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6)
“후욱! 후욱! 후욱! 후욱!”
고호리 이정방은 다리가 부러져라 달리고 또 달렸다.
‘다, 달아나야 돼.’
다른 산적들이야 잡힌다 해도 적당히 벌만 받고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고홍의 측근이었던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을 수 없다. 잡힌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설사 화산이 그를 살려 둔다 해도 저 임소병이 그를 살려 둘 리 없었다. 잔인해야 할 때는 고홍 이상으로 잔인한 이가 바로 임소병이다. 그러니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달리고 달려 저들의 추적을 벗어나야 했다.
‘멍청한 새끼 같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욕지거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녹채에서 물러나 달아나자는 그의 조언을 들었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멍청한 놈은 그의 조언을 개소리로 여겼고, 기어코 목이 달아났다.
‘그런데 대체…….’
그놈이 말하던 ‘그’는 누구였을까?
이정방의 말을 무시하라고 했다는 건, 고홍이 말하던 ‘그’가 이정방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단 소리였다. 심지어 무슨 말을 할지도 대충 짐작했던 걸 보면 꽤나 자세히 말이다.
그럼 대체…….
“후욱! 후욱!”
아니, 지금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저들이 쫓지 못할 곳까지 다다르면…….
쇄애애애애애액!
콰드드드드득!
“끄,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별안간 이정방이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달리던 속도를 감안한다면 앞으로 한참을 나뒹굴어야겠지만, 그의 몸은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장창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땅에 깊숙이 박혔기 때문이다.
“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엎어진 채 절규하던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제 허벅지 뒤로 박혀든 장창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될 뿐.
‘대, 대체…….’
상처에서 오는 고통보다 더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 장창을 날린 이의 정체였다. 화산이 쫓아왔다면 검을 쓰지 창을 날릴 리는 없을 텐데.
그 순간.
저벅. 저벅. 저벅
뒤쪽 수풀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싶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쯧쯧쯧. 그냥 대충 겁만 주라니까. 왜 다치게 만들고 그러느냐.”
부드럽고 느긋하며 여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이정방은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굳어 버렸다. 딱히 노골적인 적의 같은 건 품지 않았음에도 듣는 이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힘이 그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느긋한 발소리는 조금 더 울리고서야 이정방의 앞에서 멈추었다.
이정방이 떨리는 눈을 옆으로 돌리니 오색으로 화려한 신발 한 쌍이 보였다.
과하게 화려했다. 사내가 신기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이정방의 심장이 절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숨도 쉬어지질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마치 홀린 것처럼 점점 위로 향했다.
피처럼 붉은 홍포에는 생생한 범의 형상이 금사로 수놓여 있었다. 붉은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손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와 화려한 팔찌가 자리하여 한껏 빛을 발했다.
‘여인?’
아니, 아니다.
여인이라 하기에는 이자의 체형이 지나치게 건장했다.
그렇다면……?
“허……. 허어…….”
공포에 질린 이정방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얼굴은 채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의 머릿속에 딱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화려한 복색과 과한 패물들. 천하에 이런 복색을 하고 다닐 만한 이는…….
이정방의 시선이 끝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았다.
얇디얇은 입술은 마치 피라도 칠한 듯 붉어 더없이 요사스러웠다. 그에 반해 오뚝 솟은 콧날은 더없이 매끄럽되 남성적이었다. 가느다랗고 선이 고운 눈썹 아래 자리한 눈은 실로 깊어서 이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 위에 얹어진 황금 관까지 확인한 순간, 이정방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자, 장…… 장일…….”
“쯧.”
이정방의 얼굴 앞에 가만히 쪼그려 앉은 사내가 고운 손가락으로 이마를 콕 찔러 왔다.
“네가 내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야 되겠니?”
이정방은 황급히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억눌린 채 새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이자를 앞에 둔다면 지금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가 장일소이기 때문이다.
패군 장일소.
만인방의 방주.
만사(萬邪)의 제왕(帝王).
그를 수식하는 말은 수두룩했지만, 그 어떤 말도 이 사내를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없었다. 이 사내를 담아내기에 언어는 너무 조악하고 말은 너무도 하찮았다.
‘왜? 왜 이자가 여기에?’
설마……?
“흐음.”
장일소는 겁에 질린 이정방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고홍은 죽었느냐?”
“…….”
“대답해야지?”
“그, 그렇…….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었습니다!”
“누구한테?”
“화, 화산신룡인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에는 그, 그가 분명합니다.”
확실하지 않다와 분명하다는 어우러질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절벽 끝으로 몰린 이정방은 그런 사리 분별을 할 여력이 없었다.
‘왜 여기에서 장일소가 나오느냐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슬픈 것도 아니건만 두 눈에서 절로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면 산적 놈들이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달아났겠고. 다른 이들은?”
다른 이들?
그 혈의인들을 말하는 건가?
“주, 죽은 걸로…….”
“흐음.”
장일소는 의미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물었다.
“임소병은?”
“사, 살아 있습니다. 그는 분명 살았습니다.”
“그럼 임소병이 다시 녹림왕의 자리에 오르겠구나? 그렇지?”
“예, 그, 그런 것으로…….”
“녹채에서 함부로 살생을 벌이지 말라고 했으니, 녹림은 금세 안정화가 될 테고. 녹림왕을 구한 화산이 녹림을 꿀꺽 집어삼키겠구나. 아니, 천우맹이 집어삼키겠지.”
“…….”
“생각한 대로 말이지.”
