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4)
“…….”
산적들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고홍이 누구던가?
천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산채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대별채의 채주다.
대별채의 채주이기에 특별한 게 아니다. 그가 채주였기에 대별채가 그 많은 녹림 산채들 중에서도 남다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광우도가 지금 화산의 어린 검수에게 목을 잃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썩은 고목처럼 널브러진 시신과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뒹굴고 있는 광우도의 머리를 보며 모두가 숨을 죽였다.
‘채주가…….’
‘……저, 정말로……?’
그 순간.
촤아아악!
광우도의 시신 앞에 서 있던 청명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산적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선 안 된다는 걸 모를 이가 있겠냐마는, 당장 눈앞에서 광우도 고홍의 목이 잘려 나가는 광경을 본 마당에 그런 상식이 머릿속에 남아 있겠는가?
“……그래서.”
청명의 검이 옅은 검기를 발출했다.
“다음은?”
그리고 이를 드러내며 산적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벅. 저벅.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심대한 압박을 느끼게 했다.
“으…….”
“…….”
산적들은 아까까지의 기세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주춤대며 한없이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산채에서 채주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대별채만큼 채주의 존재가 중요한 곳은 없었다.
대별채는 다른 산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혹독한 수련과 가혹한 취급을 버텨 낸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고홍이라는 절대자의 존재였다.
그가 죽어 버린 이상 대별채의 결속은 산산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개, 개죽음이야!”
“채주도 당해 내지 못한 놈을 우리가 어떻게 상대한단 거야!”
“다, 달아나자!”
일반적인 문파라면 수장이 죽는다고 해서 문파 자체가 붕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이득을 좇으며 힘만을 신봉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강한 이가 쓰러진 상황에서 굳이 목숨을 걸려 하지 않는다.
이건 사(邪)를 추종하는 이들의 근본적인 한계였다.
이번에도 역시 급격한 붕괴가 시작되었다.
“마주치면 죽는다!”
“달아나!”
“히이이이이익!”
어려운 건 처음뿐이다.
한 사람이 등을 돌리는 순간, 공포와 절망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모든 이들이 청명에게서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며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 대별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저…….”
번충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 저…… 저 고홍을…….”
녹림에 소속된 이라면 고홍이 얼마나 강한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신주오패라 불리는 녹림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이였으니까.
물론 녹림이라는 곳이 절대적인 고수의 질에 다소 손색이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저 광우도 고홍이라면 녹림이 아닌 어디에서도 최고수 대접을 받았을 것이었다.
적어도 명문의 장로급 정도는 찢어 죽일 수 있는 이였다.
그런데 그런 고홍을 저리 쉽게 죽여 버리다니.
“……세상에.”
번충은 경악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청명이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일전에 힘겨루기를 통해 청명의 강함을 절절히 실감했으니까.
그랬기에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청명을 형님으로 모시며 굴복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저 청명이 광우도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이긴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린 수준이다.
‘녹림왕의 선견지명은 실로 대단하구나.’
청명도 청명이지만, 그런 그의 능력과 문파를 알아보고 주저 없이 화산으로 달려간 임소병이 더 대단하게 보였다.
“왕이시여.”
“흐음.”
한껏 고양된 번충과는 달리 임소병은 딱히 표정 변화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임소병의 소매 안으로는 주먹이 꽉 쥐여져 있었다.
‘청명 도장은 언제나 예상 이상의 것을 보여 주는군.’
광우도를 이긴 것은 실로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긴 걸로도 모자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은 더욱 대단한 일이었다.
만약 청명이 광우도를 쓰러뜨리면서 저리 확고한 차를 보여 주지 못했다면, 남은 산적들이 결사항전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피해 규모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을 것이다.
‘계산……. 아니, 본능의 영역인가?’
어느 쪽이든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계산 아래 광우도를 짓밟았건, 본능적으로 여기서는 압도해야 한다고 느꼈건,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까.
청명이 검을 회수하는 모습을 보며 임소병의 눈은 한껏 빛나고 있었다.
“그럼 남은 건…….”
잠시 후 임소병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무서운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
화산의 제자들은 여전히 침착하게 혈의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얼핏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조금 전부터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쪽은 화산이 아니라 혈의인들뿐이었으니까.
임소병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저게 명문의 저력인가?’
간결해진 움직임이 확실히 눈에 띄었다.
화려함과 날카로움에 집착하던 이들의 검이 안정되는 순간, 겹겹이 쌓아 올린 기본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몸을 혹사시키는 고련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위험한 수련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명문이라 불리는 이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수련을 시작한 지 삼 개월만 지나도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기본 수련을 수 년, 수십 년 동안 꾸준하게 반복한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쌓은 토대는 평소에는 딱히 드러나지 않지만, 이런 위기와 마주했을 때는 그 어떤 화려한 경지보다 단단하게 사람을 지탱해 준다.
