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단다. (1)
파르르르.
검 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가녀린 그 떨림은 점차 과격해진다 싶더니 이내 세상을 뒤흔들듯 거대한 움직임으로 화했다.
화아아아아악!
바짝 마른 장작이 거대한 불을 토해 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꽃들이 새하얀 한지를 점점이 물들이듯 번져 나갔다.
잠시 후, 세상이 휘날리는 꽃으로 가득 찼다. 그 괴사에 산적들의 눈에는 경악이 서렸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냐!’
실로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 꽃잎들은 그 붉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피를 탐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꽃잎의 형상으로 휘날린 검기가 몸을 파고들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이 베이고 뼈가 잘려 나가는 소리였다.
“아아아아아악!”
“아악, 내 팔! 내 파아아아알!”
파아아앗!
고통에 겨워 비명을 내지르는 산적들의 입으로, 매화를 뚫고 나온 검이 꽂혔다.
콰득!
덜덜 떨며 경련하던 몸뚱이가 이내 축 늘어져 검에 무게를 실었다.
수도 없이 경험한 무게임에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검을 뽑아낸 청명은 스산한 살기를 쏟으며 산적들의 중앙으로 돌진했다.
파아아앗!
꽃은 비산하고 피는 솟구친다.
가차 없이 상대의 심장을 벤 청명의 얼굴에, 일순 불편한 기색이 슬쩍 어렸다.
‘부족해.’
이 정도가 아니다.
본디 그의 검은 이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롭고, 몇 배는 더 정교했다.
다시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예전처럼 완벽하게 검을 휘둘러 보지 못했다. 전신이 사슬로 묶인 채 우리에 갇힌 느낌이었다.
움직일수록 지독한 갈증이 신경을 옥죄고 긁어 댔다.
서걱!
청명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튀었다. 소매로 닦아도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피는 더욱 넓게 번졌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잃은 검에 다가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다시 한번 손에 넣고 싶었다.
그 초조함이 검 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속에서 자꾸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갑갑함에, 내내 무감해 보이던 청명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부족하다고!”
살기충천한 그의 검이 뒤틀린 감정을 품고 산적의 육체를 꿰뚫고 가르다 종내엔 찢어발겼다.
피와 살점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청명은 그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물먹은 솜 같은 육체에 대한 답답함에 이를 갈아붙일 뿐이었다.
‘나 홀로 주교를 상대할 수 없었다.’
세상에 더 강한 이는 얼마든지 있다. 그가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북해에서 청명은 물론이고 일행들까지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화산의 미래 역시 빤했겠지.
세상에 강자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정한 마도 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해. 지금보다 더, 과거보다 더!’
손마디가 희게 질릴 만큼 검병을 꽉 움켜잡은 청명이 막 돌진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앗!”
“밀어붙여!”
“대가리를 깨부숴 버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청명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혈의인들의 기세에 눌려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이제는 그들의 등장 전보다도 배는 더 사기를 끌어올리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선두에 선 조걸이 간결한 쾌검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이 청명의 것과 무척 닮았다.
적진 한가운데에 뛰어든 유이설은 환상에 가까운 검기와 체술로 상대를 유린하고 있었다. 놀라운 집중력과 과감하면서도 완벽을 기하는 검에 대한 집착이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이 상대를 밀어붙이는 동안, 윤종과 백천은 사형제들의 옆을 지키며 위기에 빠진 이들을 돕고 투지를 북돋웠다.
그리고…….
“아미타불!”
혜연의 권강이 솟구쳤다. 여기선 결국 꽉 다물렸던 청명의 입매가 느슨히 풀리고 말았다.
“큭!”
그때 한 혈의인의 검이 화산 제자의 어깨에 박혔다. 하지만 그는 부상에 움츠러들기는커녕 성난 눈으로 혈의인을 응시하며 공격했다.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깔끔하지 못했고, 차마 매화라 불러 주기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매화는 매화. 어설프다 해서 그 본질이 사라질 리 없었다.
