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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99화 (597/1,567)

599화. 그럼 구파 새끼들이 욕을 좀 더 처먹지 않을까? (2)

무당파.

스으으읏. 스으으윽.

새하얀 삼베 천이 소나무의 형상이 새겨진 송문고검(松紋古劍) 위를 부드러이 누볐다.

날은 이미 더 닦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검을 닦는 이는 마치 중요한 의식이라도 행하는 듯 진중한 태도로 닦아 내었다.

마치 거울처럼 깨끗해진 날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이가 천천히 검을 내려놓았다.

“후우.”

한숨이 밀려나왔다. 검은 깨끗해졌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얼룩덜룩하고 소란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장문인 안에 계십니까. 허산입니다.”

무당의 장문인, 허도진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장문인께서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들어오너라.”

허도진인은 검을 밀어 넣고는 옆으로 치웠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선 허산자가 예를 취하고는 그의 앞에 좌정했다.

“장문인.”

그러더니 살짝 머뭇거리는 눈치로 입을 뗐다.

“형산으로 갔던 화산파가 녹채를 점거하고 있던 대별채를 포함하여, 혈랑채, 적웅채를 모조리 토벌하였다 합니다.”

“…….”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세 산채를 모두 정리하면서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음.”

결국 허도진인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또 화산인가?’

요즘 들려오는 소식은 대부분 화산파에 대한 것 같았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다. 무당의 장문이란 천하의 강호를 주관하는 자리. 세상을 떠도는 온갖 잡소문을 모두 들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많은 소식들 중 그를 신경 쓰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소식이 오직 화산에서만 나온다고 해야 할 터였다.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느냐?”

“예. 그런 듯합니다.”

“내가 알기로 화산은 일대제자의 수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이대제자들 역시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 검수들인 걸로 알고 있다. 내 말이 맞더냐?”

“제가 알기로도 그러합니다.”

허도진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하면 무당에서는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할 아이들을 주축으로 세 산채를 모조리 토벌하면서 피해 하나 입지 않았다는 말이렷다.”

“…….”

허산자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화산……. 화산파…….”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허도진인의 얼굴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예전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건만.’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무당의 후기지수들을 능가한다는 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몇 번이고 증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 일은 그들의 힘이 그저 후기지수로 평가될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허도진인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다고 해도 이만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한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제 현판을 내릴지 알 수 없는 꼴이었던 화산이 대체 무슨 수로 아이들을 그리 성장시켰단 말인가?”

어지간한 일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허도진인의 얼굴에 짙은 노화가 어려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저 화산의 이해할 수 없는 성장에 대해 듣게 될 때마다 자꾸만 세상이 그를 무능하다 탓하는 것만 같았다.

심호흡하며 노화를 억누르던 허도진인의 눈에 눈치를 살피고 있는 허산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또 전할 말이 있는가?”

“……그게…….”

허산자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 일로 본문을 비난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비난?”

“……예.”

“본문이 뭘 했다고 갑자기 비난을 받는단 말인가?”

“그게…… 대별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그동안 토벌하지 않고 좌시했다고…….”

“…….”

할 말을 잃은 허도진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확실히 대별채가 있는 대별산과 무당산은 같은 호북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은…… 무당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섬서의 화산이 형산까지 와서 대별채를 토벌해 버리니 생각이 바뀐 모양입니다.”

“그게 어찌 그리될 일인가!”

허도진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별채는 녹림의 소속이 아닌가! 우리가 대별채를 토벌했다면 녹림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거늘! 화산이 대별채를 토벌할 수 있었던 것도 녹림과의 전쟁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대별채?

그따위는 무당이 직접 나서면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별채는 저 녹림의 칠십이 개 산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무리 무당이라고 한들, 그 칠십이 개의 산채를 모조리 감당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구파들이 도와준다면야 녹림 하나 상대하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겠냐마는, 다른 구파들은 자신들에게까지 피해가 튀지 않는 이상은 무당의 전력이 깎여 나가길 기다리며 구경만 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무당이 무슨 수로 대별채를 토벌한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허산자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비난하는 이들이 그런 속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요. 겉으로 보자면 화산이 무당의 영역인 호북의 대별채를 대신 토벌해 준 게 맞지 않습니까.”

“…….”

허도진인은 치미는 화를 참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허산자의 말대로 평범한 이들이 그런 알력관계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그저 보이는 것만 볼 테니까.

“화산을 칭송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나가면 화산 소리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후!”

허도진인은 거친 숨을 내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건 좌시할 만한 일이 아니야.’

화산의 명성이 높아지면 피해는 고스란히 무당이 입게 될 것이다.

“우선은 민심을 달래야겠네. 제자들을 준비시키게.”

“제자들은 어찌하여……?”

“대별채가 토벌당한 곳은 형산이 아닌가. 아직 대별산에 그 잔당들이 남아 있겠지. 이미 늦은 일이지만 움직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짓이라는 것을. 하지만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그, 그게 아니라…….”

“음?”

안절부절못하던 허산자가 슬그머니 말을 뱉었다.

“그…… 대별산으로 화산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했느냐? 그놈들이 대별산에 간다고?”

“예.”

“왜?”

“마, 말씀하신 대로 대별채의 잔당들을 정리하러…….”

우드드득!

허도진인이 움켜잡은 다탁의 모서리가 콰드득 부서져 나갔다.

“이…….”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허산자가 재빨리 입을 닫았다.

