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596화 (594/1,567)

596화.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5)

서걱!

“끄으으윽…….”

마지막 혈의인의 숨이 끊어졌다.

털썩.

그건 길었던 전투의 마지막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혈의인이 쓰러진 순간 화산의 제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 풀지 마!”

하지만 때맞춰 들려온 운검의 목소리에 다시 긴장의 끈이 팽팽해졌다.

“쓰러진 이들 중 아직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방심하지 말고 적의 무기를 회수하고 전장을 수습해라!”

“예, 관주님!”

마지막 잔소리를 늘어놓고서야 운검이 피 묻은 검을 늘어뜨렸다.

‘어려운 상대였다.’

산적들은 이미 대부분 달아난 뒤였지만, 혈의인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극렬하게 저항했다. 만약 산적들이 그들과 힘을 합쳐 반격했다면 끔찍한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 덕분이로군.’

운검의 시선이 청명을 가만히 응시했다.

청명이 나서서 시선을 끌어 주고, 산적들의 전의를 꺾어 준 덕분에 이 정도 피해로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관주님! 정리가 끝났습니다!”

“살아남은 이는 있느냐?”

“……독이 퍼져서…….”

이미 짐작했던 바에 운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고 부상 때문에 의식을 잃었던 혈의인도 있었지만, 이미 몸에 자리하고 있던 독이 목숨을 아주 앗아 간 모양이었다.

‘지독한 놈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까지 먹은 채로 싸웠단 말인가?

깊게 심호흡한 운검은 현상을 향해 말했다.

“장로님.”

“으음.”

현상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전히 전투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좋은 얼굴들이구나.’

이전까지의 전투에서는 승리가 확정된 순간 다들 목청을 높여 승리를 상찬했다. 하지만 지금 화산 제자들의 얼굴은 굳건히 자리를 잡은 전사의 그것이었다.

승리에 기뻐할 순 있지만, 사람의 죽음에 대해 기뻐해서는 안 된다. 이 지독한 승리를 자찬하는 이가 있었다면 현상은 반드시 그를 질책했을 것이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화산의 제자들은 검수로서의 본분은 물론이고, 도인으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다들…….’

“아오, 씨! 새끼들 더럽게 날래네!”

“…….”

어느새 산적들의 뒤를 쫓으며 뒤통수를 후려갈기던 청명이 손을 털며 돌아왔다.

“다 패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

어, 물론…….

도사로서의 본분을 깔끔하게 잊은 놈도 있다. 그래, 있지.

하지만 뭐 그거야 원래 그러니까.

현상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전장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의 치료를 서두르거라!”

“예!”

명이 떨어지자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분주한 모습을 보던 현상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겼구나.’

당대 화산의 역사적인 첫 출정은 큰 피해 없는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아아악! 아악! 아아아악!”

“이 양반이 어디서 엄살을.”

“아악! 소소야! 진짜 아프다! 진짜! 아, 죽을 것 같다니까!”

“옆구리에 칼빵 맞아 놓고는 붕대 두른다고 아프다는 소리를 해요?”

“지, 진짜 아픈데…….”

“아, 조용히 안 해? 확 상처 잡아 벌려 버릴까!”

“…….”

당소소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동안 화산오검은 모두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절대 칼 맞지 말아야지.’

‘저건 붕대를 감는 게 아니라 붕대로 사람을 결박해 버리는 것 아닌가?’

‘피는 통할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에는 깊은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크게 다친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천만다행으로 목숨이 위험한 이는 없으니까. 한 사람이라도 죽었다면 이런 분위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 살았으니 됐잖아!”

“뭐요, 이 새끼야?”

“…….”

항변하는 제자를 향해 당소소가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이 양반들이 다 미쳤나? 댁들이 입은 상처가 보통 상처인 줄 알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벌써 뒈져서 묻혔어! 청명 사형이 영약이라는 영약은 다 처먹였으니 간신히 살아 있는 거지!”

이제 입에서 불을 뿜는다 해도 놀랍지 않을 그녀의 기세에, 툴툴거리던 이들은 모두 찔끔하여 고개를 숙였다.

