 일시적인 문제가 아닙니까? 그동안 무당이 호북에 해 온 것이 있는데.”
“어리석은 말을 하는구나.”
허도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본디 사람이란 지난 일보다 새로운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관심을 가지는 법이다. 지금까지 무당이 호북에 베풀었던 것은 저들에게 이미 당연한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게지. 문제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 찌르고 들어오는 화산이지.”
말을 마친 허도진인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현종 그자가…….’
그가 봐 온 현종은 이렇게까지 계산이 빠른 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틀렸거나, 아니면 이 일을 주도하는 자가 화산에 따로 있거나.
어느 쪽이건 무당의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지금 화산은 말도 안 되는 기세로 천하에 그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높아진 명성을 주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계산속 빠른 이가 화산에 존재한다는 건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하, 하면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도 구휼을 한다거나…….”
허도진인이 눈을 찌푸린 채 허산자를 노려본다.
“이제 와 우리가 구휼을 시작한다면 세인들이 뭐라 하겠느냐? 무당이 뒤늦게 화산을 따라한다는 말이나 들어야겠지. 이건 산적의 잔당을 정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
“잠시 민심을 붙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최악의 수다. 무당이라는 이름은 결코 화산의 뒤에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 아니더냐!”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장문인.”
허도진인이 다탁을 두드리던 손으로 무릎을 꽉 움켜잡았다.
“화산…….”
배 속에 기다란 대침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 화산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저 따끔한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리 화산에 촉망받는 기재가 있다 해도, 저렇게나 철저히 망해 버린 문파가 기재 하나로 다시 일어서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 했으니까.
그러니 그저 마지막 발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따끔하고 거슬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던 침이 점점 커지더니 이제 위장을 찔러 출혈을 일으키는 대침이 되어 버렸다.
더 큰 문제는, 이 침이 언제 더 커져 위장뿐 아니라 심장을 파고들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무량수불.”
허도진인이 낮게 도호를 외었다.
나름 깊은 수양을 이뤘다고 자부했건만, 화산이라는 이름은 늘 그의 수양을 인정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장문인.”
그때 허도진인의 눈치를 살피던 허산자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제가 불민하여 장문인의 심기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도 화산의 기세는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화산은 화산이 아닙니까.”
“…….”
“무려 백 년간이나 제 입지를 되찾지 못했던 문파입니다. 문파라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좀 쓸 줄 알고, 조금 강하다고 해서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 만큼 간단히 굴러가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허도진인은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허산자의 말에 속이 갑갑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태 그가 논의를 하자고 도움을 청했던 다른 구파일방에서 돌아온 대답도 대부분 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있더냐?”
“……예?”
“이치란 흐르는 물과 같다. 산 위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물을 막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작은 시냇물을 이룬다 해도 이는 조금만 노력하면 막을 수 있다.”
조금 뜬금없는 말이다 싶었지만 허도진인의 표정이 워낙에 진중하여 허산자도 일단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물이 흐르고 또 모여 내를 이루고, 그리하여 강을 이루게 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막아 낼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둑을 만들고, 저수지를 판다고 해도 결국 물은 넘쳐나지 않느냐.”
“…….”
“강을 이루고 나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 그때 가서 세울 대책이 있더냐?”
망연히 듣던 허산자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강을 이루면 막을 수 없다니.’
그 말인즉슨, 허도진인은 화산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언젠가는 무당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여기고 있단 의미가 아닌가?
‘화산이 그렇게까지?’
허산자는 과거 검총에서 보았던 청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보았을 때만 해도 무당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건만…….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허산자의 물음에 허도진인은 대답 대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소림은 모른다.
그들은 화산에 짓눌려 본 적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자신들의 위에 설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구파 역시 이유야 다르지만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위에는 언제나 몇몇 문파가 존재했다.
저 화산의 약진에 경계심이 서고 등이 가려운 것은 오직 두 문파뿐이었다.
무당, 그리고 종남.
종남은 이미 화산을 막지 못하고 봉문에 들었다. 물론 종남을 어디 무당에 비하겠냐마는 시간이 좀 더 흘러 무당 역시 같은 꼴이 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윽고 정면을 바라보는 허도진인의 눈에 도인답지 않은 한기가 어렸다.