장일소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정방의 이마에 닿은 그의 검지로 힘이 꾹 실리기 시작했다.
“네 이름이 이정방이라고 했던가?”
이정방은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지경으로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어, 어째서?’
어째서 장일소가 그를 알고 있는가?
그가 아무리 고홍의 지낭(智囊)이라고는 하나, 저 패군 장일소에 비하면 신발에 묻은 먼지보다 못한 존재였다. 장일소쯤 되는 이가 굳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쯧쯧. 고홍 같은 머저리의 곁에 있었으니 네가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지 알겠네. 적어도 네 말을 따랐다면 그렇게 멍청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지?”
이정방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장일소가 그를 죽일 명분이 된다. 그렇다고 하면 모시던 주군을 모독한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장일소의 말에 틀리다 반박한 것이 된다.
“대답해야지?”
“저…… 저는……. 저, 저는…….”
“얘도 참.”
어떤 말도 못 하고 덜덜 떨어 대는 이정방을 보며 장일소는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내가 설마 꼬투리를 잡아서 너를 죽이기야 하겠니? 나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패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호오. 나를 알아본 게냐.”
“눈이 있고 귀, 귀가 있을진대 어찌 패군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는 눈을 떼어 내고 귀를 뜯어 버려야 합니다!”
“흐음. 간지럽구나.”
장일소가 기껍다는 듯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지.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알려지면 안 되거든.”
“저,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설사 보, 보았다 해도 어디에도 혀를 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 혀를 뽑으십시오!”
“혀를 뽑아도 글은 쓸 수 있지 않느냐?”
“소, 손을 자르십시오! 패군!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셔도 됩니다!”
“녀석아. 말하지 않았니. 네가 나를 너무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고. 나는 그리 잔인한 사람이 아니란다.”
“하, 하면…….”
“네가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았어. 나는 사람 보는 눈이 꽤 정확한 편이지. 네가 어디에도 내 말을 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겠다.”
드리워진 희망의 빛에, 이정방의 두 눈엔 눈물이 차올랐다.
살았다.
범의 아가리에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장일소의 앞은 범의 아가리가 아니라 범의 배 속보다 더 위험한 곳이 아니던가?
그때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예?”
푸욱.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이정방의 이마를 뚫고 들어갔다. 머릿속에 손가락이 틀어박힌 이정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다 이내 축 늘어졌다. 숨이 끊긴 것이다.
“내가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손수건으로 손끝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장일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산이 잘해 준 모양이네.”
그러자 독심나찰(毒心羅刹) 호가명(扈加名)이 다가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방주님.”
“응?”
“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귀대(餓鬼隊)를 키우는 데 꽤 많은 돈과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굳이 이런 곳에서 낭비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쯧쯧쯧. 가명아, 가명아.”
“예, 방주님.”
“너는 그래서 문제라니까.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응?”
“…….”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뒷짐을 진 장일소는 저 먼 산봉우리를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홍이라는 놈은 배짱이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겁쟁이나 다름없다. 진짜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벌써 임소병을 먹어 치우려 들었겠지. 하지만 지금껏 은인자중했다는 건 신중한 게 아니라 의외로 겁이 많다는 의미 아니겠니?”
“……그렇습니다.”
“아귀대를 붙여 주고, 독단까지 먹여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면 그놈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을 거야.”
아니, 호가명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아귀대가 아닌 더한 것을 붙여 준다고 해도 고홍은 거부했을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나선 이가 장일소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녹림과 만인방은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 적의 수장이 직접 와서 구슬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말도 안 되지.’
오직 장일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로지 장일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미욱한 저로서는 방주께서 그리는 그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 것 없다. 그저 순리를 맞추는 것뿐이란다.”
장일소가 손끝을 들고 살피며 말했다. 그러자 흰 얼굴에 그림자가 살짝 드리웠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지. 저놈들이 감히 빛이 되겠다면 적당히 탈 장작을 던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럼 그림자는 더욱 깊어지지 않겠니?”
“…….”
“이제 녹림은 화산의 친구가 되었지.”
“적이 강해지는 결과가 아닙니까?”
“그렇기에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호가명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역시 병법에 통달한 이였으나, 장일소는 병법이 아닌 본능으로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이럴 때마다 호가명은 타고난 이 앞에서 배움과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몇 번이고 깨닫고 말았다.
“돌아가자. 생각 같아서는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산통을 다 깨겠지? 마음속으로나마 축하할 수밖에. 아쉽네.”
장일소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호가명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런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아, 그리고.”
“예.”
“아귀대의 가족들은 모두 확인해 봤니?”
“반은 고아 출신이고, 남은 대부분도 가족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런 놈들만 모아 만든 대가 아닙니까.”
“확인했구나. 그럼 그 가족들에게 큰돈을 내주어라.”
“……굳이 말입니까?”
“쯧.”
장일소가 심기가 불편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호가명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돈 몇 푼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데 충분히 남는 장사지.”
“예, 방주.”
장일소는 품 안에서 금실로 짜인 전낭을 꺼내 호가명에게 가볍게 던졌다.
“방에서 줘야 할 돈에 보태.”
“예!”
정말로 할 말을 모두 끝낸 장일소가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걸었다. 호가명은 저 멀리 녹채가 있는 봉우리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가여운 놈들.’
모두 자신들이 누구의 손바닥 위에 있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챘을 쯤에는 어느새 몸을 조인 뱀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지.
하지만 그건 저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장일소가 그런 사람일 뿐이다.
패군 장일소.
세상을 희롱하는 뱀이 길고 길었던 침묵을 깨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