“자소단에 공청석유까지 처먹었으니 옆구리가 이렇게 걸레짝이 되고도 살아 있는 거지! 어디 그걸 지들이 잘했다고 입을 털어?”

“소, 소소야. 좀 진정해라.”

“잘못했습니다.”

“노, 노여움을 푸십시오, 누님.”

“알았으면 닥치고 누워!”

“예!”

순식간에 제압에 성공한 당소소는 사람 손바닥보다 더 긴 대침을 들어 환자들의 몸에 푹 쑤셔 박았다.

“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그때 구석에서 쪼그라들어 있던 현상이 운검의 눈치에 못 이겨 헛기침을 하며 당소소에게 다가갔다.

“그…… 소소야.”

“네, 장로님!”

순간적으로 확 변해 버린 당소소의 얼굴과 말투에 모두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술렁거리는 분위기에 소소는 눈을 흘기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왜?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빛으로 훌륭히 제압한 당소소는 다시 빙긋 웃으며 현상을 향해 말했다.

“부르셨어요?”

“……그, 그래. 아이들의 상태는 어떠냐?”

“좀 심하게 다친 이들이 있긴 하지만, 상처가 덧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몇 달 정도 정양에 들어야 할 이들도 있는데…….”

당소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다들 영약을 워낙 퍼먹어 놔서 회복이 너무 빨라요. 벌써 새살이 차는 사형들도 있고요. 보름 정도면 다들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로구나.”

현상이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청명이 아이들에게 영약을 과도하게 먹이는 것에 대해 내심 불만을 품은 적도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내력이 검과 내력의 균형을 무너뜨릴까 봐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잠시나마 불만을 가졌던 과거의 자신을 확 패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균형이고 나발이고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일단은 살아 있어야 균형이든 뭐든 생각을 해 볼 것이 아닌가.

“후우. 그래, 네가 고생 좀 해 주거라.”

“예, 장로님! 걱정 마세요!”

당소소가 방긋 웃고는 다시 붕대와 대침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자, 장로님!”

“장로님. 너무 아프…….”

현상은 정말이지, 시선조차 주지 않고 냉정하게 몸을 돌려 멀어졌다.

“사형.”

“음?”

그런 그를 향해 현영이 다가왔다.

“달아난 산적들을 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워낙 거친 놈들이라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으으음.”

현상은 얼굴을 굳히며 침음성을 흘렸다.

혈의인들은 모두 처리했지만, 녹림도들은 반수 이상이 달아났다. 청명이 뒤늦게라도 쫓으며 기절시킨 이들도 많았지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녹림도들을 모두 잡는 건 아무리 청명이라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해야 맞겠지만…….”

고민하던 현상은 부상자들 주변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한번 훑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추격이란 자칫하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다. 더구나 뿔뿔이 흩어진 이들을 추격하려면 우리도 흩어져야 할 터. 더 이상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자들의 안전이다.”

“음. 사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딴죽 걸어 대는 게 거의 습관 같은 현영도 이 말에는 적극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해 줬으면 남은 문제는 녹림왕께서 해결하지 않겠느냐?”

그들의 시선이 임소병이 있을 산채 안쪽으로 향했다.

“녹림왕이시여!”

“반드시 구하러 오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산채의 뇌옥에 갇혀 있던 녹채의 식구들을 풀어 준 녹림왕 임소병은 흐느끼는 이들을 위로했다.

“다들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저희가 미욱하여 녹림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살아만 계셔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리 몸 성히 돌아오신 것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임소병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홍이 이들을 모두 죽이기라도 했다면, 상황은 더없이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몸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동이나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닌 걸 보니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고홍이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군.’

이들은 녹채를 운영하는 이들이자, 천하 녹림을 경영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들이었다. 이들만 있다면 녹채를 재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들 반가운 건 알겠지만,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한시가 급하니 우선 자네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벌어진 일부터 파악해 주게나.”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수족과도 같은 이들이라 그런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한 임소병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현상과 현영, 쪼그려 앉은 청명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헉!”

“엥?”

현상이 기겁하며 얼른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임소병은 일어나기는커녕 되레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땅에 찧었다.

