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2)
촵촵촵촵!
촵촵촵촵촵!
그건 ‘먹는다’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차라리 ‘흡입한다’ 혹은 ‘분쇄한다’라는 표현이 조금 더 걸맞아 보였다.
문제는 그 ‘분쇄’ 과정을 몸소 보여 주는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기 오리고기 추가!”
“술! 술도 더 주세요! 술!”
“이 새끼가 내 고기에 손을 대?”
“네 고기 내 고기가 어디 있습니까!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접시가 거의 날다시피 날라졌고, 음식은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비워졌다. 그러면 새로운 접시가 날아오기를 반복했다.
“아우! 그래, 이게 사람 먹는 음식이지!”
“산채에서 풀만 뜯다가 고기 뜯어 먹으니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술 더 달라니까요! 술!”
송태악은 그저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였다.
‘전부 걸신이 들었나.’
우락부락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떼로 와서 그의 식자재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일진대, 정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물을 팔러 온 이들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음식을 먹어 젖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의 송태악이었다면 이런 무례를 결코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평소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저씨! 술이 부족하다니까요?”
“예?”
“술! 술!”
“술? 아, 예! 예, 알겠습니다! 이놈들아! 술이 부족하다시지 않느냐!”
송태악이 눈에 불을 켜고 버럭 소리쳤다. 그 호통에 사색이 된 모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 상단주님. 술이 다 떨어졌습니다.”
“뭐? 술이 떨어져? 우리 창고에서 술이 떨어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 그게 아니라, 식용으로 빼놓은 술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팔 것밖에는…….”
송태악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르긴 몰라도 판매용이 아니라 상단에서 따로 빼놓은 술만 해도 쉰 말은 넘게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양이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동이 나다니.
‘소가 술을 퍼먹어도 이렇게는 안 먹겠다.’
저게 사람인가, 아니면 술 퍼먹는 귀신들인가?
“어, 어떻게 합니까?”
“……납품용은 남아 있다는 거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다 가져와라!”
“사, 상단주님. 그 술들은 귀하고 비싼 것들입니다. 그걸 다 내어 버리면 손해가…….”
“네 이놈!”
송태악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렸다.
“이분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저 대별채를 무찌른 영웅들이시다! 호북을 대표하는 우리 금선상단이 호북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신 영웅들께 대접이 소홀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내가 무슨 염치로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
“그, 그건…….”
“잔말 말고 당장 가져오지 못하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예!”
송태악의 뺨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까워 죽겠네.’
안 그래도 상단의 자금 사정이 영 좋지 않은데, 저 술까지 날려 먹으면 두어 달은 풀떼기만 뜯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송태악은 결국 상인이었다.
상인이란 자고로 과감할 때는 더없이 과감해야 한다. 어설프게 돈을 아끼겠다고 주변 주루에서 술을 구해 온다면 돈은 돈대로 쓰고 마음도 살 수 없을 것이다.
퍼 줄 때는 죽어라고 퍼 줘야 남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당장 술을 가져올 테니 화산의 영웅들께서는 이 송모의 얼굴을 보아 조금만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 아저씨 누군데?”
“몰라.”
“…….”
송태악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배어났다.
‘이것들 진짜 화산파 맞나?’
물론 저 검은 도복과 가슴에 새겨진 매화는 이들이 화산파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 있지만…….
아니.
아무리 봐도 이건 산적이지 않은가?
“오오! 혜연 스님 한 동이 통째로 드신다!”
“우와! 저걸 안 쉬고 한입에 터시네!”
저쪽 구석에서 커다란 술동이를 통째로 들고 들이켜는 민머리 중을 본 송태악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이건 생각한다고 고민한다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크으.”
그때, 등 뒤에서 짧은 탄성이 들려왔다. 송태악은 획 뒤를 돌아보았다.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화산의 장로들 옆에서 병나발을 부는 청명이 보였다.
