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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94화 (592/1,567)

594화.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3)

무인이란 실로 기묘한 존재다.

당장 눈앞에서 적이 목을 노리며 흉흉한 이를 드러내고 있단 걸 알고 있음에도 절대 고수들의 대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족속들이다.

감히 시선이야 돌리지 못하지만, 그들의 신경은 눈앞의 적이 아니라 저 먼 곳의 승부에 쏠려 있었다.

화산의 제자들도, 혈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변을 깨달은 건 혈의인들 쪽이 먼저였다.

‘뭐지?’

‘이 새끼들?’

언제부터였을까?

카가가각!

내뻗은 세검이 튕겨 나왔다. 물론 전투 내내 흔히 있었던 일이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직접 검을 휘두르는 이들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검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으니까.

‘대체 뭐가 변한 거지……?’

조금 전까지 화산의 제자들은 마치 날뛰는 맹수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악에 받친 살쾡이 같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칠고 난잡했던 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느려지는 게 아니라 공고하고 단단하게 변해 갔다.

‘싸우는 와중에 이런 게 가능하다고?’

물론 검이란 언제고 변한다. 무학이 제자리에 머물러있지 않은 이상, 검은 평생에 걸쳐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전투에 돌입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검의 성질이 변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파앗!

혈의인이 이를 악물며 더욱 빠르게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이전 같았으면 속도에만 치중하여 발작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들었을 화산의 제자들이 이제는 짧고 간결하게 검을 쳐 내기 시작했다.

그랬다. 이는 마치 저 앞에서 고홍을 상대하는 청명의 검을 닮았다.

‘이 개 같은 놈들!’

물론 감히 비견할 수는 없다. 저 검이 가진 심연은 들여다보기에 겁이 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깊이가 얕을지언정, 이들의 검은 분명 청명의 검과 닮아 가고 있었다.

‘우릴 앞에 두고 수련을 한다고?’

혈의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은가.

이들은 이 순간에도 저 검을 배우고 있다. 스스로 가진 아집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 더 옳은 것을 본 순간 즉각적으로 자신의 기질을 바꿔 나간다.

‘뭐 이런 놈들이!’

혈의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무학이란 쌓아 올리는 것.

이놈들이 아무리 애송이라고는 하지만, 뼈가 으스러지는 고련을 통해 자신의 무학을 쌓아 올린 기간이 족히 몇 년은 될 것이다.

무인은 그 쌓아 올린 토대 위에서 살아간다. 그 토대를 비틀고 변형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학을 재정립하는 종사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리 쉽게?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맹목에 가까운 신뢰다. 결코 이 방향이 틀릴 리 없고, 이 변화가 자신들에게 나쁠 리 없다는 대책 없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 미친놈들.’

앞선 이는 뒤에서 싸우는 이들이 자신의 검을 흡수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뒤따르는 이들은 전투 와중에도 그 가르침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받아들여 발전한다.

이토록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문파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카강!

아무리 휘둘러도 먹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어떻게든 방어를 뚫고 들어가 화산의 제자들의 몸에 자상을 남길 수 있었건만, 이제는 철벽이라도 만난 듯이 단 한 번도 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있다.

청명이 폭풍 같은 광우도의 도를 막아 내고 있는 것처럼, 화산의 제자들 역시 혈의인들의 검을 견고하고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파아아아앗!

순간적으로 뻗어 나온 검이 당황해하던 혈의인의 옆구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큭!”

체감으로는 검이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혈의인은 알고 있었다. 이건 저들의 검이 빨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완벽한 방어는 완벽한 공격을 낳는다.

방어가 가능해지며 여유를 되찾은 이들이 좀 더 확실한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머리로는 알지만,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당장 싸우는 와중에 상대의 무위가 두 배는 더 높아진다는 것을 무슨 수로 납득하고 인정하란 말인가!

“이 개 같은 놈들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검을 찔러 대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전 같지 않았다.

먼저 소리를 높이면 지지 않겠다는 듯 더욱 목청을 키우던 화산의 제자들이 가볍게 그의 검을 쳐 내고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들을 이쪽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혈의인들을 점점 짓누르기 시작했다.

단 한 치의 의심조차 존재하지 않는 눈. 자신의 길을 확신하며 흔들림 없이 올곧게 걷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혈의인들의 검이 점점 그 기세를 잃고 무뎌지기 시작했다.

‘더 낮게.’

‘중심을 지켜서.’

‘화려함과 속도에 현혹되지 마라.’

날뛰어서 해결될 게 아니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결국 검도 중심이 있어야 가치를 지닌다. 뻗어 나갈 때는 더없이 화려하더라도 지킬 때는 더없이 묵직해야 한다.

승리에 고무되고, 성장에 취해 잠시 화산 검학의 본의를 잊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듣고 또 들었음에도.

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번의 검이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전해 주었다. 곁눈질로 청명의 검을 바라보는 화산 제자들의 얼굴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쿠웅!

백천이 밟은 진각이 땅을 울렸다.

묵직하게 휘둘러진 검이 날아드는 세검을 쳐 내고, 순간 기세를 바꾸며 표홀하게 날아들어 숱한 매화로 혈의인을 뒤덮었다.

“아아아아악!”

방어는 무겁게, 공격은 날카롭게.

‘이거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무언가가 지금 그의 손끝에 머물러 있었다.

나아가고 싶을 때마다 기본을 돌아봐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을 만한 간단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일을 누구나 행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무학의 특성이었다.

‘누굴 가르치려 들었더냐!’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스스로도 아직 배움의 길 위에 서 있었건만, 조금 앞서 갔단 이유로 다른 제자들을 우습게 여겼다. 그가 얻은 수많은 것들을 얼마든지 전수해 줄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순간 백천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스스로 정진하는 것. 어떤 이유에서건 이 길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파아아앗!