여기저기서 듬성듬성 피어나던 매화가 이내 주변을 붉게 물들였다. 이는 마치 화산의 정경과도 같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 골치 아픈 놈들이야.’
따라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청명이 앞서 달리는 것만으로도 악착같이 달라붙어 온다. 과거의 사형제들조차 그를 따라오는 것은 결국 포기해 버렸건만, 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놈들이 겁도 없이 죽어라 청명을 뒤쫓고 있다.
“저 자식 혼자 설치게 내버려 두지 마라! 우리는 화산이다!”
잔소리에 가까운 백천의 고함에, 청명은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검을 꽉 쥐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아니, 사실 멍청한 건 나지.’
모든 일을 홀로 할 순 없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강해진다고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하지만 머리에 피가 몰리면 매번 과거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지금의 내가 해야 할 것…….’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청명이 돌연 버럭 고함을 쳤다.
“허리가 비잖아, 조걸 이 새끼야!”
“내가 사형이야, 이 미친놈아!”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조걸의 반박에 청명은 히죽 웃고 말았다.
‘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저 혈의인들이 강한 건 사실이다. 물론 화산오검이라면 괜찮을 테지만,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분명 아직 버거운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을 무작정 보호할 때가 아니라 믿어 줘야 할 때였다.
제대로 된 매화를 피우기 위해서는 제 몫의 비바람을 맞고 추운 겨울을 이겨 내야 하니까.
“후으으읍!”
청명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다시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주변에서 주춤주춤 경계하는 산적들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쯧쯧. 이래서 산적 놈들이란.”
“이……!”
“그렇게 겁먹으면 봐주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
“대신 내가 조언은 하나 해 줄게.”
청명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라! 이 산적 새끼들아!”
한편 고홍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왜 저깟 놈들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단 말이냐!”
기세가 대단했던 혈의인들은 지금 화산의 방어에 막혀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전력 자체는 훨씬 높건만, 어깨를 맞대고 뭉친 화산 놈들이 기가 막히게 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간신히 한쪽 측면을 무너뜨렸다 싶으면 특히 눈에 띄는 몇몇 놈들이 귀신같이 구원에 나서서 수포로 돌아갔다.
“크아아악!”
“아악!”
그러다 보니 오히려 쓰러지는 건 혈의인 쪽이 점점 더 많아졌다. 반면 화산의 제자들은 상처를 입고 치명상으로 번지기 전에 대형의 뒤로 물러나며 목숨을 잃는 상황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쪽만 수가 줄어들 수밖에.
게다가 무엇보다도 문제인 놈이 있었다.
“어디 산적 새끼들이 눈을 부라려! 눈알 콱 뽑아 버릴라!”
대별채 산적들 사이에서 짐승처럼 날뛰는 청명을 보며, 고홍은 속이 뒤집히고 눈이 돌아갔다.
‘저 개 같은 놈이!’
모든 문제는 저놈부터가 시작이었다.
바로 저놈부터.
“채, 채주! 상황이…….”
“닥쳐라!”
그는 다시 다가와 거슬리는 말을 해 대는 이정방을 걷어차 날려 버렸다. 그리고 한 손에 언월도를, 다른 한 손에는 장창을 잡은 채 노호성을 내질렀다.
“비켜라! 이 쓸모없는 것들아!”
흡사 곰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 산적들이 기겁을 하며 좌우로 물러나 길을 터 주었다. 그러자 가장 앞쪽에서 날뛰던 청명과 고홍 사이로 길이 활짝 열렸다.
청명은 산적들을 베어 넘기더니 허리를 쭉 펴고 맞은편의 고홍을 빤히 보았다.
고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놈이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나이 많이 처먹어서 좋겠다, 이 새끼야.”
“……뭐라?”
예상치 못한 반격에 고홍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부러져라 장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상체를 완전히 뒤틀더니 고무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허리를 튕기며 장창을 집어 던졌다.
“흐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아아아!
