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그럼 구파 새끼들이 욕을 좀 더 처먹지 않을까? (1)
녹채는 생각보다 빨리 정상화되었다.
사실 딱히 할 일이 크게 있지도 않았다. 남은 대별채의 잔당들을 구속하고, 널려 있는 시신을 치우는 정도면 외부적인 문제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건 고홍이 점령한 동안 끊겼던 연락책을 다시 복구하고, 그동안 밀려 있던 일들을 다시 처리하는 정도였다.
임소병이야 정신없이 움직였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아이고오! 저를 버리고 가시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십니다!”
“놔! 안 놔? 안 놔?”
“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그 정신없을 임소병이 화산의 복귀를 눈물로 막아섰다는 점이었다.
“에이, 이게 진짜!”
뻐엉!
임소병을 매몰차게 걷어차 벽에 처박아 버린 청명이 삿대질을 했다.
“아니, 산적들 다 까 줘! 녹채 되찾아 줘! 광우도 죽여 줘! 해 줄 건 이제 다 해 줬는데 뭘 또 해 달라고 이렇게 징그럽게 들러붙어!”
“뭘 더 해 달라는 게 아니라 며칠만 더 머물러 달라는 겁니다! 며칠만! 저희가 따뜻한 잠자리와 끝내주는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되면 산채냐! 산채야?”
“허허.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도를 깨달은 분이라면 딱딱한 침상도 원앙금침과 같고, 거친 식사도 천상의…….”
“계속해 봐. 어디까지 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
“……죄송합니다.”
임소병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녹채에는 지금 병력이랄 게 없단 말입니다. 제게 우호적인 이들이 병력을 이끌고 오기 전에 다른 놈들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제 모가지는 그대로 날아갑니다!”
“……아니, 그게 녹림왕이라는 사람이 할 말이냐고.”
“녹림왕은 안 죽습니까? 녹림왕이고 옥황상제고 목에 칼 들어오면 뒈지는 건 다 똑같지!”
“…….”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은 귀신이라도 본 양 희게 질려서 수군거렸다.
‘와, 청명이가 밀린다.’
‘세상에, 내가 살다 살다 청명이 말문 막히는 꼴을 다 보네.’
‘솔직히 저건 못 이기지.’
평소 아무리 완벽한 논리와 말발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모든 걸 내려놓은 이를 이길 순 없는 법. 그 사실을 임소병이 이 자리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끄응……. 그래서 걔네가 언제 오는데.”
“이틀! 이틀이면 됩니다. 전서구를 보내 놨으니 이틀이면 다들 구름같이 몰려올 겁니다.”
“그럴 충성심이 있는 인간들이면 진즉에 도왔겠지.”
“그럼 사흘…….”
“…….”
“아니, 나흘?”
“에라, 이 인간아!”
“아악!”
다시 한번 임소병을 뻥 차서 날려 버린 청명이 이를 박박 갈았다.
“여하튼 뭐 하나 쓸모 있는 구석이 없어!”
다시 매달려 오는 임소병에게 청명이 불을 뿜으려던 그 때였다.
“아, 아니! 나는 화산의 친구라니까!”
산채 입구 쪽에서 다급하고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보니 웬 거지 하나가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내, 내가 여길 정탐하러 온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내 복색이 거지인 것도 맞고, 그리고 개방 소속인 것도 맞는……. 히이이익! 왜 사람 목에 칼을 들이밀고 그러십니까!”
익숙한 거지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청명은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마침 거지도 그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오, 화산신룡! 여기 말 좀 해 줘라! 이 산적 나부……. 아니, 이 호걸님들이 날 죽이려고 한다!”
“……거기 들여보내 줘. 내가 아는 사람이야.”
“예!”
산적들도 보고 들은 것이 있다 보니, 청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지의 주변에서 떨어졌다. 거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봤지? 내가 저 화산신룡이랑 친구라니까, 친구!”
어깨에 힘을 있는 대로 준 홍대광이 의기양양하게 청명을 향해 달려왔다. 청명은 퉁명스레 물었다.
“여긴 또 왜 왔어요?”
“바늘 가는 데 실이 안 갈 수야 있나!”
