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4)
“흐아아아압!”
“오오오오오!”
화산과 대별채가 서로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쇄애애애액!
검은 더없이 빠르고 영활했으며, 그 검을 맞이하는 도는 무척이나 강맹했다.
카아아앙!
검과 도가 부딪히자 귀를 찢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큭!”
“이익!”
서로의 병기를 마주한 순간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표정이 굳어졌다.
“만만치 않다!”
“방심하지 마라!”
먼저 소리친 건 화산 쪽이었다.
이미 적웅채와 혈랑채를 상대해 보았건만, 지금 도에서 전해져 오는 힘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세 개의 산채가 이곳에 있었음에도 대별채의 이름만이 그리 들려왔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심정은 대별채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이, 이놈들이!”
“물러서지 마라!”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검으로 더 많은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화산 제자들과 대별채 산적들의 상황이 딱 그랬다.
가가가각!
날아드는 커다란 대부(大斧)를 밀어 낸 운검이 안색을 굳히며 소리쳤다.
“힘으로 맞상대하지 마라!”
“예, 관주님!”
운검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만만치 않은 이로군.’
운검은 강호의 정세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상대하는 산적들의 무위나 훈련 상태가 이전의 산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녹림왕의 자리를 노리는 자라는 건가?’
산적이란 결국 강자를 따르는 이들이다.
때문에 더 강한 우두머리가 있는 산채에 더 강한 산적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결국 채주의 힘이 곧 그 산채의 힘을 상징한다는 의미.
그러니 거꾸로 생각하면 저 고홍이라는 자의 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결국은 산적!’
운검은 화산의 힘을 누구보다 믿었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 중 누구 하나 게으름을 부린 녀석이 없었다.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은, 다른 문파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힘겨운 수련을 불만 한 마디 없이 버텨 냈다.
제아무리 고홍이 녹림도들을 윽박질러 수련시켰다고는 해도, 스스로 강해지겠다는 향상심을 품고 수련을 버텨 온 화산의 제자들이 그에 뒤질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운검은 스스로의 가르침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 가르침을 이겨 낸 제자들을 믿었다.
“너희 스스로를 믿어라! 너희는 이미 충분히 강하다!”
웬만해서는 들을 수 없는 운검의 커다란 외침이 화산의 제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윤종, 조걸! 좌측을 지원해라!”
“예, 사숙!”
“사고! 소소와 함께 우측을!”
“네, 사형.”
빠르게 상황에 대처하며 백천은 중앙으로 섬전처럼 나아갔다.
파아아앗!
그가 내지른 검이 악에 받쳐 도를 휘두르던 산적의 목을 단숨에 꿰뚫었다.
“끄……르륵…….”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산적이 눈을 까뒤집으며 고꾸라졌다. 하지만 백천은 쓰러지는 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다음 산적들을 향해 수십 개의 검영을 쏘아 냈다.
“아아악!”
“내 다리! 아악!”
쿵!
그리고 거세게 진각을 내리밟았다.
‘말만으로는 이끌 수 없다.’
이미 그는 충분히 보았다. 사람을 이끄는 등이라는 게 어떤 건지 말이다.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이가 앞에서 이끌 때, 따르는 이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미 청명의 등을 보며 수도 없이 느낀 일이 아니던가?
‘언제까지 그놈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수는 없지!’
그는 언제고 화산의 장문인이 되어야 할 몸.
이끌려 갈 자가 아니라 이끌어 갈 자였다.
파르르르.
그의 검 끝이 흔들리며 이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매화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사형!”
“사숙의 뒤를 지켜라!”
말로 하지 않아도 사형제들은 그의 의도를 알고 굳건하게 주변을 지키고 섰다.
백천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자, 화산!”
“예!”
전방에 선 오검과 운자 배들은 가장 위험한 곳을 자처하며 맹렬한 기세로 화산을 이끌어 갔다.
한편,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이정방은 머리를 싸맸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런 식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화산의 전력이 그들을 상회한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바가 아니던가? 정면으로 붙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런데 저 망할 채주 놈은 지형적인 이점도, 수적인 우위도 활용하지 못한 채 정면으로 냅다 들이받고 있었다.
병가로서 보자면 가장 해서는 안 될 짓만 쏙쏙 골라 저지른 것이다.
차이는 명백하다.
절대적인 힘을 놓고 보면 이쪽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하나가 가진 무위는 저 화산 쪽이 분명 더 뛰어나지만, 수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그들의 전력이 더 뒤진다고 단정 짓긴 어렵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전투의 기세는 확연히 화산 쪽으로 쏠려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다.’
아직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이들이 백전을 치러 온 병사들처럼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단순한 조직력이 아니라, 신뢰였다.
녹림이 아무리 훈련하고 단련한다 해도 제 옆에 선 이에게 완전히 제 목숨을 내맡기고 싸울 순 없을 것이었다. 뼛속 깊이 새겨진 불신을 뛰어넘는 것은 수련만으론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저 화산파 놈들은 제 주위를 지키는 이들을 완벽히 믿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 자신이 막지 못하는 검은 사형제가 막아 주고,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적도 누군가 함께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본디 문파란 그런 것이다.
각기 다르게 살아온 이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서로를 믿고 신뢰할 때, 그 전력은 몇 배로 치솟기도 한다.
