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사나이가 검을 뽑았으면 목이라도 잘라야지! (1)
산채 중앙에는 포박된 채 무릎 꿇은 산적들이 즐비했다.
무공이 폐해진 그들의 얼굴엔 인생을 고스란히 뺏긴 듯한 커다란 상실감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무인에게 무공을 잃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떤 의미에선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현상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양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산적들이다.’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이가 있고, 무공을 익히고 있기에 세상에 해가 되는 이들이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명백히 후자였다.
어설픈 가르침으로 개과천선을 논하는 것은 때때로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낳는다. 차라리 일벌백계를 통해 후환을 없애는 쪽이 나았다.
“아이들은 어떠하더냐?”
“경상을 입은 아이들이 몇 있지만, 크게 부상 입은 아이들은 없습니다.”
“음!”
현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이만한 규모의 난전에서는 눈 먼 칼에 목숨을 잃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화산은 정말로 강해졌다.
청명이 녀석이 오기 전의 화산이었다면, 적웅채는커녕 녹림의 말석에 있는 작은 산채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피해 없이 녹림칠십이채의 상위권에 있는 산채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변화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났으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속도로 강해졌는지 실감되어 새삼 놀라웠다.
“고생들이 많았다.”
“아닙니다, 장로님!”
“이 정도는 거뜬합니다!”
아마 제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들썩거리는 어깨야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지만, 상기된 얼굴에서는 주체하지 못한 뿌듯함이 듬뿍 배어났다.
하지만…….
그 바람에 모두가 잊고 있었다. 이곳에는 악귀가 하나 있고, 그 악귀는 늘 마냥 즐거운 광경을 두 눈 뜨고 못 봐 준다는 것을.
“뭐 대단한 일 했다고 어깨춤을 들썩거려? 고작 산적 놈들이나 때려잡은 건데.”
찬물을 끼얹는 발언에, 화산의 제자들은 뚱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되레 뻔뻔하게 배를 내밀어 댔다.
“뭐?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새끼.”
“꼭 저렇게 초를 쳐요, 꼭!”
청명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언제부터 화산파가 산적 새끼들 좀 때려잡았다고 배에 힘주는, 그런 하찮은 곳이 됐어?! 선조들이 보면 아주 속이 터져 돌아가시겠네!”
- 나는 아니다. 아니라고!
“아, 거기 조용히 좀 하시고!”
“……누가 떠들었냐?”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청명을 보며 모두가 한숨을 내쉬었다.
“흠.”
하지만 구박을 듣고도 제자들은 상기된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다시 배시시 웃거나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청명은 결국 피식 웃었다.
‘당연히 좋겠지.’
승리란 그 무엇보다 값진 경험이다.
물론 패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지금은 패배보다는 승리로 자신감을 얻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화산의 제자들에게는 미묘한 패배 의식이 있었다.
내내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으니, 재능을 인정받아 대문파에 든 이들에게 미묘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떨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놈들이 감히 못 할 일을 해 버리는 거지.’
명성의 얻는 게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겸사겸사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경험도 쌓일 테고.’
이 전투에서 얻은 가장 큰 이점은 바로 처음으로 화산 전체가 나서서 집단전을 경험해 보았다는 점이다. 세상이 평화롭기 짝이 없는 지금 같은 때에 이런 경험을 해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크나큰 이득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렇게 싸워야 할 날이 올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참 많은 것을 얻은 전투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다만, 뭐랄까.
“흐흐.”
“이히히힛.”
“크으. 우리가 생각보다 세다니까.”
“낄낄, 무당이고 나발이고 뭐 별것도 아니지!”
“으하하하핫!”
“…….”
지나치게 좋아하며 실실 웃어 대는 사형제들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배알이 뒤틀리고 기분이 나빴다.
“좋아?”
“하하하핫. 그럼! 당연하지.”
“좋냐고?”
“……으응?”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던 사형제들이 청명의 말에 천천히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좋단 말이지?”
청명이 환하게 웃으며 물어오자 화산 제자들의 얼굴에 불안함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럼 더 좋아야지!”
“응?”
“다음 산채가 어디라고 했지?”
응?
처, 청명아?
* * *
혈랑채의 채주 탐혈랑 양쾌(陽快)는 부릅뜬 눈으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뭔……?’
마치 산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것도 웅장한 산악이 아니라 꽃이 만발한 산이 말이다.
“아아아악!”
“이, 이놈들은 대체 뭐냐!”
그 산에 휩쓸린 그의 수하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
양쾌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몰려오는 화산의 무사들 뒤쪽에 선 임소병을 확인한 순간 양쾌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병약하던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없이 건강해 보였다.
‘병이 극심하여 골골댄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나? 모든 게 우리를 낚기 위한 수작이었나?’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 아니, 거기까진 좋다.
거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임소병이 아니라 그의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이었다.
사뭇 진지하고 근엄한 얼굴로 다가오는 허여멀건 애송이를 주변의 다른 애송이들이 필사적으로 붙들며 늘어지고 있었다.