돌아온 너스레에 청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 정상인이 없어.’
어떻게 하나같이 이 모양인가.
청명의 심정이야 어찌되었든, 그 와중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 홍대광의 입에선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진짜 고홍을 쓰러뜨리고 대별채를 토벌했구나.”
“뭐 별거라고.”
“아니, 아니! 이건 진짜 대단한 일이지.”
홍대광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말했다.
다른 이들이야 모르겠지만, 홍대광은 화산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는 사람이다. 그 화산신룡이 직접 나서고, 저 화산이 움직였으니 대별채의 토벌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나 다름없었다.
다만.
‘일의 파장이 만만치 않겠어.’
막상 그 결과를 눈으로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쫄깃해졌다.
대별채의 악명은 말 그대로 드높았다.
대별산이 위치한 호북은 물론이고, 그 주변 성들에도 그 악명이 자자했다. 때문에 세인들은 대별산에 최대한 가까이 가지 않는 방법으로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별채가 이곳에서 토벌되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르는 거냐?”
“뭔 의미인데요?”
“토벌이 가능했다는 의미지.”
청명이 급격하게 심드렁해진 시선을 보내오자 홍대광이 재빠르게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그렇게 ‘뭐 이런 병신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보지 말고!”
“그래도 눈치는 빠르네요.”
“끄응.”
홍대광은 죽을상을 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쨌든 그동안 사람들이 대별채에 시달리면서도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았던 것은 그 악명이 어마어마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뭔 빤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대별채가 워낙 악명이 높으니 명문 정파들도 그들을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했단 의미다.”
“응?”
조금 색다른 말에 청명이 턱을 살짝 긁적였다.
하긴, 확실히 강호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화산이 이렇게 나서서 고홍의 목을 베고 대별채를 박살 내 버렸으니 이제 어찌 생각하겠느냐?”
“화산이 끝내준다?”
“…….”
“아냐?”
“……물론 그것도 맞지만…….”
홍대광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동안 대별채의 악행을 지켜보면서도 토벌에 나서지 않았던 기존 정파들에게 당연히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지 않겠냐? 저 먼 섬서에 있는 화산이 직접 와서 대별채를 박살 내 주는데,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무당이니 소림이니 하는 것들은 내내 엉덩이를 붙인 채 나서지 않았다는 말이니까.”
“오? 그러네?”
“이 소문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구파일방나 오대세가는 위장이 뒤틀릴 거다. 제대로 엿을 먹인 거라 할 수 있지!”
“진짜 그러네요!”
동시에 낄낄낄낄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 웃어 대는 걸 보면 흡사 뒷골목 왈패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양을 지켜보던 윤종이 백천을 보며 말했다.
“사숙.”
“응?”
“저…… 홍 대협도 개방 소속이니, 구파일방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왜 좋아하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자기도 엿 먹은 건데.”
“……나라고 알겠느냐.”
백천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려니 해라. 우리처럼 한 문파로 엮인 것도 아닌데, 청명이 놈을 쫓아다니는 사람이 멀쩡할 리가 있겠느냐?”
“갑자기 이해가 싹 되네요.”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나오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홍대광은 잔뜩 들뜬 얼굴로 연신 히죽거렸다.
“그러니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이 말이지!”
“뭐 공치사는 그 정도로 됐고.”
“응?”
“준비는 끝났어요?”
“준비?”
잠깐 못 알아듣고 갸웃하던 홍대광이 금세 말뜻을 이해하고는 씨익 웃었다.
“아아, 그 준비? 물론이지! 내가 이걸 준비한다고 같이 싸워 주질 못했다니까! 그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 타구봉으로 아주 그냥…….”
홍대광이 허리춤에 찬 몽둥이를 잡자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산적들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돌았다.
움찔한 홍대광은 슬며시 몽둥이에서 손을 떼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나가던 노루나 한 마리…….”
“헛소리 그만하시고요.”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이번 일은 진짜 확실하게 해 줘야 해요.”
홍대광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쳐 보였다.
“나만 믿어라, 화산신룡! 나만!”
“……믿음이 가야 믿지.”
청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백천을 향해 말했다.
“사숙.”
“응?”