이끄는 이는 따르는 이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따르는 이들은 앞서는 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 아악!”
“뭐, 뭔 놈들이……!”
이제 전황은 한눈에 봐도 확실히 밀렸다. 넓게 포진한 대별채의 중앙을 화산의 검수들이 거침없이 베어 내고 뚫었다.
이대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이 완전히 관통되고 말 것이었다.
‘채, 채주!’
이정방은 당황하여 고홍의 등을 바라보았다.
패색이 완연하건만, 그는 상황을 지켜보며 딱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이정방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설마 지, 진짜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그는 결국 용기를 내어 고홍에게로 달려갔다.
“채, 채주!”
“흐음.”
자신의 바로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 대는 이정방을 보더니 고홍은 눈썹을 슬쩍 꿈틀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이대로 두면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오호(五虎)! 오호를 투입하십시오!”
오호는 고홍이 직접 키워 낸 그의 심복들이었다.
전황을 뒤집고 바꿀 수 있는 건 고수들밖에 없다. 그들이 전면에 서 준다면 저 높은 기세도 한 풀 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오호를?”
“예, 채주!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게…….”
그 순간 고홍이 대번에 이정방의 멱살을 움켜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 아아악!”
“이 쓸모없는 놈 같으니.”
“채, 채주?”
고홍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봐라!”
그는 앞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정방이 그 손끝에 놓인 것을 보니, 한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는 산적들뿐이었다.
“무, 무엇을 보란 말입니까?”
그리고 그 중앙에 파고들며 사정없이 산적들을 베는 화산의 모습뿐.
“보이느냐?”
“예?”
“쯧쯧. 놈들이 중앙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느냐. 제 스스로 포위라도 당하겠다는 듯이!”
그 당당한 말에 이정방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채주! 포위라는 것은 상대를 쓰러뜨릴 힘이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겁니다. 모자란 전력으로 상대를 포위하는 건 각개격파를 자초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한 이정방이 못 참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보이는 것도 없었다.
이 멍청한 작자 때문에 그까지 덩달아 죽게 생기지 않았는가?
“힘이 부족하다면 그렇겠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정신이 나가기라도 하셨…….”
철썩!
콰당!
고홍이 이정방의 뺨을 후려쳤다.
한 방에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이정방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부여잡고 뒹굴며 신음했다.
“네놈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옳았다. 무능해 빠진 놈!”
“…….”
이정방은 뺨을 감싸 쥔 채 멍한 눈으로 고홍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끌끌끌.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도 틀린 게 없구나. 귀신 같아. 정말 귀신 같군!”
“채, 채주?”
“뒤로야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도, 그 능력만은 네놈 따위보다 백배는 믿음직스럽지!”
핏발 선 고홍의 눈에 만족감이 서렸다.
“전력이 부족하다고? 아하하하하하핫!”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언월도로 강하게 땅을 내리쳤다.
“그럼 부족한 전력을 더하면 그만이지! 다들 나와라! 저 겁 없는 애송이 놈들을 모두 죽여라!”
이정방은 고홍이 아주 미쳐 버린 건 아닐까 고민했다.
누구더러 나오라는 건가? 오호?
아니. 오호는 아니다. 오호를 투입하는 뻔한 수작이라면 이리 요란을 떨어 댈 리가 없다.
그럼 누구?
‘나 모르게 다른 채와 연합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고홍에게 그런 수완이 있었다면 이런 일까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 폭급한 성격 때문에 다른 산채에서도 은근히 경원시하던 인사가 고홍 아닌가.
그럼 대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화탄이라도 터진 듯한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녹채를 둘러싸고 있던 목책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히익!”
기겁하며 고개를 돌린 이정방의 눈에 뿌옇게 솟아오른 먼지구름이 들어왔다.
“…….”
이윽고 자욱하던 먼지가 산바람에 훅 밀려나는 순간.
‘뭐, 뭐지. 저놈들은?’
정체불명의 혈의인들이 나타났다. 이정방은 두 눈을 부릅떴다.
목책 뒤쪽으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 그들의 수는 다 해 봐야 오십 정도였다. 육백이 넘는 이들이 맞붙은 곳에서 오십이라는 숫자는 일견 터무니없이 적어 보일지 모른다.
하나 그들의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란 걸 직감했다.
피처럼 붉은 무복에 기괴할 정도로 얇은 세검(細劍)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숨이 막힐 만큼 진득한 살기였다.
“흐하하하하하핫!”
고홍이 목이 터져라 웃어젖혔다.
“제 머리 하나 믿고 설치는 쥐새끼 놈아! 세상이란 네 머리 안에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임소병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해진 얼굴로 낯선 무인들을 응시했다.
‘대체 뭐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단언컨대 저들은 녹림도가 아니었다. 저들의 행색과 기운에서는 녹림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등허리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었다.
‘이게 모두 함정이었다고?’
저 고홍이 함정을 팠다고?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뼈저리게 실감하는 찰나, 고홍의 언월도가 중앙에 자리한 화산의 제자들을 겨누었다.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혈의인들이 목책을 넘어 전진했다.
상황이 바뀌자 모두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데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어이, 사숙.”
“……뭐냐?”
“훈련은 여기까지야.”
“응?”
채앵.
청명의 허리춤에서 암향매화검이 뽑혀 나왔다.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삽시간에 어두워진 그의 두 눈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