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5)
촤아아악!
그들의 발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흡사 비단 폭이 스치는 것처럼 들렸다.
몸이 가볍고 경공이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무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현상과 운검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들이 화산에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다르다.’
지금껏 상대하던 산적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기세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한 것은 둘째 치고, 저들의 기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온다!”
흔한 기합 하나 없이 빠르게 달려든 혈의인들이 산적들의 머리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콰득!
“끄륵!”
무참히 산적들의 머리를 짓밟으며 가속하자 그 속도가 두 배 가까이 빨라졌다.
하나, 날아오는 혈의인보다도 화산 제자들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머리를 짓밟힌 이들이 목이 꺾인 채 쓰러지는 광경이었다.
“동료를……?”
“이 미친 새끼들이!”
화가 끓어오른 화산의 제자들이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
하지만 분노를 터트리기도 전에 혈의인들의 칼이 어깨를 서로 맞댄 화산 제자들의 어깨를 향해 쾌속히 날아들었다.
이에 맞서 검을 일제히 휘두르자 사방으로 거대한 풍압이 일었다. 내력의 폭풍이 주변을 찢어발기는 듯 휩쓸었다.
채애애앵!
그 풍압의 폭풍 한가운데서, 매화검과 세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큭!”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충격에 화산 제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껏 산적들의 무기에서 전해지던 것과는 힘의 무게 자체가 달랐다.
화산의 제자들은 오늘 처음으로 느끼는 무거움에 절로 신음을 흘렸지만, 혈의인들은 조금도 그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기괴한 웃음을 띠며 검을 꽉 내리눌러 왔다.
곽회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검을 짓눌러 오는 내력에 전신이 욱신욱신할 정도였다.
하나 그의 머리는 이치와 논리를 생각하기 전에 이미 화산의 가르침을 좇고 있었다.
‘힘은 힘으로써 상대하지 않는다.’
그의 검이 느슨하게 풀리며 상대의 검을 흘려내려는 순간이었다.
카가가각!
얇디얇은 세검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곽회의 검을 타고 살아 있는 뱀처럼 빠르게 기어올랐다.
‘엇!’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세검은 검을 쥔 곽회의 손목을 물어뜯듯 베어 냈다.
서걱!
손목의 위쪽이 반 치나 쩍 벌어지더니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읏!”
카아앙!
이를 악문 곽회는 검을 세차게 휘둘러 얼굴을 노리고 날아드는 세검을 후려쳤다.
욱신. 욱신.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머리카락을 쭈뼛 곤두서게 만들었다.
강하다.
일 수의 교환만으로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검은 더없이 강하고 무섭도록 날카로웠다.
심지어 이들이 뿜어내는 살기는 또 어떤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저려 오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게 진짜 실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생사결.
그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 들고 있는 검이 배는 무거워지고, 전장의 곳곳을 파악하던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채 싸우는 것처럼 말이다.
“하앗!”
하나 혈의인은 곽회가 평정심을 찾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섬뜩한 살기를 내뿜으며 독사처럼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아앙!
수십 개의 검영이 일제히 곽회의 전신을 덮칠 듯 날아들었다. 흡사 수십 마리의 독사가 일제히 날아드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침착하게!’
이에 맞서 쾌속하게 움직인 곽회의 검은 날아드는 검영을 하나하나 일일이 걷어내었다. 하지만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느려진 검은 이내 세검의 속도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서걱!
“큭!”
세검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스친 것에 불과했고, 그 깊이 역시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그의 검이 상대의 검속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파아앗!
이내 빛살 같은 검기가 또다시 검의 방어를 뚫고 육신을 파고들었다. 어깨를 찌른 후 가슴에 틀어박혔다.
푸욱! 푸욱!
매화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을 뚫느라 약해진 기세와 얄따란 세검의 특성 탓에 그리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상처는 상처.
상처가 점점 늘어 갈수록 곽회의 검 역시 점점 무뎌졌다.
“으아아아앗!”
그는 발작하듯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잔뜩 실린 내력과 함께 검영이 화려하게 흩어졌고, 이내 전면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카가가가각!
피 묻은 세검이 그 검막(劍幕)을 단숨에 꿰뚫었다. 그리고 곧장 곽회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곽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카앙!
그 순간, 옆에서 때마침 날아온 매화검이 세검을 후려쳐 걷어 냈다.
“정신 차려!”
뒤늦게 퍼뜩 정신이 돌아온 곽회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옆에 있던 사형제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심장에 저 세검이 꽂혀 있었을 것이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아무리 마음을 굳건히 먹는다 해도 죽음이 코앞을 스쳐 지나간 순간까지 담담할 수는 없었다.
몰리는 것은 곽회뿐만이 아니었다.
“아악!”
“빌어먹을, 이 새끼들 강하다!”
“자리를 지켜! 물러서지 마라!”
전세가 일변했다.
혈의인들의 수준은 깜짝 놀랄 만큼 높았고, 지금껏 상대한 산적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수가 오십에 달하니 상황이 좋을 리 없었다.
쿵!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뛰어오른 혈의인들의 검 끝에서 붉디붉은 검기가 송곳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윽!”