허산자는 평생 허도진인을 봐 왔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무당뿐만 아니라 구파일방 전체가 체면을 구기게 되었구나! 화산! 그놈의 화산!”

허도진인이 이리 화를 내는 이유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화산이 선점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수장을 잃은 산적패는 알아서 와해되고 정리되기 마련이다.’

허도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나서서 민심을 달래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화산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화산의 이번 움직임에는 이 기회에 무당의 명성을 땅에 처박아 버리겠다는 악의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대체 이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된단 말이더냐!”

별것도 아닌 산적 토벌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애초에 검총 때도 그렇고, 천하비무대회 때도 그랬다. 저 화산이 끼어든 일치고 예상대로 돌아간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었던가?

“구파를 깔아뭉개고 명성을 얻었으니, 이제 그 명성을 이용하려 들겠구나. 그럼 곧 그 천우맹인가 뭔가가 개파를 하겠지!”

“…….”

“좋지 않다. 이건 너무도 좋지 않은 일이야.”

원래대로라면 딱히 관심을 끌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화산이 이번 일을 벌이면서 중원 전체의 눈이 화산에 집중되었다. 당연히 천우맹의 개파에도 전 중원의 관심이 쏠리게 될 것이다.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개파 하여 그 이름을 알리는 데만 수년은 소모해야 했을 천우맹이 단번에 전 중원에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실적은 명성을 낳고, 명성은 관심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관심은 결국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법.

이 별것 아닌 한 수로 화산과 천우맹이 가질 영향력은 애초에 허도진인이 예상했던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 버렸다.

“더는 좌시할 수가 없구나!”

생각에 잠겨 있던 허도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비해라. 소림으로 간다.”

“소. 소림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그의 눈에 광망이 어려 있었다.

“방장을 만나야겠다.”

* * *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막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건너편에서 들려온 법정의 차분한 목소리에 허도진인의 눈이 일그러졌다.

하나 그런 허도를 마주하는 법정의 표정은 그저 온화할 뿐이었다.

“방장.”

“말씀하십시오, 장문인.”

“방장께서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

허도진인이 차가운 눈으로 법정을 응시했다.

“그 천우맹이라는 곳은 그리 쉽게 생각할 곳이 아닙니다. 고만고만한 문파들이 뭉친다고는 하나, 중원의 서부가 온전히 그들의 영역이 된다는 것은 확연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서부에는 곤륜도 있고, 점창이나 아미도 있지 않습니까. 천우맹이 생긴다고 해서 서부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문제가 아닙니까!”

참다못한 허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 맹이 생겨나게 된다면 기존의 문파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집니다! 괜히 강호를 분열시킬 뿐이라 이 말입니다! 북해에서 마교의 잔당이 발견된 이 때, 우리끼리 이전투구를 해야겠습니까?”

노기 어린 고함을 들었음에도 법정의 표정은 잔물결 하나 없는 호수 같았다.

“장문인께서는 소승이 어찌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막으셔야지요.”

“…….”

허도진인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저들이 필요 이상으로 명성을 얻고, 필요 이상으로 세를 불려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게 진정 강호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법정은 앞에 놓인 찻잔을 가만히 허도진인 쪽으로 밀어 주었다. 우선은 진정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허도진인이 굳은 얼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고였다.

그 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법정이었다.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신 장문인의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구파일방에도 들지 않은 문파들이 저들끼리 뭉쳐 맹을 만든다는데, 그걸 제가 무슨 명분으로 막아서겠습니까?”

법정의 말에 허도진인이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막지 못하는 것입니까?”

“…….”

“아니면 막지 않는 것입니까?”

법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건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저 천우맹인지 뭔지 하는 것이 강호에 해악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넘쳐납니다. 그저 방장께서 묵인하시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을 뿐입니다.”

“으음.”

“그런데 방장께서 끝까지 이리 말씀하신다면, 저도 도리가 없지요.”

허도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 잘 얻어 마셨습니다.”

“장문인.”

“보중하십시오, 방장. 또 뵙겠습니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법정의 시선이 허도진인이 앉았던 자리 앞에 놓인 찻잔으로 향했다.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가득 차 있었다.

“방장.”

활짝 열린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법계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장문인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셨습니다.”

“음, 성격 급한 사람 같으니.”

법정이 고개를 내젓자 법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나, 목소리가 높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습니다.”

“들리는 걸 어찌 막겠느냐.”

법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법계는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장. 저는 무당 장문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냐?”

“예. 천우맹의 개파를 저지하시는 쪽이…….”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천우맹이 강호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더냐?”

“그렇지 않습니까…….”

“천우맹이 네 손에 쥐고 있는 쥐꼬리만 한 명성과 권한을 빼앗아 갈까 우려되어서는 아니고?”

“…….”

“사특하구나.”

법정은 나지막이 웃었다.

‘차라리 돈을 내어 놓으라고 대놓고 대거리하는 화산신룡이 순수하구나.’

입으로는 강호의 안위와 평화를 논하지만, 그 속에는 제 손에 쥔 것을 절대 내어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가득했다.

‘나 역시 다를 바가 없거늘.’

깊은 한숨을 쉰 법정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려 먼 하늘을 보았다.

다만 한 가지 의혹만은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과히 공교롭다.’

일이라는 것은 이리 풀릴 수 없는 법이다. 마치 모든 것이 화산과 천우맹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건 화산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화산더러 명성을 얻으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아미타불.”

불호를 왼 법정이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어쩌면 모든 것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저 먼 하늘 너머로부터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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