“우리 이거 끝나면 화산으로 바로 돌아가기로 했었잖아.”
“그렇지.”
“계획을 좀 바꿔야겠어.”
“……갑자기 또 왜?”
청명이 턱짓으로 홍대광을 가리켰다.
“거지 아저씨 하는 말 못 들었어? 우리가 대별채를 까 버려서 구파일방이 엿 먹었다잖아.”
“그런데?”
청명이 히죽 웃었다.
“엿을 먹이려면 확실하게 먹여야지. 뭐든 하려거든 제대로 해야 된다 이 말이야! 이리된 이상 대별산까지 가서 남은 대별채 잔당 새끼들까지 모조리 박살을 내 버려야지!”
“…….”
“그럼 구파 새끼들이 욕을 좀 더 처먹지 않을까?”
“…….”
도대체.
이놈의 이 구파일방에 대한 뿌리 깊은 악감정은 어디서 저렇게 끝도 없이 샘솟는 걸까?
‘불구대천의 원수도 이렇게까지 괴롭히지는 않겠다.’
“아무튼 그렇게 알아.”
“…….”
졸지에 화산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대별산까지 가게 생긴 화산의 제자들은 원독에 찬 눈으로 홍대광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한 홍대광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돌아섰다.
“그럼 나는 일처리를 마저 하러 가마!”
“그래요, 그럼.”
“그, 대별산으로 갈 때 나도 꼭 데려가야 한다! 이번에는 놓고 가지 마!”
“……알았다고요.”
청명은 부리나케 산 아래로 달려가는 홍대광을 바라보았다. 그때 임소병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나흘 있다 가시는 거죠?”
“…….”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청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형.
장문사형.
이 새끼들 다 패 버려도 됩니까?
* * *
화산이 형산에 올라 대별채를 비롯한 세 개의 산채를 모조리 토벌해 버렸다는 사실은 바람보다 빨리 퍼져 나갔다.
온갖 상행이 다 들르는 장사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소문이 빨리 퍼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홍대광이 있는 능력, 없는 능력 모조리 끌어다가 동원한 거지들이 죽어라고 여기저기 퍼져서 소식을 퍼 나르니, 전 중원으로 소식이 퍼지는 데에는 불과 이틀도 걸리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정말 오랜만에 듣는 대단한 협행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 대별채라니! 그 악독한 놈들을 화산파가 토벌했단 말인가?”
“그런데 참 이상하구만. 섬서에 있는 화산파가 왜 거기까지 가서 대별채를 토벌한다는 말인가?”
“왜긴 왜겠는가! 근처에 있는 다른 놈들이 토벌하지 않으니 화산이 직접 나선 것 아닌가!”
“……내가 듣기로는 녹림왕이 부탁했다고 하던데?”
“그게 뭔 상관이야! 그럼 녹림왕이 소림이나 무당에 부탁을 했으면 지금까지 드러누워 구경만 하던 놈들이 나서기라도 했을 거란 말인가? 녹림왕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 먼 화산에다가 부탁을 했겠지!”
“그, 그건 그렇지.”
“말이야 바른 말로, 그동안 그 대별채와 다른 산채 놈들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피해를 봤는가? 죽은 이들이 어디 한둘이야?”
“맞지! 그 말이 맞지!”
“그런 놈들을 토벌해 주다니, 세상에……. 화산이 과거 천하의 빛나는 명문이었다고 하더니, 역시 명문은 어디 가지 않는구먼! 대단해! 아암, 대단하고말고!”
대화가 잠깐 끊기기 무섭게 곁에서 듣던 이가 뭔가 떠오른 듯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 토벌이 잘되면 녹림도 더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 약조했다 하지 않았는가?”
“옳거니!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구먼.”
“홍복일세, 홍복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적당히 바람 잡힌 말들이 세상을 돌고 또 돌았다. 입이 둘 이상 모였다 하면 모두 화산을 언급했고 그 협행을 칭송했다.
물론 몇몇 냉소적인 이들은 화산이 녹림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를 싸잡아 욕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별채 토벌이라는 가시적인 성과 앞에서는 힘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날개 돋은 듯 퍼져 나간 소식은 마침내 구파일방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