그 검기는 오로지 화산 제자들의 급소만을 노리며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피가 솟구치고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들이…….’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화산 제자들의 귀에 고홍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득달같이 달려들던 혈의인들이 기세를 꺼트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광소를 터뜨린 고홍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제자들과 그 사이에 있는 임소병을 보며 고홍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승승장구할 때는 세상이 만만해 보였겠지.”
“…….”
“그래서 대별채 정도는 언제든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쥐새끼?”
이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임소병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러니 너 따위 놈에게는 녹림왕의 자리가 과분하다는 거다. 그 오만함이 네 목을 옥죈 것이다. 이 멍청한 쥐새끼 놈아! 으하하하하하핫!”
고홍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산채가 다 쩌렁쩌렁 울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들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바로 혈의인들이었다.
“아주 신나셨군.”
“산적 놈답다고 해야 하나?”
그들의 반응에 백천의 눈빛이 순간 싸늘해졌다.
‘산적 놈?’
자신의 두목을 산적이라 지칭한다고? 이들은 고홍의 수하들이 아닌가?
‘아니지. 그래, 이놈들은 녹림도가 아니구나.’
그리고 이어진 임소병의 반응이 더욱 확신을 주었다.
“대체 누굴 끌어들인 거냐, 이 병신 같은 놈이!”
임소병이 살기까지 뿜어내며 고함을 내지른다. 핏발이 선 두 눈과 쥐여진 주먹이 지금 그가 얼마나 노기에 차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피차일반이 아닌가?”
“이…….”
이가 빠드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그가 화산을 끌어들인 것은 화산이 녹림 자체를 먹어 치우려 들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고홍이 끌어들인 자들에게서는 더없이 위험한 냄새가 났다.
이런 이들이 고홍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고 얌전히 빠질 리가 없다. 분명 고홍을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적당한 시점이 되면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녹림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녹림은 정말로 끝장이다.
‘대체 누구냐?’
고홍은 우둔하다. 하지만 남을 쉽사리 믿지도 않는 자다. 그런 자를 이렇게나 완벽히 홀릴 수 있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대체 누구와…….”
“거기까지.”
고홍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죽을 놈과 말을 섞을 필요는 없지. 시간을 끌어 봐야 결과는 같다!”
“…….”
“이 산이 너희의 무덤이 될 것이다. 뭐 하느냐! 모두 쳐 죽여라!”
혈의인들이 슬쩍 고홍을 돌아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충성을 담은 대답이나 거친 호응 따윈 없었다. 그저 그 명만은 들어주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으며 화산의 제자들을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혈의인들의 세검이 붉은 검기를 뿜어냈다.
그 휘몰아치는 살기에, 대별채의 산적들도 두 눈에 광기를 담고 화산을 살벌하게 조이고 들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장로님.”
“으음!”
운검의 부름에 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세에서 밀려서는 안 돼!’
전장에서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든 꺾여 버린 사기를 다시 살려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하하핫!”
현상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전방의 혈의인들이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
“버텨라!”
화산의 제자들이 응전을 위해 이를 악문 그 순간.
파아아아앗!
귀를 찢는 파공음이 울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의 머리를 타고 넘어 섬광처럼 혈의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전방에 있던 혈의인 둘이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경계했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이미 스쳐 지나간 이의 등뿐이었다.
그극.
피를 머금은 검이 바닥을 가볍게 긁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 검으로 쏠렸다.
피.
검을 든 이는 피 한 방울 흘린 흔적 없이 멀쩡했다. 그렇다면 저 피가 어디에서 흘렀겠는가.
‘말도 안…….’
투욱.
고개를 돌렸던 이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남은 몸뚱어리는 잠시 휘청하더니 이내 균형을 잃고 고꾸라졌다.
털썩. 털썩.
목 없는 시신이 쓰러지는 소리가 전장을 우뚝 멈춰 세웠다.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것 같았던 이들이 모두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홀로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긋.
사내의 검이 다시 한번 바닥을 긁었다.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어모으겠다는 듯이.
“별것도 아닌 놈들이…….”
태연한 목소리.
조금 전 두 사람의 목을 깔끔하게 쳐 날려 버린 이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였다.
청명은 천천히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앞에 놓인 제자들은 모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딱히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화가 난 표정으로 노려본 것도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화산의 제자들은 그 감정 없는 시선에서 ‘겨우 이런 놈들을 상대로 겁을 먹은 거냐’는 호된 질책을 느꼈다.
“이…….”
그때 청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혈의인이 이를 갈아붙이더니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죽어라아아아앗!”
동시에 청명의 서늘한 시선이 움직였다.
시선은 빨랐고, 검은 더 빨랐다. 마치 섬전처럼 휘둘러진 검이 날아드는 세검을 후려쳐 튕겨 냈다.
푸욱! 푸욱! 푸욱!
순식간에 불어난 검이 혈의인의 상체를 거듭 찔렀다. 순식간에 가슴팍에 십여 개의 자상을 입자, 혈의인의 입에서 붉디붉은 피가 폭포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끄……으…….”
파아아앗!
마지막으로 검이 움직인 순간 혈의인이 잘린 목이 허공으로 날렸다.
촤아악.
딱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낸 청명이 입가를 뒤틀었다.
“…….”
혈의인들이 숨을 죽였다.
피 냄새가 자욱했다.
저자에게서는 다른 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혈향이 짙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명의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 주지.”
새하얀 이를 드러낸 청명이 먹이를 노리는 늑대처럼 혈의인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