“우리라도 그 기세를 꺾어야겠지.”
그 서늘한 기운에 허산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장문인…….”
“허산.”
“예.”
“나는 도를 좇는 이다.”
허도진인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나는 도인이기 이전에, 무당의 장문인이다. 내게 도인으로서 본분을 지키는 것과 무당의 영화를 지켜 내는 것 중 하나만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무당의 영화를 선택할 것이다.”
“……장문인.”
“설사 그것이 무력으로 같은 도문을 핍박하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허산자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무당.
무파이기 전에 도문이다. 조사인 삼봉진인 때부터……. 아니, 그 이전 삼청궁이 세워지고 무당에 도사들이 모여들 때부터 그들은 도인으로서의 본분을 어기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때문에 지금 허도진인의 말은 도인이 입에 담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에 담는 허도진인의 심정을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이러면 천하가 어찌 되는 것인가?’
화산은 이미 당가를 비롯한 문파들과 연합하여 서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구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무당이 화산을 적대하고 나선다면 서부의 서부맹과 구파일방 사이의 불화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민할 것 없다.”
“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모르는 게 아니다. 하나 결국은 이리될 일이었다. 화산과 무당은 언제나 그런 관계였지. 두 문파가 나란히 공존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산의 기세가 흘러넘칠 때 무당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야 했고, 무당이 천하를 오시할 때는 화산이라는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졌었지.”
“…….”
“그 자연스러운 이치가 다시 한번 돌아온 것뿐이다.”
가만히 허산자를 바라보던 허도는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협의를 베풀고 구휼을 하는 자를 그저 힘으로 누르려 한다면 당연히 돌아오는 시선이 곱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누르려 하지 말고 그저 보여 주어라. 아직 무당이라는 이름은 저 화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태산 위에 있음을!”
잠시간 혼란하던 허산자의 눈빛도 어느새 단호해졌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허도진인이 적어도 틀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다녀오겠습니다.”
“삼검(參劍)을 모두 데리고 가거라.”
“무진도 말입니까?”
허도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도 자신의 실책을 만회할 때가 되었지. 무당삼검이라면 화산의 아이들에게 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화산신룡의 무력은…….”
화산신룡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허도진인의 얼굴이 차게 굳어졌다. 속에 가시가 하나 더 박힌 기분이 들어서였다.
‘도리가 없구나.’
비무대회에서 확인했던 화산신룡의 무력은 무당의 후기지수 중 누구도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천하에는 후기지수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화산신룡과 소림의 혜연만은 한 차원 다른 곳에 올라 있었다.
“허공(虛空)을 데려가거라.”
“허, 허공을 말입니까? 장문인! 허공은 장로입니다! 아무리 화산신룡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장로를 보내 그 아이를 상대하게 하는 것은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굳이 우리가 상대하게 할 것 없다.”
“예?”
“내가 아는 화산신룡이라면, 적당히 긁어 주는 것만으로 제가 스스로 나설 것이다. 그 아이의 호승심이라면 굳이 무자 배와 손을 섞으려 하지 않을 터.”
“…….”
“아이에게 도전하는 것은 수치이나, 오는 도전을 받아 주는 것은 수치가 아니겠지. 그저 허공이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자연히 일이 벌어질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허산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적은 하나다.”
허도진인의 눈에 광망이 어렸다.
“지금 세상은 화산을 높이 평가한다. 하나 그건 오롯이 화산의 실적 때문이 아니다. 세인들이 화산의 약점을 모르기 때문이다.”
“…….”
“화산을 지탱하는 것은 어린 후기지수들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하거라. 명성이란 지탱할 힘이 없다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산 스스로 알게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장문인.”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허도진인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무겁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녀오거라.”
“예, 장문인! 명을 완수하고 오겠습니다.”
허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던 그는 저도 모르게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하지만 결국 마음속에 든 의혹을 차마 입으로 내지 못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탁.
밖으로 나서서 문을 나서니 맑은 하늘이 시야에 들어찼다.
- 그러지 못한다면…….
장문인은 그 뒤에 무슨 말씀을 하려 했을까.
짐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허산자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