‘머리로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문파야 수도 없다. 한때 세상을 휩쓸고 천년의 영화를 자랑할 것 같았던 문파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도 그 이름을 끝까지 보존하는 이들은 결국 융성함이나 화려함이 아니라 기본을 지킨 이들이다.
화산이 발하는 빛도 그 저력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문파일지도 모르겠군.’
카가강!
매섭게 날아들던 세검이 깔끔하게 튕겨 나갔다.
서걱!
그 뒤를 이어 곧장 날아든 찌르기가 혈의인의 어깨를 꿰뚫었다.
“끄윽!”
혈의인이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굳이 쫓지 않겠다는 듯 매화검이 회수되었다.
파아아아앗!
그런데 그때, 벼락처럼 날아든 검이 물러나는 혈의인의 심장을 가르고 지나갔다.
서걱!
“…….”
쩍 벌어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혈의인이 믿을 수 없단 얼굴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 사숙.”
“네 자비 때문에 사형제가 죽어도 자비를 찾을 테냐?”
“…….”
“전장에서는 약한 마음을 품는 이가 먼저 죽는다. 아니, 먼저 죽어야지. 네가 베푼 자비 때문에 다른 이가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그 서늘 한 목소리에 곽회가 이를 악물었다.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백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라.”
“예!”
말을 마친 백천은 다시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군.’
화산의 제자들 중 부상자는 꽤 나왔지만, 다행히도 아직 치명상을 입은 이는 없었다. 반면 적의 수는 이미 절반에 가깝게 줄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느슨해지는 것만 경계한다면 무리 없이 승리할 수 있을 상황까지 왔다.
문제는…….
‘이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산적들이 패배를 직감하고 도주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이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충성심?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은 분명 광우도의 수하가 아니다. 이들이 광우도를 비웃는 것을 백천도 두 귀로 똑똑히 듣지 않았는가? 그건 산적의 자유분방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설령 그 대화를 못 들었다 치더라도, 이들이 다른 대별채의 산적들과 그 기질이 확연히 다른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모르겠군.’
대별채와 별 관계도 없는 이들이 어째서 이미 승부가 난 싸움에 목숨까지 내던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백천의 의문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풀리게 되었다.
“끄으으으아아!”
전신에 상처를 입은 혈의인 하나가 섬뜩하기 짝이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왜! 왜 우리가 이런 곳에서!”
전신에서 흘러내린 피로 옷이 흠뻑 젖어 버린 그는 바닥에 반쯤 주저앉은 채 끔찍한 절규를 내질렀다.
“왜! 왜! 왜 여기서 개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 우리가 왜!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늘을 향해 소리치는 모양새며 목소리가 어찌나 처절하고 비통한지, 서로 죽이려 싸우고 있던 화산의 제자들마저도 흠칫할 정도였다.
“어째서! 왜 우리에게 이런……. 이런 임……. 쿨럭! 쿨럭!”
푸우우웃!
하지만 돌연 그는 입을 콱 틀어막았다. 하지만 막은 것이 무색하게 검붉은 피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아니, 검붉다는 말도 무리가 있었다. 그가 뿜은 피는 아주 검었으니까.
‘독?’
가장 반응이 빠른 이는 당연히 당소소였다.
혈의인이 검은 피를 토하는 순간 그녀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물러서요, 당장!”
“소소야!”
현상의 외침에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혈의인을 면밀히 관찰했다.
“……아니야.”
그러다 입술을 질끈 깨문 뒤 다시 외쳤다.
“전염되는 독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튀는 피를 맞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알았다!”
이쯤 되니 백천은 더욱더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들이 독에 중독되어 있지?’
대체 누가 이들에게 독을 풀었다는 말인가?
“쿨럭! 쿨럭!”
피를 토한 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신음했다.
몸이 정상일 때는 올라오지 않던 독 기운이, 큰 부상과 동시에 전신으로 번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나는 여기서 죽고 싶지…….”
서걱!
툭.
중얼거리던 이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백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린 것이 화산의 제자들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다른 혈의인이었기 때문이다.
“구차한 놈.”
동료의 목을 단숨에 쳐 버린 혈의인은 기괴한 표정이 깃든 얼굴로 화산을 향해 다가왔다.
“여기서 빠져나간다고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
“어차피 우린 모두 죽는다.”
그 말에 혈의인들의 눈이 다시금 비장해졌다. 두 눈에 광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세검을 움켜잡은 그들이 악을 썼다.
“무사답게 죽어라! 쓰레기들아!”
“흐아아아아앗!”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 같았다.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화산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싸워 이기겠다는 게 아니었다. 죽더라도 상대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더 내고 죽겠다는 독기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길었던 전투를 끝맺을 마지막 격전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백천의 두 눈은 의혹으로 흔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