그의 검이 혈의인의 심장을 꿰뚫었다.

사람을 이끄는 것이 입이 아니라 등이다. 가르치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검이다.

그걸 지금 청명이 보여 주고 있었다.

다른 오검들 역시 백천과 같은 것을 느끼는지, 좀 더 진중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

백천은 당혹함을 숨기지 못하는 혈의인들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너희는 우리의 적수가 아니다!”

신중함과 결연함을 품은 화산의 제자들이 각자의 검으로 그 목소리에 호응했다.

콰아아아아아아!

맹렬한 도기의 폭풍 한가운데, 청명의 모습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많은 이치와 해석을 담는다 해도 검은 결국 검이다. 휘두르고, 찌르고, 맞받는 것이 전부다.

콰아아아아!

머리를 향해 뇌전처럼 떨어지는 도의 옆면을 직선으로 날아든 검이 가볍게 쳐 냈다.

카캉!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도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튕겨 났다.

곧장 다시 청명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이는 비스듬히 세워진 검면에 비껴 흘렀고, 빠르게 재차 찌르고 들어갔을 때에도 섬전처럼 움직인 검에 부딪혀 밀려나 버렸다.

청명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어지러이 날아드는 도격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끄…….”

고홍의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흡사 대침에 찔리는 것처럼 단전이 아파 왔고, 심장도 금방 터져 버릴 듯했다.

거의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이었던 연격은 도를 휘두르는 이의 체력을 가혹할 정도로 앗아 갔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도가 멈추는 순간 그의 패배가 확실시될 테니까. 체력과 내력을 모조리 소진해 버린 그는 두 번 다시 이런 도격을 날릴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이 연격으로 이 승부를 내야 했다.

입에서 단내가 올라오고,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도는 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혈관이 하나둘 터졌다.

코에서 피가 줄줄 쏟아졌지만, 채 바닥으로 흘러내리기도 전에 도의 풍압과 열기에 증발해 버렸다.

‘쓰러져라……. 제발 쓰러져! 쓰러져라!’

하지만 아무리 도를 휘두르고 발악을 해도 눈앞의 상대는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켰다. 섬뜩하리만치 스산한 눈빛으로 날아드는 도격을 완벽히 받아 내었다.

고홍의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이건 공포였고, 경외였다.

‘왜!’

근육이 투두둑 찢어지기 시작했다.

‘왜 쓰러지지 않는 거냐!’

힘이 풀린 무릎이 꺾이고 도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도에 밀어 넣은 고홍이 마침내 혼신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생을 통틀어 과연 이만한 일격을 날려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완벽한 도격이었다.

정신과 육체, 그리고 내력이 하나가 되었다. 잠깐의 정적 뒤, 그의 도에 폭풍 같은 도강(刀剛)이 어렸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모든 것을 건 마지막 일격이 청명을 두 쪽 내겠다는 듯 광포한 기세로 하강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껏 담담히 그의 공격을 받아 내던 청명의 기세가 일변했다.

화아아악!

피부를 태우는 듯한 살기가 솟구쳤다. 기괴한 웃음을 내건 청명이 고홍의 도격을 향해 도리어 몸을 날렸다.

우우우웅!

암향매화검이 그런 그의 의지에 호응하듯 검명(劍鳴)을 흘려냈고, 이내 수십, 수백 송이의 붉은 매화를 피워 내기 시작했다.

‘뭣?’

대지를 양단할 기운을 품은 도가 매화의 숲에 떨어졌다.

가가가가가각!

꽃잎은 도에 맞닿으며 이지러지고 으깨졌다. 섬세하고 하늘하늘한 매화검기가 폭포수 같은 고홍의 도를 막아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하나.

이지러진 매화의 빈자리를 새로이 피어난 매화가 채운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점점(梅花漸漸).

고홍의 도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피어나는 수백, 수천 송이의 매화를 모두 으스러뜨릴 수는 없었다.

강철보다 더 단단한 도강이 서서히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했던 도가 금세 그 기세를 잃었고, 피어나는 매화 사이에 파묻혀 뒤틀렸다.

파아아아앗!

이윽고 단번에 솟구쳐 오른 매화의 흐름이 고홍의 언월도를 휘감아 올렸다.

까아아앙!

도가 반 토막이 나며 날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아아앗!

분분히 흩날리는 매화 속에서 청명이 환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서늘한 눈빛으로 고홍의 가슴께를 향해 파고들었다.

푸우우욱!

섬뜩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퍼졌다.

고홍은 천천히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있을 곳에 새하얀 검신이 거의 손잡이까지 박혀 있었다. 등을 뚫고 삐죽이 솟아오른 검 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쿨럭!”

쿵.

철탑 같았던 그의 몸이 흔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뒷걸음질 칠 때마다 검 날이 뽑혀 나가며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이…… 이럴 리가…….”

입으로도 피가 꾸역꾸역 역류하기 시작했다. 고홍이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자 주르륵 붉은 흔적을 남기며 쏟아졌다.

“이, 이럴 리가……. 그……는 분명…… 화산에는 내 적……이 없다고…….”

고홍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입은 연신 뻐끔대고 있었지만,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청명은 가만 지켜보다 말없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고홍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파아아앗.

서걱!

이윽고 잘린 고홍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머리를 잃은 몸은 휘청거리다 썩은 거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땅을 들이받았다.

쿠우우웅!

청명은 무심한 눈으로 쓰러진 고홍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직하게 말했다.

“정진하지 않는 이에게 재능 따위는 사치야.”

목숨으로 그 교훈을 얻었으니 나쁜 장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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