장창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어마어마한 경기를 내뿜었다. 마치 포탄처럼 쏘아져 오는 장창을 본 청명이 눈을 부릅떴다.
콰가가각!
이내 휘둘러진 매화검이 장창의 앞부분을 가격했다. 하지만 검이 닿은 순간 전해진 힘은 청명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카강!
암향매화검이 장창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청명은 이를 악물며 허리를 빠르게 옆으로 꺾었다.
콰아아아아!
가공할 경기를 품은 창이 청명의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창을 휘감은 예기가 옷의 어깨 부분과 뺨을 거칠게 할퀴며 찢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곧 청명의 뒤에 꽂힌 장창은 땅을 한차례 뒤집으며 폭음을 터트렸다.
“…….”
청명은 손을 들어 뺨을 가볍게 훑었다. 찢긴 피부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음.”
손끝에 묻은 피를 핥은 청명은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거물이셨네?”
잠시 잊었다.
녹림도들은 어중이떠중이일 수 있지만, 그 채주들은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유별난 전력을 자랑하는 대별채라면 그 채주 역시 녹림 최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언월도를 움켜잡은 고홍이 성큼성큼 청명에게로 걸어왔다.
쿵! 쿵!
보보마다 실린 내력에 산 전체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그의 두 눈에는 흉포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감히 내 앞에서 설쳐 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내가 왜 광우도라 불리는지 알게 해 주겠다!”
“아, 그러셔?”
청명은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털었다.
“이거야 원, 명성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뭐, 괜찮지.”
검을 들어 고홍을 겨눈 그가 이죽거렸다.
“미친 소 모가지를 쳐 내면, 화산신룡이니 하는 낯간지러운 별호가 아니라 제대로 된 거 하나 붙지 않을까?”
“이놈이!”
“그러니까 와 봐. 그 모가지 예쁘게 잘라 드릴 테니까.”
“죽여 버리겠다!”
미친 소라는 별호가 무색하지 않게, 고홍은 정말이지 살벌한 기세로 청명을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빙글.
검을 돌려 잡은 청명은 신이 난 얼굴로 한껏 웃으며 그런 고홍을 맞아 달려 들어갔다.
“흐아아아아아아앗!”
“으아아아아아아압!”
고홍의 언월도가 내리쳐졌다. 태산이라도 쪼갤 기세였다.
그에 맞서 청명의 암향매화검이 폭발적인 검기를 두르고 허공을 갈랐다.
이내 도와 검, 두 병기가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거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풍압이 폭풍처럼 일었고, 사방을 모조리 쓸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의 폭풍에 휩쓸린 산적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산채를 넘어 절벽 아래로 튕겨 나갔다.
그그그그극!
검과 도를 서로 맞댄 두 사람은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려 서로를 밀어 냈다.
우득! 우드드드득!
팔의 근육이 고통을 호소하다 못해 툭툭 터져 나가고 뼈가 비틀렸다. 하지만 청명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오히려 검을 더 세게 밀어 넣었다.
“으…….”
고홍 역시 예상 외의 힘에 당황한 듯 이를 악물고 언월도를 더 세게 내리눌렀다.
가가가각!
두 병기 사이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상체가 점점 상대를 향해 기울어졌다. 힘겨루기를 하다 마침내 병기가 가슴께까지 내려갔을 때, 두 사람의 머리가 힘껏 맞부딪혔다.
쿠웅!
머리와 머리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기엔 너무도 크고 둔탁한 폭음이 터졌다.
힘 대 힘.
기교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오로지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른다.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댄 채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깨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을 적셨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흐아아아아압!”
“오오오오오오오!”
쿠우우우우우웅!
결국 내력과 내력이 부딪치며 빚은 거대한 충격파가 두 사람의 몸을 거세게 뒤로 밀었다.
쿠웅!
콰당!
동시에 뒤로 밀려나며 쓰러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 상대를 향해 다시 빛살처럼 쏘아졌다.
하늘을 가르는 검과 땅을 부수는 도가 다시 한번 하늘과 땅 아래에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