쪼르르 그쪽으로 달려간 송태악은 등에 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신 굽실굽실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도장님들! 음식은 어떻게,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상이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저 물건이나 좀 팔러 왔을 뿐인데, 이리 환대를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상단주께 더없이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송태악이 정색을 하며 말한다.
“화산파 분들이 대별채를 토벌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호북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화산파 분들께 어찌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굳이 호북의 백성들을 논하지 않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호북성 아래에 떡하니 자리 잡았던 대별채 때문에 금선상단은 대별산을 넘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늘 먼 길을 둘러 상행에 나서야 했다.
버젓이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하던 상로(商路)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그러니 그에 비하면 이 정도 지출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분명 아무것도 아닌데…….
“캬, 이거 술이 제법 괜찮은데?”
“…….”
저 비싼 금존청을 물처럼 퍼먹는 청명을 보고 있으니 위장이 쓰려 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하.”
현영이 기껍다는 듯 웃었다.
“상단주께서 저희 화산을 이리 좋게 봐 주시니 마음이 풍요롭기 한량없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호북의 모든 백성들이 화산을 칭송하길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호북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송태악의 모습에는 진정성이 가득해 보였다.
“크흠.”
“허허.”
상석에 앉은 화산의 장로들이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들이 언제 이런 감사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젊은 시절부터 간절히 바랐었다. 언젠가는 화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협객행을 통해 화산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기를 말이다.
평생 현실에 부딪히며 이룰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꿈이 말년에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니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남달랐다.
하나.
“공치사는 됐고요.”
세상에는 마음이 강철로 만들어져서 감회고 나발이고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계산은 다 끝나셨어요?”
“아…… 가지고 오신 재물들 말씀이십니까?”
“네.”
송태악이 살짝 곤란하다는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가져오신 물건들이 워낙에 가지각색에 양도 많아서 단번에 값을 매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아.”
“하루 이틀 정도만 더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조속히…….”
“쯧.”
청명이 언짢은 얼굴로 먹고 있던 술을 탁 내려놓았다.
“저기요, 상단주님.”
“예?”
“저희가 왜 여기로 왔을 것 같으세요?”
“…….”
목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섬서로 가져가면 저희야 훨씬 편하죠. 그런데 저희가 왜 여기로 왔을까요?”
“그, 급히 처분하실 요량으로…….”
“잘 아시네요. 그런데 뭐요? 이틀?”
“…….”
“에이. 텄네, 텄어. 호북 최고 상단이라기에 뭐 좀 대단한 줄 알았더니. 얘들아, 짐 챙겨라! 집에 가자!”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도장! 이틀이라니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 입에 올렸었습니까? 하루! 하루면 충분합니다.”
“하루?”
청명의 고개가 삐딱하게 꺾였다.
“사형. 조걸 사형!”
“응?”
“근처에 다른 상단 있어?”
“흐음. 호북은 나름 상계의 중심지니까, 금선상단만은 못해도 비슷한 급의 상단이라면 몇 개 더 있을 거다.”
“제일 가까운 데는?”
“바로 근처에 있다. 대붕상단이라고.”
“후딱 짐 싸라. 가자!”
청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송태악이 기겁하며 잽싸게 몸을 날렸다.
“도, 도장! 아이, 왜 이러십니까!”
“놔요. 안 놔?”
청명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며 외쳤다.
“아니, 내가! 좋은 게 좋은 거다 생각해서 왔는데, 이 양반이 누굴 호구로 보나? 뭐, 감정? 감저어어엉? 아, 그래? 말로는 대별채를 토벌한 영웅이니 어쩌니 하면서 동전 한 푼까지 다 계산해서 받아 처먹으시겠다? 에이, 퉤! 내가 앞으로 이쪽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 아이고, 동네 사람드으으으을!”
“그, 그게 아니옵고, 그게!”
송태악의 등에 진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상가가 아무리 이문을 취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진짜 큰 장사를 해 먹기 위해서는 이문 이상으로 평판이 중요하다. 돈만 아는 수전노에게 자신의 전낭을 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으니까.