“화산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왜 이러십니까! 귀한 분께서 어찌 이리 함부로 무릎을 꿇습니까.”

“내어 드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감사라도 표하게 해 주십시오.”

“허어…….”

실로 훈훈한 광경이었다.

끼어든 목소리가 없었다면 그렇게 마무리되었을 것이었다.

“내어 줄 게 없어?”

“…….”

“…….”

청명이 삐딱한 얼굴로 임소병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불뚝거리는 시선에 임소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청명 도장, 제가 목숨이 열댓 개도 아닌데, 설마 약속한 걸 떼어먹겠습니까?”

“헤헤. 그렇죠?”

청명이 언제 험악한 얼굴로 노려봤냐는 듯 히죽 웃으며 순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혹시 또 녹림왕 자리를 되찾았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럼 너무 귀찮아지잖아요?”

“……귀찮다는 건?”

청명은 정확한 대답 대신 슬쩍 번충을 향해 턱짓했다.

“쟤는 좀 불안해서.”

“…….”

임소병의 조금 질린 눈으로 번충과 청명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뒈지면 저 새끼가 녹림왕이구나.’

그를 슥삭해 버리고, 번충을 녹림왕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거겠지.

물론 말도 안 되는 개소리지만, 저 인간이 언제 말이 되는 짓거리만 하며 살았던가?

“그럴 일은 절대! 절대! 저어어얼대 없을 겁니다!”

“에이, 왜 이러시나. 우리 사이에. 아, 믿어요. 진짜 믿는다니까?”

아니다.

눈이 전혀 믿지 않는다.

눈이.

임소병은 몸을 일으키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별채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알리고, 제가 다시 자리를 되찾았음을 선언할 것입니다. 녹림을 정상화하는 데 못해도 보름에서 한 달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흠.”

“그 시간이 지나면 약조는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요.”

“예. 그럼 저는 할 일이 많아서…….”

“네.”

다시 녹채의 식구들을 향해 멀어지는 임소병을 보며 청명이 턱을 괴었다.

“흐음.”

산채도 이제 슬슬 정리되고 있는 듯했다.

‘얻은 게 많군.’

우선은 승리를 거머쥔 것. 그리고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려 드는 이들을 겪어 보았다는 것. 제자들에게는 이보다 값진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뭐가 뭔지 어리둥절할 테지만, 결국 지금의 승리는 저들의 가슴에 남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겸사겸사 명성도 얻었고.’

아마 이 전투의 결과는 며칠 안 가 천하를 뒤흔들게 될 것이다.

천하비무대회 이후로 간만에 화산이란 이름이 만방에 회자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이번엔 후기지수의 활약이라 폄하할 수 없는, ‘화산’의 업적으로 말이다.

그리 생각하면 정말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청명아.”

“네?”

“혹여 저 혈의인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더냐?”

현영의 물음에 청명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글쎄요. 저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으음. 그렇구나.”

현영은 동감한다는 듯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놈들이 걸린다.

현영도 아마 청명과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번 전투는 화산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건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잡아 낼 수는 없지만, 뭔가…….

“청명아.”

“음?”

“잠시.”

그때 백천이 청명을 향해 손짓했다. 청명은 고개를 갸웃하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구석으로 데리고 간 백천이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내 생각인데 말이다.”

“응?”

“그 혈의를 입은 이들의 기운이…… 예전에 한번 겪어 본 듯 익숙한 느낌이 든다.”

“……으응?”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다만, 뭔가 느낌이라는 게 있잖느냐.”

청명은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백천을 가만히 보았다.

“사숙.”

“응?”

“일단 짐작은 짐작으로 남겨 둬.”

“…….”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의 표정을 살피던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흠.”

혈의인들의 시체는 이제 한쪽에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청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봤자지, 뭐.”

“응?”

“아냐, 아무것도.”

백천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는 청명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사숙은 감을 잡은 모양인데.’

청명의 입가가 뒤틀렸다.

‘그래. 아무리 정체를 숨겨도 냄새는 숨길 수 없는 법이지.’

그의 눈이 산 너머의 어딘가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 누군가가 보인다는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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