“아니, 사숙은 그동안 많이 했잖습니까! 왜 보이는 건 다 해 드시려 하십니까!”
“그럼 내가.”
“사고! 사고는 오늘 한 놈 완전 쓱싹 했잖습니까! 양보 좀 하십시오, 양보 좀!”
“너도 야차당 당주랑 싸웠잖아!”
“걔는 치면 안 되죠!”
“…….”
대화를 가만 듣던 양쾌가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 그러니까…….
‘저 애송이 놈들이 지금 서로 날 상대하겠다고 싸우고 있는 건가?’
급기야 뒤에서 혼자 다른 옷을 입고 있던 민머리 중놈 하나가 슬그머니 나서다가 머리채(?)를 잡혔다. 양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쳤다.
“이 개 같은 놈들이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아, 아저씨는 빠져!”
“거기서 좀만 기다려요! 곧 정하니까!”
“…….”
양쾌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저들끼리 옥신각신하던 놈들이 고함까지 내지른다 싶더니 결국 결론이 났는지 한 놈이 앞으로 나섰다.
살짝 가느스름한 눈.
단정하게 머리 위로 올린 도관.
“…….”
이게 도사인지 동네 건달패인지 구분이 안 가는 다른 놈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도사 티가 나는 놈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서더니 가볍게 포권을 했다.
“화산의 삼대제자 윤종이 가르침을…….”
“윤종아! 실전이다!”
“……덤벼. 산적 놈아.”
양쾌는 곧장 생각을 고쳐먹었다.
도사 티가 난다는 말은 취소다. 이 새끼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애병인 커다란 언월도(偃月刀)를 움켜잡은 양쾌는 이를 갈며 윤종에게 달려들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마!”
잠시 후, 윤종이 말끔한 얼굴로 이마에 맺힌 땀을 슬쩍 닦아 내고는 정중히 포권을 했다.
“잘 배웠습니다.”
하지만 대답을 해 줘야 할 양쾌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니, 의식의 유무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했다. 저렇게까지 피떡이 되어 버린 사람은 의식이 있다 해도 제대로 대답을 못 할 테니까.
조걸이나 유이설, 그리고 백천은 기회가 있으면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할 줄 안다.
하지만 윤종은 절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절대 무리하지 않으며 가장 안전한 공격만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상대가 부족함을 알고 물러날 수 있는 비무라면 참 반듯한 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라는 게 불가능한, 목숨을 건 생사결에서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듯한 광경이 빚어졌다.
생채기가 아무리 난들 항복할 수가 없으니 양쾌는 과다출혈로 의식이 날아갈 때까지 공격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윤종이 조금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적장을 물리쳤……. 뭡니까, 그 얼굴들은?”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반응들에, 그는 정말로 의아한 듯 물었다. 질렸다는 얼굴로 지켜보던 백천과 그 무리는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독해.”
“세상에,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될 때까지 패지?”
“……기본에 충실하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차라리 빨리 죽여 주는 게 자비롭다.
‘하긴, 저게 윤종이의 무서운 점이지.’
백천은 양쾌와 윤종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려치기만을 일 년 동안 수련한 이는 일찍부터 다른 잡기를 배운 이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내려치기만을 오래도록 수련한다면 어떤 잡기도 그 한 번의 내려치기를 당해 내지 못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감히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누가 단조롭기 짝이 없는 내려치기를 그렇게 꾸준히 수련할 수 있겠는가?
그걸 해내는 이가 바로 윤종이다.
화려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도 기본에 충실한 검.
냉정히 현재만을 본다면 오검 중에 가장 무위가 떨어지는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윤종이다. 그의 무위는 사제인 조걸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십 년이 지나고 또 이십 년이 지난다면 어쩌면 저놈이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겠군.’
참 희한한 일이었다.
백천, 유이설, 윤종, 그리고 조걸.
그들은 서로 조금도 닮은 면이 없이 다들 개성이 뚜렷했다. 성격뿐 아니라 같은 것을 배웠음에도 그 검술의 결이 각자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강해지고 있다. 다르지만 같고, 같지만 다르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백천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현상과 운검이 이끄는 화산의 본대가 산적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검에 실린 힘을 보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장사에서 있었던 작은 전투까지 합친다면 불과 세 번의 전투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세 번의 전투를 겪으며 화산 제자들의 검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백천은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백아에게 전병을 톡톡 쪼개 주는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여튼 정말.’
- 뭐? 화산이 약해?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화산이 약한 게 아니라 니들이 약한 거지!
백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저놈을 만나고부터 그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잠깐 청명을 보던 백천은 살짝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자, 그럼 정리를 해 보실까?”
“대별채인가 뭔가까지 처리하려면 서둘러야죠.”
“그래.”
고개를 끄덕인 그는 아직 항전 중인 산적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청명이 놈이 다른 산적들 잡는 거 도와주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지금 이렇게 가도 됩니까?”
“옆에서 적당히 검 들고 눈 부라리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거참.”
청명을 제외한 오검이 한철검을 뽑으며 산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채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두 개의 산채가 모두 화산의 손에 정리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대별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