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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591화 (589/1,567)

591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6)

파아아앗!

눈에 보이지도 않는 쾌검이 육체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검으로 막으면 손목을 잘라 내고, 뒤로 물러나면 물러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쇄도해 심장을 꿰뚫었다.

살검(殺劍).

제압이라는 결과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베고 찔렀다.

“컥…….”

심장을 뚫은 검은 밀고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회수되었다. 가슴에 생긴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불신과 경악, 그리고 허무.

죽음을 목전에 둔 이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눈빛이야 언제나 대동소이했다. 청명은 그 시선을 가볍게 흘리며 다른 혈의인들을 응시했다.

저마다 두 눈에 독기를 담고 청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오.”

코앞에서 동료가 순식간에 넷이나 죽어 나간다면 누구라도 당황하거나 공포에 질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딱히 흥분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청명이 본능적으로 느리게 입술을 핥았다.

진한 피냄새와 독기에 찬 눈빛을 보는 순간, 뭔가 익숙한 느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이거…….”

입꼬리가 뒤틀렸다.

“어디서 맡아 본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두 눈에 살기를 머금은 청명은 검 손잡이를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쾅!

땅을 박차는 소리가 폭음처럼 터졌다.

이윽고 낮게, 또 낮게 마치 땅을 스쳐 나는 제비처럼 날아드는 청명의 모습이 보였다.

혈의인들이 발작적으로 그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카아아앙!

하지만 강한 일격에 모조리 맥없이 튕겨 나갔다.

파아아앗!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머리가 이해할 틈도 없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쾌검이 혈의인의 목을 노리고 들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획 꺾은 혈의인의 목에 예리한 검날이 스쳤다.

스으으읏.

예기가 피부를 가르고, 그 안의 속살을 베어 냈다.

푸우웃!

피가 새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졌다.

‘반격을…….’

그 순간.

휘이이잉!

마치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소음과 함께, 청명의 검이 대번에 횡으로 꺾여 움직였다. 그리고 혈의인에 목에 그대로 박혔다.

끄……르륵…….

피거품이 끓었다.

“끄……으…….”

그는 발작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에 박힌 검을 움켜잡았다. 붉게 젖은 잇새로 피거품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이미 죽음을 직감했음에도 그의 두 눈엔 절망 대신 독기가 가득했다.

“……죽……어…….”

느리게 뻗어진 혈의인의 세검이 청명의 배 쪽을 향했다.

청명은 서늘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파앗!

목에 박혀 있던 청명의 검이 일순 검기를 뿜어내며 빠져나왔고, 이내 혈의인의 손목을 아예 날려 버렸다.

울컥.

잘린 손목에서 솟구친 피가 청명의 얼굴로 흩뿌려졌지만 청명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혈의인의 가슴에 십여 차례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푸욱! 푸욱! 콰드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종내에는 심장을 꿰뚫었다.

“…….”

혈의인의 눈에서 삽시간에 생기가 빠져나갔고, 몸뚱이가 청명을 덮치듯 허물어졌다.

“너…… 자비가 없…….”

파아아앗!

유언이 끝나기도 전에 암향매화검이 무정하게도 그 목을 쳐 날렸다.

투두두둑.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 붉은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청명은 시신을 가볍게 걷어차 밀어 냈다. 장애물이라도 치우는 듯 무감한 움직임이었다.

촤아아악!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후, 청명은 모두를 천천히 시야에 담았다. 스산한 살기가 퍼졌다.

“느슨해.”

“…….”

혈의인들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다.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토끼를 쫓아 굴에 들어간 늑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범을 본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화산의 제자들도, 혈의인들도 아닌 고홍이었다.

“뭐, 뭐 하는 거냐!”

고홍이 붉으락푸르락하며 고함을 질러 댔다.

“저놈을 죽여라! 당장 잡아 죽여!”

“채, 채주!”

콰아아아아아앙!

고홍의 언월도가 잔뜩 겁먹은 산적들의 등 뒤로 떨어졌다.

“아아아아악!”

십여 명의 산적들이 단번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

그러자 주위의 산적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홍과 청명을 번갈아 보았다.

“내 손에 죽겠느냐?”

고홍이 낮게 윽박지르니 이내 그들의 눈에 독기가 들어찼다.

“죽여라!”

“한 놈이다! 협공해서 죽여 버려!”

광기에 물든 대별채 산적들이 청명을 향해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었다. 청명이 재미있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좋지.”

이윽고 폭우에 불어난 급류처럼 밀려드는 산적들의 머리 위로 붉은 검기가 치솟았다.

붉게 솟아오른 검기가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곽회의 얼굴 바로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검이 스쳤다.

서걱!

실려 있던 검기가 입부터 귀까지 이어지는 긴 자상을 그렸다. 불로 지진 것 같은 화끈한 통증에 곽회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상처를 입힌 뒤 한 발 뒤로 물러선 혈의인이 말했다.

“용기라도 솟아나는 모양이지?”

“…….”

그 입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내걸려 있었다.

“손에 피를 묻혀 본 적 없는 놈들은 결국 그 정도지. 너희 같은 짐 덩어리를 짊어지고 싸워야 하는 저놈에게 동정심이 들 정도야.”

곽회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 때문에 눈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눈을 깜빡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저놈이라면 그 찰나의 순간에도 충분히 목을 갈라 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정말로 곽회의 뱃속을 긁어 대는 것은 저놈이 뿜어 대는 살기가 아니라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야.’