그런데 만약 화산이 이대로 나가서 금선상단이 돈만 벌어 처먹으려 해서 거래를 못 했다는 말을 해 버린다면 상단 평판이 어찌 되겠는가?
평소라면 거래에서 손해를 볼 리 없는 송태악이지만, 지금 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왔다. 대별채를 토벌했다는 업적에 먹물도 마르지 않은 이들에게 대체 무슨 배짱으로 돈을 논하겠는가?
‘재신(財神)이 들어온 줄 알았더니.’
이건 숫제 마귀가 들어온 꼴이었다. 청명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지, 지금 당장 모조리 매입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얼마에?”
송태악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얼마?’
얼마를 불러야 하지?
솔직히 말해 저 재물들이 대충 얼마쯤 되는지 감을 못 잡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이왕이면 확실한 게 좋고, 될 수 있으면 화산을 조금 더 붙들어 놓고 싶어서였다.
‘이 할쯤 더 쳐주면 되겠지.’
이것들이 도적도 아닌데 설마 더 처먹으려 들겠는가?
“그, 그럼 사, 사백…….”
“예?”
순간 청명의 두 눈이 분노로 희번덕거렸다.
“사, 사백십…….”
“어허. 그래도 중원십대상단의 상단주라는 분이 볼품없이 깨작깨작!”
“……사, 사백이십!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저희 허리 부러집니다!”
“육백.”
“예?”
청명이 혀를 찼다.
“사람이 통이 커야지. 그래서야 뭐 하겠어요? 동네 구멍가게도 그것보다는 더 쓰겠네.”
“도, 도장! 그렇게 많이 가져가시면 저희는 길바닥에 나앉습니다. 그…… 그 거래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칠백.”
“……아, 아니, 이게 무슨…….”
“대신.”
청명이 히죽 웃었다.
“호북에 풀리는 운남 차를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죠.”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망연자실하던 송태악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진심이십니까?”
순식간에 상인의 얼굴로 돌아온 송태악을 보며 청명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이래야 중원십대상단의 상단주지.’
“네, 뭐. 사실 저희 상단들이 차를 운반할 줄은 아는데, 위쪽에 팔아먹는 건 영 어려워해서 마침 적당한 데를 찾고 있었거든요.”
“…….”
“듣자 하니, 이 상단이 차로 좀 유명하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송태악이 눈을 빛냈다.
‘우연히 온 게 아니구나.’
대별채를 토벌하고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온 게 아니었다. 적어도 이자는 이곳에 올 때부터 이 말을 꺼낼 기회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화산이 왜 명성을 떨치나 했더니.’
이런 자가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이름을 떨칠 수밖에 없겠지.
“천으로 하시지요.”
“오?”
“대신!”
송태악이 살짝 서늘하기까지 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북경. 북경에 대한 전매권을 주십시오. 다른 곳은 괜찮습니다. 북경 하나를 추가하는 조건으로 삼백 더 드리겠습니다.”
“흐으으으으음.”
청명이 묘한 눈으로 그런 그를 넘겨다보았다.
“그렇게까지 하면 무당이 싫어할 텐데요?”
“저는 상인입니다.”
하지만 송태악은 단호하게 말했다.
“기회가 올 때 잡을 줄 모른다면 상인이 아니지요. 저는 이문을 좇지, 관계를 좇지 않습니다.”
청명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죠.”
“하하하핫! 잘 생각하셨…….”
“그럼 천이백으로 결정하죠.”
“……예?”
송태악이 순간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청명은 씨익 웃었다.
“천까지 부르는 걸 보면 아직 여력이 좀 있는 것 같으니까, 천이백. 어때요? 서로 기분 좋게 만족할 수 있는 액수 같은데.”
“…….”
“대답은?”
“…….”
“대답으은?”
“……십만 냥만 깎아 주십시오.”
“뭐, 그 정도야.”
송태악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래도 술값은 남겼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것만은 참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