위험이 다가온다고 느낀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화산오검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곽회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짐 덩어리가 아니야.’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기대기만 해서는 평생 사형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는 기대는 이가 아니다. 사형들의 등을 밀어 줄 당당한 화산의 자제다.

믿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

그의 안에는 지금껏 그가 지켜 온 화산의 가르침이 있다.

그러니…….

곽회의 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찔린 상처들이 욱신대기 시작했지만,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래. 나는 아직 애송이지.”

새파란 빛을 띤 곽회의 두 눈이 혈의인을 노려보았다.

“호오?”

“그렇다면…….”

짙은 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너를 꺾고 애송이 티를 벗어 주마!”

“하핫!”

그 말에 혈의인의 두 눈에 웃음기와 혈광이 동시에 차올랐다.

“어디 해봐라, 애송아!”

곽회가 짐승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떨쳤다.

하지만 그 표정과 달리, 검을 잡은 손에서 이내 느슨하게 힘이 풀렸다.

‘머리는 차갑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화산의 가르침은 그의 몸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더 강한 이를 상대하는 법 역시 지겹도록 배웠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배운 것을 펼치지 못한다는 건 그가 머저리라는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휘이이잉!

경력을 잔뜩 실은 곽회의 검이 혈의인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카아앙!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혈의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두어 발짝 물러났다.

‘이 어린놈의 내력이 어떻게…….’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는 도무지 걸맞지 않은 내공이었다. 지금껏 상대해 온 다른 문파의 애송이들과는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나는!”

그때 검을 회수한 곽회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화산의 삼대제자 곽회다!”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내지른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꾸만 짓눌리는 자신을 북돋우고, 스스로의 검을 되찾기 위한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하나.

그 외침을 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꽉 움켜잡았다.

“나는 화산의 이대제자 백상이다!”

백상 역시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고는 검을 앞으로 겨눈다. 여기저기서 스스로를 일깨우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와라, 악적!”

“……이놈들이…….”

화산의 제자들은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았다. 두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굳건히 뻗은 발은 땅을 단단히 디뎠다.

“목소리를 높여라, 빌어먹을 놈들아! 상대하기 만만한 이들에게만 입을 털어 댈 테냐!”

백상의 외침에 화산의 제자들이 저마다 눌려 있던 기세를 폭발시키며 앞으로 짓쳐 달려들었다.

“이 새끼들이!”

혈의인이 이를 악물며 눈앞의 화산의 제자를 베어 내려는 순간.

파아아아앗!

어디선가 날아든, 섬전과도 같은 쾌검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큭!”

혈의인이 기겁하며 황급히 몸을 물렸다.

‘이 쾌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거 자신만만하게 달려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시선을 돌리니 한 사내가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보이며 걸어 오는 게 보였다.

“그럼 목도 내어 놔야지.”

“이…….”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대충 쓸어 올린 조걸이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죽여 버…….”

파아아앗!

하지만 혈의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걸의 검이 다시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카앙!

본능적으로 막아 내긴 했으나, 조걸의 눈에 담기 써늘한 살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등골이 오싹했다.

“왜 겁이라도 먹었나?”

“…….”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조걸이 기괴하게 웃으며 맹렬한 공격을 쏟아부었다.

“이 애송이 놈아!”

파아아앗!

조걸이 치고 나간 그 순간, 사형제들의 머리를 뛰어넘은 한 사람이 허공에서 몸을 한차례 비튼 뒤 아래로 하강했다.

파아아아앗!

혈의인들의 한가운데에 뛰어내린 검수의 검이 환상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크윽!”

“읍!”

육체를 가르고 지나가는 섬뜩한 검의 예기가 혈의인들을 주춤하며 신음하게 만들었다.

유이설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닥을 쓸 듯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비단 폭을 단번에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풍압이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누런 먼지 사이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검이 혈의인들의 발목을 빠르게 갈라냈다.

“이 빌어먹을 년이!”

험한 말을 쏟아내며 달려든 혈의인은 순간 느껴지는 섬뜩함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쇄애애애액!

바로 코앞까지 날아든 비수(匕首)를 발견한 그는 다급하게 몸을 굴려 가까스로 피했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만 발견하는 게 늦었어도 그의 머리는 꼬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엄호할게요!”

당소소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유이설이 검을 역으로 틀어잡았다.

대치하는 모양새가 된 그 순간이었다.

저벅. 저벅.

한 사내가 사형제들 사이로 걸어 나와 중단세를 잡았다. 마치 자신을 지나야 다른 이들을 공격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했다.

“와라.”

그의 짧은 말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완벽하게 상대를 도발할 수 있었다.

혈의인들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다 죽여 버리겠다!”

그들은 굶주린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화산을 향해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파르르르르르!

달려드는 이들의 앞에 붉은 매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화의 숲을 옮겨 오기라도 한 듯 환상적인 광경에 혈의인들이 홀려 버린 듯 달려드는 속도를 줄였다.

매화 검기를 뿜어낸 백천의 신호에, 화산의 제자들이 다시금 힘을 얻고 검을 휘둘렀다. 인정사정없이 혈의인들을 몰아쳤다.

백천은 슬쩍 유이설, 윤종, 조걸, 그리고 당소소를 살폈다. 그리고 그 신경을 우측으로 돌렸다. 그곳엔 약속한 것처럼 청명이 있었다.

‘하여간 저놈은.’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있어야 할 곳에 있다. 아무리 따라잡으려 해도 매번 그림자조차 보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청명이 놈만 설치게 두지 마라!”

적어도 등을 밀어 주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쳐라!”

화산의 제자들이 든 매화검이 눈부신 검기를 뿜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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